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해야 하는 경주
법대로 해야 하는 경주
디모데후서 2:5(3-6)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디모데후서 2장의 말씀을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이 세상의 모든 운동경기 들은 나름대로의 규정과 규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축구를 예로 들어보면, 축구는 온몸을 사용할 수 있는 경기입니다.
그러나 골키퍼 외에는 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이 규칙을 어기고 손으로 공을 잡거나 손으로 공을 치게 되면 핸들링 반칙이 됩니다.
마라톤을 예로 들어보면, 마라톤은 지정된 코스를 빨리 달리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결승지점에 이르려고, 지정된 코스를 벗어나거나, 지름길로 달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빨리 결승지점에 도착을 해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기 규정과 규칙 위반으로 실격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운동경기에는 나름대로 규칙과 규정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 규칙과 규정대로 경기를 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말씀대로, 법대로 경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을 어긴 불법자로 여김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승리자의 면류관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보면 크게 세 부류로 구분 됩니다.
첫째는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사람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대로 경주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면, 이 세 부류 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사고를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실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법대로 경주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먼저 살펴볼 것은,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시장에서도 볼 수 있고, 택배 기사에게서도 볼 수 있고, 우리가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누가 더 유능하냐? 누가 더 좋은 실적이 올리느냐? 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치열한 경쟁관계 속에 있는 일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일을 능률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성취해 나가는데 방해되는 요인들은 과감하게 제거해 나갑니다. 그래야만 일을 효과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LK-99 라고 알려 지고 있는 신물질 상온 초전도체가 아닙니까? 초전도체는 전기 저항이 0이 되는 물질입니다. 전기를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전달시켜주는 물질입니다. 그래서 전기를 사용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물질입니다. 만약 이 초전도체 개발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는 그 어느 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경제 강국이 될 것입니다.
이 신물질 연구와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초전도체를 연구하는 일에 모든 시간, 모든 노력, 모든 지혜, 모든 힘을 쏟아 부으며 살아온 일 중심의 사람들이 아니겠습니다.
이렇게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이루어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고자 한다면 일 중심의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사고로 공부에 몰두하는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고, 또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사람들은 목적하던 일을 이루어 내게 됩니다. 지금 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사람들, 지금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 가장 큰 단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나,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하는 일에 이익이 되고, 어떤 사람이 내가하는 일에 유익하냐?’ 하는 것에 목표를 맞추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인격이나 존엄성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혹 일 중심의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여서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목적하고 있는 일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상대방이 가진 재능과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렇게 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가진 능력과 재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고통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처해 있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사람이 과거에 얼마나 회사에 기여했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우리 회사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냐 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유능하고 재능이 탁월할지라도 지금 우리 회사에 이익을 주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라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이런 일 중심의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교회는 세상과 똑같은 조직체가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는 이런 일 중심의 사고방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가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교회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런 목회자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그 하는 일이 잘 될 때에는 목회의 보람을 느끼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지만,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그 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 때에는 심한 좌절감과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진 목회자는 그 나름대로 목회의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성숙한 목회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일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교회를 볼 때도 일 중심으로 됩니다.
곳곳에서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 서로 다른 이해가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일 중심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자신이 대형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 자신의 신앙도 대형화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이것은 대기업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대기업의 직원으로 있는 것에 프라이드를 갖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면, 큰 교회에 다니고 있는 자신은 신앙의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의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합니다.
일 중심의 사고는 교회를 그 규모로 평가합니다.
여러분 큰 교회를 섬기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큰 교회를 섬기는 것은 큰 교회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고,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은 작은 교회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숫자를 가지고 그 목회자를 판단하시고 그 교회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어떤 목회자에게는 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게 하시고, 또 그들로 하여금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닮아 가게 만드는 위대한 일을 하게 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어떤 목회자에게는 작은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그 모인 소수의 영혼들을 섬기고 양육하도록 하시기도 하십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 교회 지도자가 목회 사역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의 사역을 하고 있는가? 있지 못한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느냐? 하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관점인 일 중심의 사고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일 중심의 사고를 극복하게 되면 얻게 되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이런 성도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을 하는 성도가 됩니다. 또 자신이 하는 일을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일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이라고 믿으면, 그 일에 충성하고 헌신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성도가 됩니다.
