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약속의 자녀, 약속의 말씀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5. 6. 8. 13:04

약속의 자녀, 약속의 말씀

로마서 9:6-13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은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이런 바울이 볼 때, 이방인들은 자신이 전해 주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나아와 신약교회의 일원이 되고 있는데, 그 동족 유대인들은 복음의 원수를 자청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리시고, 이방인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택하신 것 같았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은 누구보다 그 동족 유대인들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고 있는데, 왜 유대인들은 완악하게 되어 복음의 원수를 자청하고 나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어떤 응답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 때도 있고, 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다니엘서 9:24절 말씀에서는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70 이레라는 기한을 정해두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25절 말씀을 보면 그 70 이레의 시작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일곱이레와 예순 두이레가 지난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26절 말씀을 보면 이 69 이레가 지나가면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던 구원의 역사는 끝이 난다고 합니다. 69 이레 동안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때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유대인들에 의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던 구원의 역사는 끝이 나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이방인의 때가 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방인의 때는 장차 유대인들이 다시 구원을 받게 되는 마지막 한 이레가 올 때까지 계속된다고 합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는 교회 시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 받게 될 때까지 교회 시대는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의 때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다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게 되면 이방교회 시대는 끝이 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이레의 구원의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이 한 이레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 한 이레가 끝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구속사 즉 이 세상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 교회로, 이방교회에서 다시 유대인에게로 바뀐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셨다거나 하나님이 이방교회를 버리신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교회 시대 즉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하고 있을 그 당시에도, 그 숫자는 적지만 복음을 믿고 나아와 구원을 받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숫자는 적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있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이방인의 때가 끝나게 되면,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의 배교가 있을 것입니다. 이 배교의 시대에도 비록 그 숫자는 적겠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는 이방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배교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지금은 WCC라는 모습으로, 종교 다원주의라는 모습으로, 직제 일치 운동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장차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마지막 한 이레가 되면, 배교한 종교와 정치권력이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적인 인물인 적 그리스도배도한 종교를 등에 업고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정해두신 구속 역사의 시간대가 어떻게 흘러간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위해 정해 놓은 70 이레의 시간 중에 69 이레 끝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방교회는 2,000년 이상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아직 구원을 받아야 할 이방인의 숫자가 다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이방인의 숫자가 다 차게 되면, 다시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이방인에게서 유대인에게로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할 것은, 구원의 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바뀌게 된다고 해서 이제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구원의 판이 이방인에게서 유대인에게로 바뀌게 된다고 해서 이제 더 이상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시대 변화 속에서도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을 받게 됩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 복음을 버리고 배도 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구원은 개개인이 가진 믿음의 유무에 따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의 유무에 따라, 구원을 받기도 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이해 속에서 로마서 9장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살펴볼 말씀은 로마서 9:6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야곱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 이름은 야곱 개인의 이름이었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공동체인 부족국가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과 관련이 있는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진 믿음의 유무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복음을 믿고 나아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말씀은 로마서 9:7절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해서 모두가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씨 즉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는 이삭뿐이라고 합니다. 오직 이삭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았습니다. 이 이삭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이어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머지 자녀들은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상관이 없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자녀였으나, 영적으로는, 믿음 안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모두 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은 자녀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말씀은 로마서 9:10-1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셋째, 이삭의 자녀라고 해서 모두가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 에서야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믿음을 떠나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고,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에서와 야곱이 살았던 삶이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역사상 많은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말씀입니다.

칼빈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하실 자를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칼빈의 제자 베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을 가지고 이중 예정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할 자뿐 아니라 버릴 자도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베자의 주장을 평신도 지도자 코른헤르트가 반박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베자는 자신의 두 제자 알미니우스와 코마로스 중에서 알미니우스에게 코른헤르트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논파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알미니우스는 목회자이며, 강해 설교자이며, 신학자로서 당시 화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던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알미니우스는 스승 베자의 권고를 따라 로마서 9장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알미니우스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칼빈이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알미니우스는 오히려 코른헤르트를 지지하고 그를 돕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아주 긴 논쟁이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논쟁인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로마서 9:10-11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 말씀을 보면 리브가가 임신을 하고 있을 때, 아직 그 아들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그래서 그 자녀들이 아무런 선악을 행하지도 않았던 때, 하나님은 그 두 아들 중에 어린 자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행위를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약성경에 기록 되어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용되고 있는 말씀은 바로 창세기 25:23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을 바울은 로마서 9:12절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60세가 되었을 때에 리브가에게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리브가의 모태 안에서는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불안을 느낀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리브가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네가 쌍둥이를 임신하였고, 그 쌍둥이가 네 뱃속에서 싸우고 있다고 알려 주시면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여기서 섬긴다.’라는 말씀 둘류오 둘로스에서 유대 된 단어로서 구원과 관계된 말씀이 아니고, 실제로 종이 되어 섬긴다.’라는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에서는 둘류오라는 말씀을 구원과 관계가 있는 말씀으로 봅니다. 이 성경 이해의 차이가 지금까지 신학 논쟁으로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큰 자인 형에서가 어린 자인 동생 야곱을 섬기는 종이 된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서와 야곱의 삶을 보면 야곱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오히려 야곱이 에서를 섬기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이 말씀의 성취는 약 1,000년이 지난 후인 다윗 때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다윗이 에돔 족속을 이때 점령하였고, 이때로부터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여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리브가가 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라는 말씀을 들은 리브가는 하나님이 야곱을 믿음의 기업을 이어 나갈 아들로 선택하셨다고 생각하고 동생이었던 야곱을 그 형 에서보다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그 남편 이삭은 달랐습니다.

