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거절하는 믿음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8. 14. 15:14

거절하는 믿음

히브리서 11:24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날이 계속되면 우리 믿음도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믿음에 대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더위도 이기시고, 믿음으로 신앙도 잘 지켜나가시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히브리서 11은 믿음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대표적인 두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고르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모세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무려 12절이나 언급하고 있고 모세에 대해서는 무려 7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은 구약시대를 믿음으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모세는 믿음으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사람 중에 모세의 믿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지고 살았던 그 믿음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살았던 믿음의 은혜, 믿음의 축복이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신앙의 삶 속에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모세의 삶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느보 산에서 죽은 그때까지 늘 함께 해 주시면서 은혜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편에서 보면, 모세는 40세가 되기 이전까지는 애굽의 왕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40세에 믿음의 결단을 하고 그 후부터는 평생 동안 하나님만 믿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자 예언자를 모세 앞에 보내셔서 장차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낼 구원자가 온다는 것을 예언하도록 하셨습니다.

 

1세기 유대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 직전에 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그는 덕망이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사람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앞서 보내셔서,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해 오신 메시야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야가 곧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느 날 동방박사들이 메시야의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남을 알리는 메시야의 별을 보고 그 태어나신 왕에게 경배하려고 왔다고 하면서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나시는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이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가장 긴장했던 사람은 바로 헤롯왕이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정적이 될 수 있는 그 아기를 찾아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숨기고, 서기관들이 알려 준대로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너희가 가서 그 왕을 찾거든 나에게도 알려 달라.’ ‘나도 그 왕에게 경배 드리길 원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꿈에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에게 속은 줄 알고 박사들이 별을 보았다고 한 그 때를 기준으로 두 살 아래의 어린아이들을 다 죽이게 하였습니다.

 

역사는 반복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 이와 유사한 일이 전에 애굽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애굽에 한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기 위하여 곧 구원자를 보내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을 듣고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애굽 왕 바로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낼 자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려고 아주 반인륜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명령은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애굽 강에 던져 죽게 하고, 여자 아기가 태어나면 살려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를 살려두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일가족을 다 멸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 아므람요게벳에게는 미리암이라는 딸과 아론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 요게벳이 또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 임신은 이들 부부에게 큰 근심거리였습니다. 만약 그 아기가 딸이라면 괜찮겠지만 아들이라면 나일 강에 버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우리를 노예로 삼아 힘든 노동을 시킬 뿐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에서 멸절시키려고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게 하라는 잔인한 명령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아내가 여자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던 아므람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아므람아 두려워 말라 내가 전에 너희 조상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것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다. 너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약속한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세에 대해서는 너는 딸을 달라고 구하고 있으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피하여 너희가 생각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양육하게 될 것이다.’ ‘장차 그 아기가 애굽의 지배 아래 고통 받고 있는 너희민족을 구원해 낼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 그 아들 아론에 대해서는 그 아기의 형인 아론은 나의 제사장이 될 것이며, 그 후손이 이 세상 끝날 까지 제사장직을 맡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이런 기도응답을 받은 아므람은 이후 모세의 임신사실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태어난 이후에도 3개월 동안 숨겨서 키웠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습니까? 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아므람의 아내 요게벳은 임신을 했는데도 전혀 입덧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기를 출산할 때도 전혀 산고를 겪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웃에 사는 그 누구도 요게벳이 아기를 임신했는지, 또 아들을 낳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태어 난지 3개월이 되어가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모세는 영아가 아닙니다. 모세는 아주 활동적인 아기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모세를 숨겨 키우고 있는 것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그들은 다 죽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데 전에 하나님께서 이 아이는 네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양육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 내고, 자신들이 이 아기를 키우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키우시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듯이 자신도 그와 똑 같은 방법으로 갈대상자를 만들어서 모세를 그 상자 안에 넣고 나일 강 갈대숲 사이에 띄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누이 미리암에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지켜보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아므람이 이렇게 한 이유는 노아가 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받은 것과 같이 이 아기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해 주실 것을 바랐던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갈대상자는 나일 강에 물놀이하러 온 하셉수트 공주에게 발견 됩니다.

공주는 갈대 숲 사이에 있는 예쁜 상자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시녀에게 그 상자를 건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건져온 그 상자 안에는 너무나도 잘생긴 아기가 입을 오물오물 거리면서 웃고 있었습니다.

