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성도의 감사 생활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7. 7. 14:34

성도의 감사 생활

데살로니가전서 5:18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절기가 있습니다.

그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그중에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절기는 맥추절입니다. 이 맥추절을 우리는 맥추 감사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수장절초막절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표현으로 하면 추수감사절이 됩니다.

맥추절유월절로부터 7일씩 7주간 후에 지켰던 절기라고 하여 칠칠절이라고 하기도 하고, 첫 번째 보리 추수를 마치고 지켰던 절기라고 하여 초실 절이라고 하기도 하며, 유월절 이후 50일 되는 날에 지켰던 절기라고 하여 오순절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맥추절, 초실절, 칠칠 절, 오순절은 다 같은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지켰던 절기인데, 이 날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받은 날이며, 신약의 교회는 이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받았던 날이기도 합니다.

 

금년에는 이 날이 519일이었습니다.

이날 한국교회는 성령 강림 주일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이날 약속하신 성령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었지요. 그리고 7월 첫째 주인 오늘 맥추 감사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왜 오순절을 맥추 감사 주일로 지키지 않고, 따로 7월 첫 번째 주를 정하여 맥추 감사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이스라엘의 상황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5 월 달에 보리를 수확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 월 달에 보리를 수확합니다. 그래서 선교 초기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님들이 교회 절기를 정할 때, 이런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 하여서 성령 강림 주일은 그대로 오순절 날에 지키고, 맥추 감사 주일6월 보리 추수를 마치고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매년 7월 첫째 주를 맥추 감사 주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절기의 날을 바꾼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추 감사절 속에 담겨 있는 핵심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맥추 감사절의 핵심에는 그해 거두어들이는 보리 수확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리를 수확하지도 않고 보리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리 수확을 마친 후에, 풍성한 보리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맥추절의 날짜를 바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 맥추절의 핵심적인 의미는 풍성한 보리 수확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농경사회가 아닙니다. 보리를 수확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에 농부가 풍성한 보리 수확을 주신 것을 감사했듯이, 지난 6개월 동안 우리 삶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맥추 감사 주일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맥추 감사 주일을 지키는 기본적인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6개월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맥추 감사 주일을 지킬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면,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늘 불평불만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은 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늘 불평불만 하며 살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18 절에서는 감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맥추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범사를 감사하며 살려면, 일상생활 속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에 사모가 노원구에 있는 모 복지관에 입사원서를 낸 일이 있습니다.

그 복지관은 노원구에 있는 큰 교회가 위탁 운영하는 기관이었고, 또 제가 사회복지사 실습을 한 기관이기도 합니다.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저희로서는 그런 기관에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기관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광고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이력서를 냈습니다. 입사 신청서를 낸 사람 중에 서류 심사를 통해 3명을 뽑았는데 거기에 뽑힌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가지고 면접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뽑히게 해주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직원으로 뽑혔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처음에는 조금 실망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제가 늘 마음에 소원으로 가지고 있었던 일이었고, 그 소원대로 기회가 와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다.’고 믿고 접수했는데 전혀 다른 결말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제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하나님께서 그 취직 시험에서 떨어지게 하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정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에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우리 가정에 도움이 되고, 또 우리 가정을 위해서 좋은 일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게 되자, 취직 시험에서 떨어진 것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이 일을 통해 똑같은 사건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고, 어떤 관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아이가 셋이라 그 세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겨운데, 만약 사모가 취직까지 해서 직장생활에 매이게 되면 그 삶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사모가 취직을 했더라면 그 받게 될 연봉이 당시에는 2,000만원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 정도 연봉을 받으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직장생활에 쏟아 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안스러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여러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하신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존귀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귀한 존재, 존귀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인 사람들이 한 달 직장에서 수고하고 애쓴 결과로 받게 되는 월급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적은 월급을 받아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하고, 또 그 하는 일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갖게 되자 제 생각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은행을 이용하면서 직원들에게 별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가진 이후에는 은행 직원들이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은행에서 일하고 받게 되는 월급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늘 고객들을 도와주려고 하고, 또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돈으로 가게를 차려놓고, 그 파는 물건이 필요한 다른 사람을 위해 하루 종일 그 가게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기가 고장이 나면 금방 전파사에 가서 부품을 사 올 수 있고, 몸이 좋지 않으면 약국에서 필요한 약을 사서 복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요양보호 제도가 얼마나 잘 되어 있습니까?

