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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을 열어 주심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5. 3. 9. 15:59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심

히브리서 10:19-22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성경

 

요한복음 5:39 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지금 우리는 .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구약성경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중심적인 내용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구약성경은 인류의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기록된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서 약속해 오신 메시야가 예수라는 사람으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그 예수님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죄악 된 세상은 심판하시고, 성도들은 구원해 주심으로 인류 역사는 끝이 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 전체는 누구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는 예수님을 증거해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해 보면,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발견하면 올바르게 읽은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면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보면, 하나는 육신에 속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영에 속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 달랐습니까?

 

육신에 속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은 어떤 말씀으로 읽혀집니까? 이런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창조 이야기, 족장들의 이야기,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에 속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영에 속해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 족장들의 이야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들을 통해 메시야를 보고, 듣고, 만나고, 믿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히브리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성막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던 성막을 통해,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 열어주신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2. 구약의 성막 제도

 

히브리서는 그 제목의 이름과 같이, 히브리인들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보내진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보면 특별히 구약성경의 인용이 아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구약의 성막 제도는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사람들을 위해 행해주실 일들을, 미리 예표 적으로 보여주고 알려주신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여 주실 구속 사역이 실제 모습이라면, 구약의 성막 제도는 앞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고 알려주신 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막 제도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제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막 제도를 통해 보여주셨던 실재를 완성하시고, 성취하시게 되면, 더 이상 성막의 제도들은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완성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성전 제사는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성막 제도를 통해 보여주신 실제 내용을, 예수님이 그 몸으로 성취하시고 완성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성막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성소성소성막의 뜰입니다.

 

성막에는 넓은 뜰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막의 문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면 성막의 뜰이 나옵니다.

이 성막 뜰 안에서 첫 번째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물두멍이었고, 두 번째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번 제단이었습니다.

 

물두멍은 물을 담아 놓은 커다란 용기라고 보면 됩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이 물두멍에 담겨 있는 물로 그 손을 씻어 성결케 하였습니다. 번 제단은 백성들이 자기 죄를 사함받기 위해 잡은 짐승을 불태워서 드렸던 곳입니다.

 

성전 뜰 안에서 세 번째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이 성막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곧 성소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성소입니다.

 

성소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소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하루 두 번씩 들어가서 분향하였던 곳입니다.

 

성소 안에는 금 촛대향단떡 상이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늘 금 촛대 위에 불을 켜 두어야 했습니다. 성막은 불을 켜두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아주 캄캄한 곳이었습니다. 향단에서는 하루 두 차례씩 향을 피웠습니다. 떡 상 위에는 매 안식일마다 떡을 바꾸어 올려두었습니다. 이 일은 제사장들이 했습니다.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써, 성소와 구별되게 아주 두꺼운 휘장으로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첫째, 법궤가 놓여있었는데, 법궤 속에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명의 두 돌 판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담아 두었던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법궤의 뚜껑에는 그룹 즉 천사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 주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천사들 사이에서 종종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곤 했습니다.

 

성소에는 섬기는 제사장들은 하루 두 번씩 들어가서 분향하며 섬겼습니다.

그러나 지성소는 달랐습니다. 오직 1년에 한 번씩, 대 속죄일인 710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먼저 물두멍에서 손을 깨끗하게 씻어서 자신을 정결하게 한 후에, 자기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아 번 제단 위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의 피를 받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속죄 소 즉 법궤 뚜껑 동편에 7, 속죄 소 앞에 7번 뿌려야만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받아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속죄 소 즉 법궤 뚜껑 동편에 7, 속죄 소 앞에 7번 뿌려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이 일을 해야만 했고, 또 백성들을 위해서도 이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지성소는 거룩한 곳이라서 죄가 있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자신과 백성들의 속 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이 지성소 안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그 안은 향불 연기로 가득 차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죽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16:11-16절입니다.

아론은 자기를 위하여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양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 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 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 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 소 위와 속죄 소 앞에 뿌릴지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 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지성소는 이렇게 거룩한 곳이었습니까?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면 지성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들은 이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곧바로 멸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휘장을 져 놓았습니다.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상징합니다. 지성소 앞에 쳐져 있었던 휘장과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죄의 담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고, 인간의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태초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담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아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간은 죄인이 되었고, 죄인이 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교제는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통해 이 교제가 끊어지게 된 것입니까?

먼저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이들에게 사단 마귀는 곧바로 유혹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유혹의 말이 아담과 하와에게 아주 달콤하게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탐욕의 마음을 품게 되었고, 이 탐욕이 결국 죄를 짓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결국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는 죄의 담이 된 것입니다.

 

죄인이 된 인간은 더 이상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이었던 에덴을 잃어버리고, 지금처럼 하나님을 떠나 세상 속에서 유리방황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두꺼운 휘장과 같은 죄의 담이 쳐지게 된 것입니다.

