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이기는 믿음, 승리하는 삶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5. 2. 2. 13:37

이기는 믿음, 승리하는 삶

요한복음 16:28-33

 

요한복음 16:33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해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듯이, 너희도 이기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라.’라는 말씀을 해주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기는 믿음, 승리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두 가지 대조적인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 안에서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는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도들은 두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 안에,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삶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속사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변화를 우리는 거듭남’, ‘다시 태어남’, ‘하나님으로부터 남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받게 되면 이런 영적인 변화가 사람들에게 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육신은 다릅니다.

우리 육신은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이후에나 똑같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힘이 세어지거나, 얼굴이 예뻐지거나, 갑자기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성도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분의 차이만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우리들은 변화된 속 사람변화되지 않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후 우리의 삶 속에는 변화된 영혼과 변화되지 않은 육체 사이에 갈등이 있게 됩니다. 우리 영혼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살려고 하고, 우리 육신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 영혼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외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영혼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 육신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라고 소리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누가 이기더라고 합니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언제나 죄의 법이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초대 교회 집사였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에게도 이런 갈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명절에 성지순례를 왔다가,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 많은 사람이 명절 후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하루 이틀 지나가자 준비해 온 경비가 떨어져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도와줄 수 있도록, 구브로에 있는 자기 땅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놓았습니다. 바나바의 헌신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쳐서, 너도나도 자기 소유를 팔아 교회에 헌금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자기 집을 개방하여 머물 곳이 없었던 성지순례 온 성도들이 먹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로 성도 사이에 형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유무상통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 분위기 속에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기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 땅을 판 큰돈을 손에 쥐게 되자 육신이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돈을 다 바치지 말고, 절반만 바치고 절반은 장래를 위해서 남겨 두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 육신의 소리를 듣고 바친다고 약속한 돈의 절반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성령은 베드로를 통해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영혼과 육신의 싸움,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에서 육신이 이기고 사단이 이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행하고도 죽은 것입니다.

 

저의 마음 속에는 이들이 그때라도 다윗처럼 회개하고 돌이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랬으면 선한 일을 행하고도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동일한 싸움이 있습니다.

육신과 성령의 싸움이 늘 있습니다. 로마서 8:5-6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싸움에서 우리 영혼이 이기면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이 감동 주신 그대로 순종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우리 육신이 이기면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이기적인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합리화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 싸움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라는 요구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받은 다음 날 새벽 일찍이 일어나 서둘러 준비하여 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집에 몇일 지체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주신 이 말씀을 가지고 그 아내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의논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삭을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이 싸움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해 왔습니다.

실패의 경험이 쌓이면서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선한 감동을 주시면, 상황을 보지 말고, 내 입장과 처지만 생각하지 말고, 곧 바로 지체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시간을 끌면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지나면 결국 우리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신 감동대로 순종하여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우리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됩니다.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우리 육신이 득세하게 됩니다. 지체하면 우리 육신은 무슨 이유, 무슨 핑계를 대어서라도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감동대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선한 감동을 주시면, 전후좌우를 살피지 말고 곧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육체를 가진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성령을 통해 선한 감동을 주시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곧바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의 삶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고 하십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감동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어떤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라고 하십니까?

 

첫째,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라.”고 하십니다.

 

평안한 삶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삶입니다.

이 평안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샬롬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기드온이 만났던 하나님은 여호와 샬롬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며 사는 평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평안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은 우리 삶의 환경과 조건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평안입니다. 예를 들면 사업이 잘되고, 직장에서는 승진하고, 자녀들은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고, 가정은 화목 하는 등등 부족함이 없는 환경 속에서 느끼는 평안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삶의 환경이나 조건에서 오는 평안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평안은 삶의 환경이나 조건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우리 마음속에서 누리는 평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 이 평안은 누리게 됩니까?

우리가 죄를 사함 받게 되면 이 평안이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게 되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삶의 여건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과는 전혀 다른 평안, 영적인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죄 사함의 평안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는 이런 찬송을 흥얼흥얼 따라 부르지 않았습니까?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로마서 8:1-2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죄 사함의 평안을 얻은 후에 이렇게 승리의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할렐루야! 아멘!

 

예수를 믿고, 그 죄를 사함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 믿음으로 주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정죄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명 주시는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 안에서 누리며 살게 되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을 얻게 될 때 비로써 우리 영혼은 쉼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2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수고하며 살아야 하는 짐이 있고, 또 죄의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세상의 환난과 역경들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면 환난과 역경들이 우리 삶에 다가와도 우리 마음은 주님이 주시는 쉼과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살아가는 삶 속에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이런 찬송을 부르며 살지 않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있는 한 근심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때때로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주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근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더라고요?