 

당시 하셉수트 공주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모세를 보는 순간 강한 모성애가 작동했고, 이 아기를 내가 양육해야겠다는 강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공주는 이 아기에게 젖을 먹여 줄 부인을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그 아기는 시녀들이 데리고 온 애굽 여인을 거부하며 젖을 먹지 않을 뿐 아니라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여인을 데려왔는데 이 아기는 똑 같이 고개를 돌리고 울며 그 여인이 주는 젖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때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미리암이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왕님 이 아기는 히브리인의 아기여서 히브리인 여인을 불러온다면 젖을 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셉투스 공주는 그러면 네가 알고 있는 히브리 여인 한 명을 데리고 오라.’라고 했고 미리암은 그 어머니 요게벳을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요게벳이 가서 젖을 물리자 아기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 젖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요게벳은 모세의 유모가 되었고 공주로부터 유모의 삯을 받으면서 합법적으로 모세를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모세의 삶에 늘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늘 모세와 함께 해 주시면서 은혜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 편에서 보면 다릅니다. 모세는 태어나서 그 부모님들과 함께 한 3개월, 또 그 어머니가 유모로 있었던 몇 년을 지낸 후에는, 공주의 양아들 즉 애굽의 왕자의 신분으로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모세가 언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됩니까?

모세가 장성한 후 모세의 양 어머니 하셉수트 공주가 섭정을 끝내고 모세와 함께 궁중에서 자란 투트모스 3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새로 애굽 왕이 된 투트모스 3세는 모세가 애굽 사람도 아니고 애굽 왕족도 아니라는 것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애굽 왕자로서 누리고 있던 일부 특권들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허울뿐인 애굽의 왕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세의 갈등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제까지 모세는 나는 애굽의 왕자다. 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자긍심은 무너졌으며, 심지어 애굽 사람이 아니라고 경계하고 무시하고 조롱까지 당했습니다. 이런 급작스러운 삶의 변화를 모세가 쉽게 수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후 모세는 그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짐승 같이 일하고 애굽 사람들에게 학대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오랜 시간 고민하고 갈등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애굽에서 왕자의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특권을 주셨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예언자가 한 예언처럼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그 모든 특권들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명을 깨달은 모세는 신앙적인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모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는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모세가 느보 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지 늘 모세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 편에서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은 그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로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다릅니다. 저는 20대 중반에 믿음의 고백을 하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또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의 고백을 할 때 믿음의 결단도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 없이 이루어지는 믿음의 결단은 없고, 믿음의 결단 없는 믿음의 고백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것은 모세의 경우도 같았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할 때 동시에 믿음의 결단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모세가 했던 믿음의 결단에 대해 히브리서 11:24-26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니라.”

 

이 때 모세는 세 가지 중요한 결단을 하였다고 합니다.

첫째,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가져다주었던 세상적인 유익들을 거절하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둘째, 모세는 죄악 된 세상에서 낙을 누리며 사는 삶보다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삶을 기뻐하며 고난도 자처하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셋째,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고 그 맡겨진 사명에 헌신하는 신앙을 결단하게 됩니다.

 

당시 모세가 했던 믿음의 결단 중에서 우리는 그 첫 번째 결단인 모세의 거절하는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모세가 가장 먼저 했던 믿음의 결단은 거절하는 믿음이었습니다. 24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믿음의 결단이 모세에게 쉬웠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믿음의 결단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 믿음의 결단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셉수트 공주의 양 아들로 있으면서 그 특권을 누리며 애굽 사람으로 사느냐? 아니면 애굽에서 고난당하고 있었던 그 동족 이스라엘 사람으로 사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도 있었지만, 이것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애굽 사람으로 애굽의 신들을 섬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인가? 라고 하는 이 신앙의 문제입니다.

 

왜 이 신앙의 문제가 훨씬 어려운 문제였습니까?

그 이유는 이 신앙의 문제는 내가 결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은 은혜이고 믿음은 선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셔야 사람들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40세에 믿음의 결단을 했다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던 모세를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믿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있으면 누리고 살 수 있는 그 모든 특권들을 포기하고 애굽에서 고난당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결단을 통해 믿음의 첫 발을 내 디딘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무엇이 모세로 하여금 이런 결단을 하게 했습니까?

물론 어린 시절 그 부모로부터 받았던 신앙교육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봅니까?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 아기를 자기들에게 몇 년 만 맡겨 놓으면 평생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이 공언대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 뿐 아니라 미리암아론도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양육하여 왔습니다.

 

우리 속담‘3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어릴 시절 교육이 그 사람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육학적으로도 인정되고 있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모세가 어린 시절 그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신앙교육이 믿음의 결단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모세가 신앙적인 결단을 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예언이었습니다. 전에 한 선지자가 일어나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 애굽 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 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모세는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깨닫고 신앙적인 결단을 하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일을 위해 자신을 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애굽 왕족이 되게 하시고, 왕족들만 받을 수 있었던 특수한 교육까지 받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사명을 깨달은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11-12절입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또 다음 날 모세는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2:13-14절입니다.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모세는 자기가 깨달은 사명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려고 하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알려주기 위해서 애굽 사람에게 고난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구해주고 또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말리며 화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모세는 분노한 바로를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간 목동으로 살게 됩니다.

