바울서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2. 13. 15:57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린도전서 11:1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1:1절 말씀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요구는 참으로 놀라운 요구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았던 그 삶에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이런 요구를 하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이런 요구를 당당하게 하며 살 수 있는 믿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우리가 이 1절 말씀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하고 있는 이 말씀의 강조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의 강조점이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조건절로 붙여 놓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라는 말씀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이 말씀의 강조점은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에 있지 않습니다.

조건절로 붙여 놓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따라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1절 말씀의 의미는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았던 것 같이 너희들도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라.’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이 1절 말씀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바울의 신앙적인 상태, 영적인 상태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또 이 말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보겠습니다.

토마스 아켐퍼스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6세기 이전에 쓰여 진 기독교 고전입니다. 이 책은 초대교회 시대와 교부시대가 끝이 난 후에 이어진 로마 카톨릭 교회 시대 즉 1,000년의 종교적인 암흑시대에 쓰여 졌습니다. 이 종교적인 암흑시대는 오늘 이 시대보다 믿음으로 살기가 더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종교적인 억압강제력이 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암흑시대에 오늘 우리들도 좋은 책이라고 평가하는 이런 책이 기록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토마스 아켐퍼스가 살았던 시대는 비록 종교적 암흑시기였지만, 그런 시대에도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종교가 씌워놓은 굴래 속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과 영적 교감을 누리며 살았던 깨어 있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긴 책들이 시대를 초월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영적 감화를 끼쳐 왔으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까지 영적각성을 격려하는 촉매제 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다시 바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 영적 상태는 어떠했겠습니까?

바울은 그 당시 어떤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와 깊은 교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영성을 가진 바울이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 받아서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한 기록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바울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사는 것 같이 너희도 나와 같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그러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예수님이 사셨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그리스도와 깊은 교감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살았듯이, 너희들도 예수님과 깊은 교감 속에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라.’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저는 예수님과 깊은 영적인 교감 속에서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본받으며 살라고 한 것이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라고 한 이 말씀은, 첫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본받아서 너희도 나와 같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예수님과 깊은 영적인 교감 속에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이, 너희들도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감 속에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아멘.

 

이제 1절 말씀은 명확하게 정리가 되었지요.

그러면 이제 살펴볼 것은 바울이 이 말씀을 한 이유입니다.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 말씀을 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성도들이 가지게 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참 된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감 속에서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바른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교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깊은 영적 교감을 가지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성도들에게 영적 교감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이런 영적인 교감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 수 있지만, 이런 영적 교감이 없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영적 교감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겉모습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 같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재적인 삶은 자기를 들어내는 삶을 살고, 자기 의를 들어내는 삶을 살고, 도덕적이고 율법주의적인 틀에 묶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이 있는 경건한 성도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 속에서 거룩한 삶, 신령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깊은 교감 속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도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본 받아 영적인 깊은 교감 속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아내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들이 바울이 살았던 삶을 21세기 상황 속에서 재현해 내며 살고 있습니까?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우리들은 이런 삶을 재현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 교감을 상실한 것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영적 교감을 하며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본받아서 살 수 없고,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발자취를 따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믿음의 승패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주로 어떻게 가르칩니까? 주일을 잘 지키세요. 말씀에 순종하여 사세요. 꾸준한 기도생활을 하세요. 주를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세요.’ 등등 주로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교회는 믿음의 행실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하나님과 영적인 교감을 누리며 사는 삶에 대한 가르침도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들의 영성이 회복되면 회복된 영성은 그 신앙과 삶을 변화시키게 되고, 이렇게 신앙과 삶이 변화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새워나가는 일군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군대로 세워지는 역사가 우리에게서, 우리 교회에게서, 우리교단과 한국교회와 종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구촌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날 목회자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목회에 성공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좀 뭣하지만, 하여간 나름대로 성공적인 목회를 했다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목회자 세미나를 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수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목회에서도 그런 성공을 이루어보고자 모여듭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제자훈련을 통해 그런 역사를 이루었다고 하면 자신도 제자훈련을 통해 그런 성공을 이루어보려고 시도합니다. 또 어떤 분이 두 날개 시스템을 도입하여서 그런 역사를 이루었다고 하면 자신도 두 날개 시스템을 목회에 도입하여서 그런 성공을 이루어보려고 합니다. 또 다른 분이 셀 목회를 통해 역사를 이루었다고 하면 자신도 셀 목회를 통해 그런 성공을 이루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해서 배우게 되는 것은 목회 방법론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이 깊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터득하고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영적인 고민도 없이 그 방법론만 배워서 따라 한다고 똑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 교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입니까? 그렇다면 그 결과를 낙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이 전혀 없는 신앙이라면 그 결과를 낙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서는 다가오고 있는 종말 시대에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는 깨어 있는 영성을 소유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 있는 종말 시대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있었던 일