부모와 함께 있는 어린아이는 걱정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부모가 보이지 않고 홀로 남아 있게 되면 곧바로 걱정되고 근심이 되어 울게 됩니다. 그러다가 부모가 짠하고 나타나 안아주면 아이는 곧바로 울음을 그칩니다. 왜요? 아이는 그 부모를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를 만나게 되어도, 아무리 위험한 곳을 지나게 된다고 해도, 우리의 심령에 주님을 모시고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은 이 세상의 주권자시오.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삶에 함께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28-29절에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두 번을 똑같이 빼앗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을 강조할 때에는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성도들을 예수님의 손에서,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아주 힘주어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두 분이시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중적으로 완벽하게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한 고통과 어려움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학국 성도님은 평생 전도하며 살아왔는데 말년에 고관절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김정숙 집사님은 어떻습니까? 김천환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모두 다 고관 절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인생을 말할 때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은 인생에는 네 가지 고통이 있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늙어가는 괴로움이 있다는 말이고, 세 번째는 병이 들어서 고통하게 되는 괴로움이 있다는 말이며, 네 번째는, 그 끝에는 결국 죽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는 고통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환난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세상 사람들이 당하며 사는 환난은 다릅니다.

우리는 육신 적으로는 환난을 당해도 정신적으로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마음으로 믿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 찬송할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는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 안에서 조건과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는 평안,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까?

둘째, “주 안에서 담대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담대하라는 이 단어는 안심하라’ ‘용기를 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주는 이 세상이 아무리 크고 강하여도, 이미 이 세상은 예수님에게 정복당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패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 사시면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과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시험과 어떤 고난을 당하며 사셨습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40일을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셨겠습니까? 마귀는 배가 고프신 예수님을 찾아가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라고 시험했습니다. 이 시험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신적인 능력자기를 위하여,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쓰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구원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 있으니, 그렇게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네가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 주어서 믿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기적과 능력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는 메시야가 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다 보여주면서 네가 나에게 절하면 이것들을 다 네게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섬기며 사는 삶을 거부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는 메시야가 되시겠다는 하시면서, 사단아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받는 메시야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며 사는 모든 고난을 우리 대신 당하시고 이기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이,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담대하라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고난어려움을 만나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실 때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자 사람들의 조롱 소리를 들으면서도 홀로 산꼭대기에다가 배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자 가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까지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자 기근 때 그가 판 우물을 거듭거듭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자 그 노년에 천하를 다스리던 애굽 왕 바로를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강하라.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는 약속을 해 주고 계십니다. 이 약속은 구약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내가 모세와 함께했던 것 같이 너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도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졌던 다윗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온 군대가 두려워하는 골리앗 앞에서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골리앗보다 전쟁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까? 골리앗 보다 그 가진 무기가 우수했기 때문입니까? 골리앗보다 힘이 더 세고 키가 더 컸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세상 조건으로 보면 다윗은 모든 면에서 열세였습니다. 그런 다윗이 담대할 수 있었던 근거가 그가 한 말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 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라는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모든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주 안에서 담대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또 예수님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까?

셋째, “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다 이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내 안에 있으면 세상을 이길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과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고 우리는 그 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으니, 예수님의 몸인 우리도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승리가 또 나의 승리라고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승리를 우리도 누리며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믿음의 승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아멘

 

이미 예수님이 승리하셨는데, 왜 우리는 지금도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2차 대전 때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그러자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했습니다.

 

일본 천황은 항복했지만, 일본의 정예 군인들과 경찰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진 무장을 해제하고 그 통치권을 넘겨받아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일본이 항복한 그 순간에, 군대와 경찰이 다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땅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서 극심한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연합군이 일본 군인과 경찰에게서 통치권을 넘겨받을 때까지 비록 일본은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게 되셨지만, 예수님의 통치권이 확립되도록 삶의 현장에서 마귀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 만물 통치권을 넘겨받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마귀와의 피 터지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승리하신 그 승리를 믿음으로, 그 승리를 삶 속에서 확인하고 확증해 나가는 싸움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나가야 할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도 이 말씀을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시각각으로 도전해 오는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길 원하십니까? 우리가 이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사도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이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으면, 우리들도 바울과 같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지만,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에게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삶은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을 우리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는 승리하신 예수님이 계신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예수님이 이루신 승리를 그 삶에서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에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까?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까? 이 많은 사람입니까? 재능과 은사와 능력이 많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자들이 세상을 이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7 절 말씀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37 절 말씀에서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우리 몸의 정욕도, 이 세상도, 사단 마귀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앞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이기심 안에서 나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예수님의 이기심 안에서 나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