 

모세와 같지는 않지만 우리들에게도 다 이런 신앙의 결단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의 시작은 이런 결단을 통해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이런 결단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네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의 첫 시작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없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부인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이 마태복음 6:24절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기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1세기 통용되고 있던 노예 법에 따른 격언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에 한 노예두 주인을 섬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때 노예는 자기는 얼마든지 그 주인에게 들키지 않고 양다리를 걸치듯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종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때 동일한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느냐? 섬길 수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교차대구법이라는 독특한 어법으로 이 문제의 핵심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동일한 마음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 종이 한 주인을 미워하고 다른 주인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미워한다.”는 단어는 정말로 미워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종이 두 주인을 섬길 때 이 주인을 저 주인보다 덜 사랑한다.”라는 사랑의 경중을 표현하는 셈족적인 언어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동일한 표현이 신명기 21:15-1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어떤 남편이 사랑하여 결혼한 아내를 미워하겠습니까? 정말 미워하였다면 결혼을 하도 않았을 것이고, 또 결혼 후에 미워하게 되었다면 이혼증서를 써 주어서 이혼하지 왜 미워하는 아내와 함께 자녀를 낳고 살겠습니까? 이 때 미워하였다는 이 말은 정말로 미워했다는 것이 아니고 덜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전체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더 사랑하고 하나는 덜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아내가 각각 자녀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때, 덜 사랑을 받고 있는 아내가 낳은 자녀가 장자이면 반드시 그를 장자로 인정하여 유업을 받는 날에 장자의 몫인 두 몫을 그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더 사랑을 받는 아내가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이 사람을 장자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말라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대로 믿음의 사람이었던 야곱은 사랑하고 세상적인 들사람이었던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을 더 사랑하고 에서는 덜 사랑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정말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 마태복음 5:4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정말 예수님이 인용하고 계시듯이 율법에서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에 이런 말씀이 있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라고 율법과 상충되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인용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이 말씀도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나 이웃이나 똑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6절을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형제와 자매도 미워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미움의 종교가 아니고 사랑의 종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 특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정말 사랑하고 있는 부모와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덜 사랑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이 모든 것들을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말씀들을 볼 때 미워한다.’는 말은 정말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것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마치 미워하는 것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마치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통해 강조하고 계신 것은 사랑과 미움’, ‘중히 여김과 경히 여김의 대비를 통해 어떤 노예든지 동일한 사랑으로 똑 같이 마음으로 두 주인을 사랑하고 충성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두 주인을 사랑하고 있는 종이 있다고 해도 그는 두 주인에게 사랑의 비중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우선순위에 의해 두 주인 중 한 주인을 택하여야 할 때에는 한 주인을 더 사랑하게 되고 다른 한 주인은 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6:24절에서 예수님은 이 원리를 하나님과 재물에 적용하셨습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에 될 때 반드시 이런 마음의 편향이 일어나듯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그 앞에 두게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의 편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종이 두 주인을 섬기고 있듯이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재물을 덜 사랑하게 되고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똑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 둘 중에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때가 되면 사람들은 더 중히 여기는 것을 선택하고 경히 여기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을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6:4-5)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제 1계명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라고 아주 명확하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돈을 이용하게 되었습니까?

돈이 주는 편리함 때문입니다. 만약 돈 없이 지금도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이 때 사람들은 그 돈 자체에 가치가 있어서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주고받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으로 상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돈에는 사람들을 예속시키는 강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배금주의 사상은 돈에 사람들이 예속되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배금주의 사상으로 돈에 예속되는 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물도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전적인 예속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청년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불가능함을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청년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 영생을 얻으려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은 신앙의 부모로부터 좋은 신앙적인 유산을 물려받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네게 있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쫒으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청년에게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자청년은 돈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돈에 예속된 사람이었고 돈의 종이 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하나님 나라보다 돈을 택하고 이 세상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보다 그 가진 재물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후 이 청년의 삶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누 누구도 이 청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면 이 청년은 이런 삶을 살지 않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고 따르라 라고 하신 그 말씀이 계속 양심을 통해 들려오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요구하신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청년은 재물이 주는 유익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어했을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면 재물이 걸리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니 그 재물이 부담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서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예수님이 해 오셨던 일들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되었습니다.