죄인이 된 인간은 그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처한 처지이고 그 모든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3. 찢겨진 휘장

 

그런데 2,000년 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50-5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 주실 때, 하나님의 성막 안 즉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었던 이 휘장은 본래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의 담이었습니다. 죄의 담이었던 이 휘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휘장이 찢어져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어, 우리 대신 죽어주신 그 대속 적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의 죄가 다 사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사함받은 우리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의 담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 죄를 사함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새로운 교제가 생명의 교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찢어진 휘장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11-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자기의 죄와 그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던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어서 단번에 열어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 앞에는 막힌 죄악의 담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에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다고 합니다. 아멘.

 

4.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심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통해 이 죄의 담을 제거해 주셨다는 것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문제를 짊어지고,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이 열어 주신 그 생명의 길을 통해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

 

사람들은 죄를 짓고서도 그런 자기 자신에게 아주 관대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오늘날 정치인들을 통해 많이 보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또 전에 우리를 놀라게 했던 지존파 사람들을 통해 보지 않았습니까? 지존 파를 조직한 이 사람들은 자신과 아무 원한도 없는 사람들을, 다만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납치해서 죽이고 또 그 사체를 토막 내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들은 그 끔찍한 일이 발각되고, 붙잡혀서, 사람들 앞에 TV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기보다는 고개를 쳐들고 잘 사는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왜 이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기들을 분노하게 하고, 자기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게 한 대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르면서도 자기들은 자기들이 죽인 그런 사람들보다는 낫다.’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적개심과 경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우월감과 적개심과 경멸이 여기는 그 마음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를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와 비슷한 경우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에게 섭섭한 말 한마디 못하고 살던 사람들이, 전쟁터에서는 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적군들을 죽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 동료를 죽인 적군에 대한 적개심 때문입니다. 이 적개심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적국의 군인들을 죽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청년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이제 전쟁에서 싸울 군인들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드론을 활용하고 있고, 러시아는 용병북한 군인들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져서, 드론이 전쟁에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드론을 조정하는 사람들은, 마치 게임 하듯이 드론을 조정하여 적의 군인들을 죽입니다. 이 드론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군인들이, 드론으로 적의 군인들을 죽일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낄까요. 아니면 오늘 내가 드론으로 적의 군인 몇 명 죽였기에, 우리 군인들이 방어선을 사수했다고 하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할까요?

 

휴대용 미사일로 적의 비행기를 떨어뜨린 군인은 어떨까요?

내가 휴대용 미사일로 적의 비행기를 맞추어 추락시켰다고 자랑스러워할까요? 아니면 내가 격추시킨 그 비행기를 몰던 조종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해 줄까요?

 

탱크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인들은 내가 휴대용 미사일로 적의 탱크를 파괴했다는 것을 자랑하지, 그 탱크 속에 타고 있던 적군들의 생사를 염려해 주지는 않습니다.

 

적개심과 이 분노의 마음은 믿음을 가지는 데도 걸림돌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만, 잘 믿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그 마음속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고,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해 주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려고 하면, 먼저 그 마음속에 있는 분노적개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믿음이 심어지고, 또 심어진 믿음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볼 때,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 그리고 그 깨달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드려 양과 소를 사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던 행위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희생과 헌신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4절 말씀을 보면, 아벨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벨이 드렸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이 희생과 헌신으로 나타났던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에서도 이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에서 나오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벨의 제사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13-14절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9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이 자기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염소와 황소를 잡아 그 피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 제사는 대단한 믿음의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많은 재물이 필요했습니다. 많은 재물을 허비하여야 드릴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속죄 제사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로 드렸던 속죄 제사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주신 것이,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한 대속의 죽으심임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에 우리의 헌신은 무엇으로 표현됩니까? 헌금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헌금에 우리의 헌신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해 주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해 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시대 성도들이 자기가 지은 죄를 슬퍼하며,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그 속죄의 예물로 드린 양과 염소의 피가 그 사람의 양심을 치유하고, 육체를 정결케 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보혈이 양과 염소의 피보다 더 능력이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역사하여 양심을 깨끗하게 해 주고, 죽은 옛사람의 행실에서 떠나게 해주고, 또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그 사건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짐승의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가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휘장이 갈라짐으로, 우리 앞에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늘 소망을 가지게 해 줌으로 더 이상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장례식을 천국 환송 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죽음을 이 세상에서의 고생과 슬픔의 삶을 뒤로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거룩한 의식, 거룩한 예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살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들의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것을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앞에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믿고, 그 열린 생명의 길을 통해 장차 가서 살게 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여서, 어두움 속에 유리방황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주고, 전해 주며 살아가는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삶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