이렇게 일 중심의 사고를 극복한 사람들은, 세상 적인 성공이나 사람들의 칭찬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믿음으로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일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다음에 살펴볼 것은, ‘사람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뭔가를 이루어 내어야 비로써 인정해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룬 업적과 성과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관점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여야 인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승리자의 상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는 삶을 살았어도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인정해 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7:22-23절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법대로 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법을 행한 사람으로 보신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비록 작은 일에 충성하며 살더라도 법대로 경기한 사람들의 삶과 사역을 인정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21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이것이 사람들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들이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당을 크게 짓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을 모아서 대교회를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는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에 빠져서 멸망당한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해 내주시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하나님은 일 중심으로 사고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 중심으로 사고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서, 교회를 크게 짓고, 교회 역사 속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업적 남기는 일을 더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하신 사람들을 존귀하게 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만물보다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으로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신 십자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그 무엇보다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시하시는 것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서 복음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으로 타락한 사람들의 인격 속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 잃어버린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아멘.
이 하나님을 믿었던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중세 카톨릭교회의 교권주의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던 사람들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휴머니즘 문화를 일으켰습니다. 이 인본주의 휴머니즘 문화는 그 이후 인류 역사를 주도하고 있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공자, 맹자와 같은 철학자들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을 그 중심에 두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그리고 깨달아서 가르침을 주어 왔는데, 이것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준 가르침의 중요한 잘못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권적인 섭리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부인하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중심이 되시는 세상과 사회를 배격하고, 인간이 그 중심이 되는 사회를 이루어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신을 배제한 인본주의 문화를 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본주의 문화에서 나온 것이 ‘신은 죽었다.’라고 하며 신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철학입니다. 여기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진화론이며, 공산주의 유물론이며, 동성애 합법화를 주장하고 있는 시도들입니다. 현대 철학과 사상들은 비록 그 모양과 형태는 달라도 거의 다 이 인본주의에서 파생되어 나온 부산물입니다. 현대의 정치, 문화, 사회, 철학, 종교, 교육, 과학 등등의 배후에는 이 인본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은 바로 이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와의 싸움에서 상처 입은 신앙이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 자유주의 신학은 오늘날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적대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의 이 인본주의와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이 만나는 접합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인간을 존중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우리 기독교 신앙의 배후에는 인간 존중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접촉점으로 삼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을 존중해 주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독선적이거나 강요하는 자세로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독선적인 자세로 복음을 전하면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인권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 전도자들은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배려심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 세상에는 일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고, 사람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사람 중심의 사고를 가진 인본주의와 우리 신앙이 만나는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존귀하게 보고,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는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와 우리 기독교 신앙은 차이점도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을 그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하나님의 시야와 관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사고와 신본주의 사고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신본주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람들을 세워나가고, 사람들을 변화시켜나가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나가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10:45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 물로 주기 위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하신 성자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내어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는 하나님이 중심이 된 사역을 호도해 온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종교화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군의 전쟁이 바로 그 한 예일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처음에는 신앙적인 동기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군의 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일도 아니었고, 또 사람들 살려내고 구원해 내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의 원리주의자들도 이와 똑같은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심지어 무죄한 사람들을 죽이는 테러를 고귀한 신앙의 행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종교가 정치 세력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정치가 합하여지면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아 버리는 무수한 악행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역사의 마지막에 등장하게 되는 적그리스도가 정치와 종교를 한 손에 쥔 폭군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세상의 심판 주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 하실 때에, 그 심판하시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5: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게 한 것을 바로 예수님께 한 것으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분명한 말씀을 주셨는데도, 인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악행들이 행하여져 왔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들은 원주민들이 믿고 있던 미신을 타파하고, 참 종교인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하였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종교적인 열정이 가져온 오류입니다.
비록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행하여졌지만, 이런 일들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며, 사람들이 자기 이익,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한 악행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그 일이 하나님을 일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들도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일들도 종종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소위 세상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세상 적인 성공과 세상 속에서의 업적을 이루어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과 그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과 헌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까?
하나님이 성령으로 영감 해 주신 그 말씀을 통해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여 세웠던 에베소 교회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였습니까?
에베소서 1:17-1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베풀어주시는 충만한 은혜 속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성령 충만함 주시기를 구하고, 성령의 가르치심을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깨어 있는 신앙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일 중심의 사고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에, 직장인들은 그 직장 생활 속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책임성 있게 감당해 나가되, 그 공부만을 목적 삼고, 그 일만을 목적 삼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이 여기는 사람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살되, 하나님을 배격하고 오직 사람을 그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도전은 바로 이 인본주의 사상과 인본주의 신앙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하는 신앙은 신본주의 신앙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신본주의,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깨어 있는 성도로 살아가는 신본주의 신앙이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 즉 주인 된 자세로 그 인생을 살아가는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삶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늘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성도의 숫자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비록 모인 사람들이 적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 또 그 속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누리며 사는 기쁨들이 충만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죽은 영혼을 살리는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교회는 바로 이런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법대로 경주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따라 사람을 살리는 교회, 사람을 세워나가는 교회, 영혼을 살려 나가는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면서 복음 전파에 헌신해 나가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