이삭은 남자답고 씩씩하고 믿음직한 첫째 아들 에서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 먹는 것을 아주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남 에서에게 믿음의 축복을 해주려고 네가 사냥을 해서 전처럼 별미를 만들어 와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마음껏 너를 축복해 주겠노라.’라고 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이 말을 리브가가 엿듣게 됩니다.

리브라가는 그 남편 이삭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야곱이 아닌 에서에게 믿음의 기업을 물려주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야곱을 불러서 그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이루자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눈먼 아버지를 속여 복을 받으려고 하다가 만약 그것이 탄로가 나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게 될까? 두렵다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만약 이 일이 아버지에게 발각되어서 문제가 되면, 내가 그렇게 했다고 말하여 그 모든 죄를 내가 받을 것이라고 하여, 야곱을 설득하고 일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런 전후 상황을 볼 때, 만약에 리브가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누가 큰 자가 되고 누가 그의 종이 되는 일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축복권을 가진 남편을 속이면서 이 일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그렇게 이삭을 속이려고 하다가 만약 발각되면 받게 될 저주까지 내가 대신 받겠다.’라고 자청하면서 그 아들 야곱을 설득했겠습니까?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리브가는 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말씀 즉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고 하신 그 말씀을 어떤 말씀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의 기업을 이어갈 자녀가 야곱이라고 알려 주신 말씀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남편 이삭이 에서에게 하려고 하는 이 축복을,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믿음의 기업을 어어갈 축복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이삭이 에서를 축복해 주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야곱과 함께 이삭을 속일 계획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단순히 큰 자인 에서가 어린 자인 야곱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져 내려온 믿음의 기업에 관해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용되고 있는 말씀은 바로 말라기서 1:2-3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서 9:13절에서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말라기 선지자에게 주신 이 말씀은, 에서와 야곱이 살았던 때로부터 약 1,600년이 지난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견해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가 살았던 삶을 보고,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너희들도 야곱과 에서가 살았던 삶을 보고 내가 어떻게 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또 내가 어떻게 살면 하나님의 미움을 받으며 살게 되는지를 배우라고 주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에서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사람에게 하는 것 보다 나에게 더 못하고 있고,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하는 것 보다 나에게 더 못하고 있고, 종이 그 주인에게 하는 것보다 나에게 더 못하고 있고, 너희 총독에게 하는 것보다 나에게 더 못하고 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라기 1:6-8절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 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너희가 저주를 받고 사는 것은, 너희가 내게 한 행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려고 하면, 에서 같이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야곱같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삶을 보고 그를 사랑하셨고, 에서의 삶을 보고 그를 미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려고 하면, 야곱처럼 살고 에서 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다.’라는 말씀까지도 동일하게 해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모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야곱같이 살았던 사람들만이 참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모두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며, 아브라함이 살았던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 참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견해입니다.

 

칼빈주의 자들의 견해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섬기며 살고 있는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에 계신 분으로서,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게 될 그 모든 삶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녀들을 두고, 그 자녀들이 선악 간의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던 때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선택은 사람의 행위를 따라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따라 되었다고 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야곱은 믿음을 중요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믿음을 중요시하였다는 것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그가 장자의 명분을 중요시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믿음의 기업의 받으려고 발부 등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축복과 믿음의 기업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으면 눈먼 아버지를 속여 가면서 까지 그것을 받고자 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에서는 달랐습니다.

에서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자의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 풍습에 빠져있는 이방인 여인들과 결혼하여 부모를 근심시키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가진 믿음은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합니다.

믿음이 있었던 야곱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고, 야곱은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처음에는 사기꾼과 같았던 사람이 나중에는 거룩한 영성을 가진 족장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었던 에서는 달랐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기른 군사들을 의지하여 나중에는 에돔이라는 한 나라를 건설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 야곱과 에서를 두고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가진 서로 다른 믿음을 보시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라기서가 기록될 당시 제사장들의 경우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산다고 하는 제사장들이,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못하게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하는 것보다 못하게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종이 그 주인에게 하는 것보다 못하게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총독에게 하는 것보다 못하게 하나님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제사장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런 제사장들에게 지금 너희는 믿음 없는 에서처럼 살고 있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믿음으로 살았던 야곱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성경 말씀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너희는 에서와 같이 살지 말고, 야곱과 같이 살아라.’라고 하신 말씀으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칼빈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자들은 같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너희가 에서와 같은 믿음을 가지지 말고, 야곱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라.라고 하신 말씀으로 봅니다.

 

정리하면, 알미니안 주의 자들은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의 행위를 보고 이 말씀들을 하신 것으로 보고, 칼빈주의 자들은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의 믿음을 보고 이 말씀들을 하신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말라기서는 단순히 제사장과 백성들의 행위를 문제 삼고 있는 말씀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런 행위를 하며 살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가진 믿음을 문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너희는 에서가 가졌던 믿음이 아니라, 야곱이 가졌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 믿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행위를 강조하는 알미니안 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목회자가 되고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가진 성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가져다주는 영혼과 인격과 삶의 변화와, 믿음으로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과 역사하심을 믿고, 이루고, 누리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정하심이 우리 믿음의 기초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8:30절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믿음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울 서신들을 보면, 앞에서는 먼저 믿음의 문제를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그 후에 믿는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성도들의 삶은 그 가지고 있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만세 전에 나를 택하여 주시고, 때를 따라 불러 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해주시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말씀을 배우게 해주시고, 그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이 귀한 믿음을 값없이 주신 것은 감사하며, 주어진 이 한해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