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설교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7. 21. 16:03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9

 

오늘은 7월 셋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초복(15)을 지나고 이제 중(25)을 앞에 두고 있는 무더운 여름철이 되었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우면 우리의 신앙도, 삶도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요즘은 연일 계속되는 장마와 집중 호우가 이곳저곳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년에는 무더위도 장마도 앞으로 오게 될 태풍도 큰 피해 없이 지나가게 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마태복음 5:9절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화평케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1. 세 가지의 화평

 

본문에서 화평케 하는 자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에이레네'입니다.

이 단어는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볼 수 있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화목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심령 안에서의 평강입니다.

세 번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화평입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 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불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려고 하면, 먼저는 그 죄에 대한 처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죄가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죄는 그 모양이라도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적은 죄라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인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려고 하면, 반드시 가장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는 어떻게 처리됩니까?

율법의 동해보상의 원칙에 의해서, 죄가 없는 사람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죄가 처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죄인인 사람들이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 처리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성자 하나님을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들 대신 고난받고 죽어주심을 통해, 사람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복된 소속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요한복음 14:6절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내가 유일한 길이고, 내가 유일한 진리고. 내가 유일한 생명이다.’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고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인류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5:1절 말씀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사함 받고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우리 심령 안에서 누리며 살게 되는 평강입니다.

 

팔복의 말씀들 사이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순서는 어떻게 됩니까? 먼저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죄를 애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애통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다른 사람들을 향해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바로 평강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심령의 평강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주어지는 평강은, 하나님이 그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은혜로 은사로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기도 하고, 엑스타시 즉 알 수 없는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충만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영적 체험들이 사람의 보기에는 놀라운 것일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일시적인 은혜이며 한시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는 계속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 은혜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까? 심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까지도 이런 은혜를 경험하였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예수 믿는 우리에게 주신 심령의 변화입니다.

이 은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인격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이 은혜는 한 번 주어지고 끝나는 한시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이 은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 같이 영원한 은혜이며, 우리 마음 안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그런 은혜입니다. 영원토록 지속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평강 마음의 평화입니다.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화평입니다.

 

우리가 전에 팔복의 말씀들은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연관성이 있었습니까? 가난한 마음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연관성이 있고, 죄를 애통해하는 마음은 청결한 마음과 연관성이 있고, 온유한 마음은 화평케 하는 마음과 연관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주시는 화평은 온유한 마음과 연관성이 있는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 죄를 회개하고 그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온유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화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마음이 온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먼저는 예수를 믿음으로 그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 안에 성령을 통해 주시는 것이 마음의 평강입니다. 그리고 평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서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 안에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마음 안에 가진 내적인 평강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화평을 이루며 사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미 그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며, 그 죄를 애통하며 토해내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렇게 해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5:9절 말씀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는데, 화평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세 가지 화평 중에서 어떤 화평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입니까? 우리 마음 안에 주어진 평강입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화평입니까?

 

이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화평은 우리 마음 안에 주어진 평강을 말씀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화평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게 되는 화평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9절에서는 화평케 하는 삶을 사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해 보면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고쳐 읽을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 말씀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고 있는 삶 즉 화평케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이 화목은 하나님의 죄용서와 우리의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참 평화를 가져다주실 메시야를 믿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려 오던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고대하고 기다려 온 메시야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왕으로 오셔서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유대인들을 구원해 주시는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심으로,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시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고난받는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 시켜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영광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고난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달랐습니다.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메시야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후 하나님의 구속사에서는 이방인 교회가 그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이방인의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원해 오고 계십니다.

 

사람의 두 손이 마주쳐야 박수 소리가 나듯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죄 용서인간의 회개가 마주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죄용서와 인간의 회개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화목의 중심적인 요소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때때로 기도가 막히고, 예배가 막히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는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고, 우리의 예배가 잘못되어서라기보다는,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 막혀 있고, 풀리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 즉시 우리는 관계가 깨어진 사람은 없는지, 원망들을 만한 일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이 나면, 먼저 가서 그 사람과 화해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사람 사이에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 그 마음에 죄악을 품고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5:23-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의 죄 용서와 인간의 회개하는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이 세상은 서로 불화하고 원수 맺기를 잘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려고 하면, 누군가가 먼저 희생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을 때 사람 사이에도 화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생활도 보십시오.

가정에서도 누군가는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고 또 기도에 헌신합니다. 그 결과 그 가족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평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또 이 사회를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고, 죄인들을 위해 울어주었기 때문에, 나라는 평안하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들로 볼 때 사람들 사이에서 화평의 직분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자기를 내려놓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화평케 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대립과 반목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화목케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럴 때 화목케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화목의 주님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자기의 뜻, 자기의 주장, 자기의 이론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를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목의 주님이 될 수 있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 입장과 자기주장대로 하셨더라면 결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화평의 직분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둘째, 쌍방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그 예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화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입장사람의 입장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 시키시는 일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죄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면서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주시기 위하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마치 자신이 죄인이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이었던 사람들의 입장도 잘 이해하고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처녀였던 마리아의 몸 안에 잉태 되시어서 한 사람의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열 달 동안 그 어머니 태 속에서 자라셨고, 태어나신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시는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철저히 한 인간이 되셔서 30년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죄인이 된 사람들의 입장과 절망을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된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메시야가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이 무엇입니까?

화평케 하는 삶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마음의 평강을 이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화목을 이루어야 할 당사자인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화목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

 

사람들을 보면 그 가진 능력은 많으나 화평한 삶은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그 가지고 있는 믿음은 좋은데 사람들과는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적 신앙은 좋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왜 믿음은 좋은데 사람들과의 관계는 깨어져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을 구별하고 차별할 때 화평은 깨어집니다.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화평은 깨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 화평의 사람들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화평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느 편에도 들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편에서게 되면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화평은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평케 하는 삶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평화, 사랑과 자유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9절 말씀에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화평을 이루어 가는 삶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주신 팔복의 마음 중에서 화평케 하는 이 마음은 그 단계가 일곱 번째 단계입니다. 이 정도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이제 이런 사람들은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화평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인정해 주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화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도 보고,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나의 아들이야.’라고 인정해 주시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런 우리들은 사단도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성도가 됩니다. 사단 마귀의 역사와 사단 마귀의 방해는 이 단계가 되면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게 됩니다. 반목을 통해 갈등을 조장하고, 불신을 통해 관계를 파탄내고자 하는 사단의 역사는 믿음으로 화평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화평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단 마귀도 어찌할 수 없는 성도가 됩니다.

 

왜요. 화평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은 갈등과 대립과 분쟁케 하는 삶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믿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원 높은 믿음의 삶이, 이 거룩하고 고차원적인 성도의 삶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되어 지시길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온유와 겸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도 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화평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화목의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화평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듯이, 우리들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야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성도, 또 하나님으로부터도 저는 나와 마음이 같은 나의 아들이야.’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