몸이 불편하시거나 와병 중에 있는 어르신들이,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아주 적은 비용을 지급하면서 양질의 요양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요양 서비스를 받으면서 매달 부담하는 금액은 정말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그 생활형편에 따라 많으면 15%, 적으면 무료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양서비스를 받으시는 어르신들이나 그 가족들이 어떤 생각을 가져야겠습니까?

적은 돈을 내고도 양질의 요양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가 센터를 운영해 보면 도무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이 유지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길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적은 시급을 받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입할 수 있도록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복무를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저희 자녀들도 둘씩이나 군대에 가서 지금 이 시간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함으로 우리 사회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적은 보수를 받으며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수고와 노력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 사회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제 마음속에는 이런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귀한 사람들이, 적은 월급을 받으며 하찮은 일을 하면서도 감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만약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가능만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는 사업주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큰돈을 벌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적은 돈을 받기 위해 일하면서도, 그 일을 통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을 보충해 주기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뿐 아닙니다.

눈을 돌려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고 있는 아내가 너무 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누가 아내에게 월급을 줍니까? 수고했다고 그 수고를 누가 알아주기나 합니까? 그런데도 일 년 365일 가족을 위해 수고하는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내만큼 많이 수고하고 많이 애쓰는 사람이 또 누가 있습니까? 아내 한 사람의 자기희생 때문에 가정이 안정되고 또 가정이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너무 귀하더라고요.

이 세상 부모들이 다 똑같겠지만, 일부 부모들은 돈을 잘 벌어서 자녀들이 하고 싶다는 것을 다 해줄 수 있지만, 대 다수의 부모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나은 옷을 사 입히지도 못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 주지도 못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엄마 아빠를 보면서, 자기 부모라고 공경하고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것을 볼 때 그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또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도 너무 감사한 사람들이고, 지하철을 운전하는 기관사도 너무 감사한 사람들이고, 택배 아저씨들도 너무 감사한 사람들이고, 슈퍼 배달 직원도 너무 감사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사람들이 하며 사는 수고들이 너무 귀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이런 사람들이 하고 있는 그 모든 섬김과 수고가 그렇게 감사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그때 비로써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더라고요.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더라고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하며 사는 일들이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제 마음에서는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얼마 되지 않는 버스 요금을 내고, 편안하게 내가 목적하였던 곳까지 가면서도, 온종일 운전을 하며 시민들을 섬기고 있는 운전기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운전기사가 조금만 심하게 차를 몰면 난폭운전을 한다고 불평하고, 버스가 조금 늦게 오면 왜 이렇게 버스가 시간을 지키지 않느냐고 불평해 왔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가지게 되자, 아내에게 부끄러워지고, 자녀들에게 부끄러워지고, 물건을 살 때 비싸다고 불평한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최소한의 이익을 남기고서라도, 최대한 싸게 팔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를 감사하며 살려고 하면 먼저 일상생활 속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늘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감사한 일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또 우리는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말씀을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먼저는 범사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또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하게 되는 감사와, 하나님께 하게 되는 감사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람들 사이의 감사는 사람이라는 동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감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사람 사이의 감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감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해도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에 따라서 사랑의 대상을 제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이유도 조건도 없이 원수까지도 사랑하시고, 심지어 자신을 배반하고 은 30에 유대인들에게 팔아넘긴 가룟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우리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죄인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죄인 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마치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대속 적 죽으심이, 자신의 죄를 위해 죽어주신 것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전해 주셨던 약속대로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안에서, 우리들에게 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원한 찬양의 주제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원한 감사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말씀에서도 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생각하게 될 때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지 나사로와 한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나사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나사로는 스스로 자기 생활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것은 중병까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나사로가 구걸하러 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구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부자 집 담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구걸하며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부자가 짐승 먹으라고 던져주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런 나사로가 오래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어느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며 살고 있던 나사로는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사로와 그 부자 집 주인이 함께 죽었습니다. 이 부자는 왜 죽었겠습니까? 나사로는 너무 못 먹어서 죽었다면, 부자는 너무 잘 먹어서 죽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잘 먹어서 성인병에 걸리게 되고, 일찍 죽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처지가 죽은 후에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불타는 지옥에 들어가 고통 중에 있었고,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처지가 역전된 것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록 나사로는 병든 몸으로 구걸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은 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구원사건을 골고다 언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고백을 듣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감사가 있습니까?