 

예수님은 그 공생애 사역의 끝에 이방인의 땅을 돌아다니면서 제자교육에 집중하셨습니다.

한번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아주 만족해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향한 이런 고백들은 베드로가 처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고백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예를들어볼까요?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안드레가 그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빌립도 그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은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나다나엘도 예수님과 대화하는 중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 모든 고백들도 매우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잠깐 만나 뵙고 곧 바로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였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신앙고백들을 들으시고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한 고백을 들으시고서는 아주 만족해하시는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했던 이전의 고백들과 지금 베드로가 한 고백은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어떤 차이가 있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신 것입니까?

 

아마 그 차이점은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제자들이 하였던 고백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자신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시라고 느끼고 깨달아서 한 믿음의 고백이었다면, 지금 베드로가 한 이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알게 해 준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베드로가 한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 다니면서 경험하고 배워서 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 영감을 주시고 계시를 주셔서 알게 하신 그런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이 고백은 베드로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감 속에서 영감을 받아서 이루어진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감동을 주고 감화를 주셔서 이루어진 신앙고백,’ 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 영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 안에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은혜로 선물로 주신 결과 이루어진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감 속에서 나온 신앙고백을 예수님은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런 영적인 교감이 없이 내가 배우고, 깨달아서, 경험하고, 알게 되어서 한 신앙고백들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고, 이런 신앙으로는 아직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복 있는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고백하여야 할 신앙은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 수 있었고, 또 이런 신앙을 가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본받으며 사는 자신을 본받아서 너희도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믿음의 본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가 본받으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흔하지는 않습니다. 간혹 존경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가까이 지내다 보면 흠이 들어나고 허물이 보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그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긍휼이 필요하고 자비가 필요합니다.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없으면 부부사이도, 오랜 친구사이도 계속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도바울은 당당하게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나를 본받으며 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가는 것 같이, 너희도 나의 본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들의 모범이 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으며 살아야 할 삶의 모범을 보여주며 살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모범이 되고 모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살펴보았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본받으며 살아야 할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요한14:8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그 제자들을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3: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요한복음 13:1절 말씀에서는 그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신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삶을 통해서도 사랑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신성을 부인하시고 인성을 취하셔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그 신성을 부인하시고 동정녀 탄생을 통해 사람의 육신을 입으셨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신적인 본질인 사랑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적인 사랑, 아가페 사랑을 공생애 사역을 통해 보여주며 사셨습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군대 귀신이 들려서 거라사 지방에 있는 무덤 사이에서 고통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게 하였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고 있던 수가성의 한 여인을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는 성전으로 가시지 않고 38년 된 한 병자를 찾아 베데스다 우물가로 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하여 배고픔이 극에 달하였을 때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서 먹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3일 동안 먹지 못하고 굶주려 있는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시기 위해서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셨고,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한 일들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믿고 섬기며 사는 하나님이 바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율법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담고 있는 계명들이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은 사람들이 가진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이 사랑은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비춰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이 사랑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12:20)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죄인들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박해하고 핍박하는 사람들까지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속한사람들은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따지는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히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이런 세상 속에서는 약점을 잡히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잘한 일에 대해서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칭찬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잘못한 일을 보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그 일을 곧 바로 따지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는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드러난 죄를 문제 삼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죄인들을 이해해 주고 감싸주고 덮어주려는 마음이 작동하게 합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성도들은 예수님도 자신과 같은 삶을 사셨다는 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라고는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 공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셨다면 어떤 삶을 사셨겠습니까? 상상이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는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가지고 있는 죄가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죄를 정죄하고 책망했습니까? 저는 예수님이 단 한번도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죄를 책망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만난 38년 된 병자의 죄를 책망하셨습니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낸 죄를 가지고 책망하는 일은 없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고 나아올 때 언제나 받아주고 품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 주신 유일한 경우가 바로 그 죄를 숨기고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들의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바리새인들도 자기가 죄인인지를 깨닫게 해 주셔서 구원해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자신들의 적나라한 실제 모습을 보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나아오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드러난 죄를 책망하지 않습니다.