 

부자청년은 이 때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것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아마 예수님이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그 말씀대로 따르지 않은 것이 너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청년이 근심하며 떠나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재물이 많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 예수님은 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을까요? 부자는 재물의 힘과 재물이 주는 유익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자는 재물이 얼마나 든든한 성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자는 재물로 하지 못하는 것이 별로 없고 재물로 안 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힘과 능력과 역사를 이루게 해주는 재물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 청년에게 먼저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자청년에게 처음에는 그냥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가 나중에 이 청년의 믿음이 성장하게 되면 그 때 가서 그 재물을 하나님 나라 역사에 쓰시도록 할 수 있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먼저 그 재물을 나누어주고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른 신앙은 먼저 거절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네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까지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의 첫 시작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부인이 없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은 먼저 거절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자기 부인에서 시작된다는 것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그 모든 것들을 먼저 마치 배설물즉 똥과 같이 여겨 다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바로 세상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이유는 이 떠남이 확실하지 않으면 언제 아브라함이 다시 그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함으로 시작하였던 모세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특권을 거절함으로서 그의 위대한 신앙을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이면서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유지하려고 근심하고 걱정하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 내는 일을 하라고 할 때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신앙의 결단을 해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 삶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또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결단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의 진실함은 그가 믿음을 위해 버린 것의 크기와 비례하고 우리 신앙의 진실함도 우리가 믿음으로 먼저 버린 것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단을 할 때 무엇을 버리셨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믿음으로 버리고 있습니까? 바른 신앙은 먼저 버림에서 시작되고 진실한 신앙은 먼저 자기 부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신앙의 첫 결단을 할 때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님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이 세상에서 받을 복과 천국에서 받을 복에 대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버리지 못함으로 신앙도 구원도 천국도 결국 그 많은 물질도 다 잃어버린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다릅니다. 그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났던 아브라함은 다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영화를 버린 모세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약속하신 말씀처럼 이런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여러 배를 받아 누리는 은혜의 삶을 살 뿐 아니라 또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사는 축복된 삶이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내용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더 늦기 전에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아직 젊기 때문에 세상을 끊어 버리고 신앙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재미 좀 더 보고 나이 늙어서 마음에 준비가 되면 그 때 예수 믿는 것을 생각해 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렇게 예수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이제까지 누리며 살아 왔던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을 보면 이런 자기부인의 결단이 없이 자신과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음도 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잘못된 전도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을 보면 예수 믿고 구원도 받고 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도 받으라고 전합니다. 이렇게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도 받고 또 예수를 믿고 세상 복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성도들을 보면 예수를 믿는 믿음과 세상에 주는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신앙인이 많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는 모습을 가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화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성도들 중에는 신앙을 시작할 때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버릴 것을 버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하는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의 시작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신앙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신 것도 바로 먼저 버리고 나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유명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 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기도문은 아무나 고백할 수 있는 기도문이 아닙니다.

신앙의 출발점에서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24절에서 한 알이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처럼 열매 맺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이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신앙의 출발점에서 자기가 죽고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라 줄 것이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 되니라 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역시 신앙이 출발점에 자기가 죽고 자기를 부인하는 경험을 한 성도들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면 신앙의 출발점에서 모세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사람들은 왜 이런 삶을 살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게 되면 그 만큼 자기에게 손해가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들도 보니 믿음으로 나눠주는 교회가 복된 교회가 되더라고요.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여서 다른 교회 그것도 힘이 없는 개척교회 목회자를 섬기는 교회들 중에 성장하지 않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나누어주는 교회가 도리어 풍성한 교회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나누어 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도 나누어주고 은사도 나누어주고 시간도 나누어주고 사랑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삶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역사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가난하여 지고 도움을 받는 사람이 오히려 풍부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보면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헌신해보면 그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나누어주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내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누어 주는 것이 더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것이 더 많겠습니까?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오는 유익은 이런 세상적인 유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요함을 주시고 영성에서까지 풍요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나누어 주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육 간에 부요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람들은 비가 조금 오래 오지 않거나 또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불평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삶 속에 당하는 조그마한 어려움도 이겨내질 못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때는 성경이 말씀해 주고 있듯이,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이상기후로 인해 지구전체에 가뭄과 홍수와 기근이 오게 되고, 또 땅이 흔들리는 지진과 쓰나미와 화산폭발이 빈번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경제가 어려워지고 또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곤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성도들은 종교적인 박해까지 당하는 고통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런 고통의 날들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될까요?

 

그 날에 목회자가 겪게 되는 가장 큰 아픔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신앙을 지도하던 성도들이 마치 추풍낙엽처럼,’ 믿음에서 떠나는 것이 보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 때 후회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려고 하면 지금부터 성도들을 바른 신앙으로 세워나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환난의 날에도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는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신앙의 시작에 모세와 같이 세상을 거절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자기를 부인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먼저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 모세와 같이 먼저 거절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믿음으로 무장을 하여서 지금은 세상을 이기고 종말의 날에는 환난과 심판을 이기고 최후심판의 자리에서 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신앙의 성공 자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