만약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환경이 어떻든지, 삶의 여건이 어떻든지, 건강 상태가 어떻든지,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데에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범사를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신앙 고백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처한 삶을 보면 감사할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자신을 구원해 주실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었을 때 하는 감사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안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생활은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50편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감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이며, 감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보여주시고 나타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늘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는 어떻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셋째,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 우리의 시선을 끄는 한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지금도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의 계절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또 봄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절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 계절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왔습니다. 한 번도 겨울이 오고 다시 가을이 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침이 되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역사의 마침표를 찍는 그날까지 이런 일은 계속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성도 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말씀을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성도 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계절은 창세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오고 있듯이, 날은 창세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해 오고 있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을 향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될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불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져서, 그 백성들은 이방 군인들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강도 짖을 당하고, 약탈을 당하고, 산업을 빼앗겼으며, 살아남은 자는 포로로 끌려가고, 도망한 자들은 이방 땅으로 유리방황하며 갖은 고생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면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면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항변하고 있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을 주고, 그래서 절망하도록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마치 이방 사람들과 같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받았던 하박국 선지자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나님의 주신 그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떠난 그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구원해 주시려고 하고 계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우리가 범사를 감사하며 살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입장, 내 생각, 이 처지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참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하고, 깨닫는 것이 부족하기 때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임하게 되면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만사를 만세 전에 예정하시고, 또 그 예정하심 안에서 주권적인 섭리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게 될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주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깨닫게 될 때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갈등들은 어디에서 옵니까?

잘못된 이해에서 옵니다. 잘못된 이해 즉 오해가 모든 갈등의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알면 알수록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면 알수록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을 더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더 정확하게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우리들의 삶 속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줄어들고 감사와 감격은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고, 더 바르게 알고, 더 정확하게 알게 되면, 이런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잘 깨닫게 되어서, 그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말씀과 같이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 안에서 왜 감사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실 때,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안에서 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실 때,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예레미야 선지자, 하나님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알았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이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 29: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아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있게 깨달았기 때문에, 비록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전쟁에서 져서 그 땅에 황폐해지는 것을 보고서도, 이방인이 그 땅에 와서 포악하게 약탈하는 것을 보며 살면서도, 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전해 듣고서도, 또 바벨론 군대를 피해 애굽으로 도망하였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당하는 고통을 직접 보면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다 잃어버린 이스라엘 박성들에게, 하나님이 70년이라는 포로 생활의 고통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며 살게 될 하나님의 군대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비록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지게 됨으로 그 당하게 되는 모든 일들이 재앙과 같지만, 이것은 재앙을 주시기 위한 주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장래에 평안과 희망을 주시려는 목적에서 주신 재앙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그 육신에 있는 사단의 가시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하고 고통하였습니까?

그런데 이 바울의 괴로움과 고통이 어떻게 해서 감사로 바뀌었습니까? 그것은 그 고통이 자기로 교만하지 않게 하고, 겸손한 삶을 살게 해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게 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이 깨달음이 원망과 탄식을 바꾸어 감사와 감격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사로 병 고침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사로 각종 예언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 삶이 어떠하였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바로 깨달아서, 범사를 감사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감사가 바로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 안에서 누구보다 더 크게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 안에서 그 누구보다 더 많이 크게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2024맥추감사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신앙이 되고 삶이 되어질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