드러난 죄를 책망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은 오히려 드러난 죄로 인해 고민하고 아파하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할 복음을 전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에베소서 5: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아멘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이 곧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 13:18절에서는 또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아멘입니까? 성경은 열매로 그 사람을 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랑을 가진 성도, 이 믿음의 비밀을 가진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인내를 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을 때 그 배고프심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유혹하는 사단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할 때 그 배고프심을 참아내며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비 없는 사생아라고 놀려 될 때도 참으셨으며, 사람들이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을 할 때에도 참으셨으며, 사람들이 거짓으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침을 뱉고, 욕을 할 때에도 참으셨습니다.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도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심지어 그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유대인들에게 은 30에 자신을 팔았을 때에도 참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면서도 죄인으로 정죄를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때에도 참아내셨습니다.

 

미태복음 26:53-54절입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왜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사셨다고 합니까?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시기 위해 참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왜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베드로 전서 2:19-20절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참으셨듯이, 너희들도 무슨 일을 만나게 될 때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참고 인내하면서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도가 되라고 합니다.

 

우리는 정말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라고 합니다. 어떤 때 정말 참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그냥 참기만 하면 그것이 화가 되어 마음을 병들게 하고 몸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련하게 그냥 참지 말라고 합니다. 죄인들의 거역하는 것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참으라.’고 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오래 참음인데 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참으라고 합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힘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참아 내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이 오래 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은혜 안에서 참으며 사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본받으며 사는 삶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아멘.

 

또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은 어떤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22:42) 그리고서는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순종하는 삶의 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앉으라 하면 앉고, 이제 죽어야겠다. 라고 하시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5:8-9)고 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배워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는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을 꿇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11:2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한 삶을 본받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2:1-4)라고 하고 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께 본 받아야 할 세 번째 삶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넷째,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레위기 11:44절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거룩함은 구별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으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죄악된 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고,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구별하고,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함을 향해 달려가는 출발점입니다.

고후6:14-16절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기록들을 보면, 더러운 것을 보면 눈을 씻었다고 합니다.

더러운 말을 들으면 귀를 씻었다고 합니다. 말로 죄를 지었거나 말로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했으면 회초리로 그 입을 때렸다고 합니다. 이런 글들 속에서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들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노력하지 않으면 성령도 도와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하심을 이루시기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셨습니다. 우리들도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피 흘릴 각오를 하고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본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네 번째 삶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에베소서 4:22-24절 말씀을 보면 거룩함을 이루어나가려면 세 가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옛 사람의 생활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4:22) 둘째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4:23, 12:2) 셋째는 신령하고 거룩한 습관을 길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4)

 

그러면서 그 구체적인 삶에 대해 이어지는 4:25절 이하에서 잘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옛 사람의 생활 태도를 버리고 옛 사람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거룩한 습관으로 우리 자신을 길들여 나가는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감으로,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는 거룩하고 구별된 하루하루의 삶을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