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종말신앙과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바람직한 종말신앙과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요한계시록 11:15-18
오늘날은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시대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회자’되고 있는 종말에 대한 주장들을 보면 과거의 주장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일부 광신적인 종교집단에서 종말을 말해 왔는데 오늘날은 종교계와 세상이 동시에 인류의 종말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계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종말을 이야기하고, 세상 사람들은 되어가는 현상을 보고 종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이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한 외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종말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1. 먼저 바람직한 종말신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바람직한 종말신앙은 어떤 신앙이어야 합니까?
첫째, 철저히 현재성을 지닌 종말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불행한 삶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불행한 삶 고통스러운 삶에서 도피해 보고자 종말신앙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종말 신앙도 아니고 성경적인 종말 신앙도 아닙니다.
잘못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현실도피적인 종말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 신앙을 가지되 철저히 현실에 근거를 둔 종말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철저히 윤리성을 지닌 종말신앙이어야 합니다.
종말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반사회적이고 반문화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때때로 이단의 교주들과 그 추종자들이 자기 조직을 위해서 폭력이나 파괴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이단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단에는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잘못하면 폭력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는 종말신앙은 바른 종말신앙이 아닙니다. 종말 신앙은 철저히 윤리성을 지녀야 합니다.
셋째, 신앙의 균형성을 지닌 종말신앙이어야 합니다.
신앙의 균형성을 잃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사람들은 신앙의 균형성을 잃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종말장’에서 분명하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들은 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고 자기들은 그 날과 그 시를 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신앙의 균형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적 분별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종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신앙의 균형성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에 빠지고 각종 미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2. 초대교회의 종말신앙을 살펴보겠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우리와 같이 임박한 종말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종말 신앙은 ‘마라나타’ 신앙이었습니다. 이 ‘마라나타’ 신앙은 요한계시록 22:20절에 나오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믿는 신앙이 바로 ‘마라나타’신앙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종말의 날에 성취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에 대한 소망의 성취를 가져다주는 세상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사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부활신앙’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부활신앙’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적인 생명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 새 생명은 영생하는 생명이며, 하나님이 가지신 생명을 함께 소유하게 되는 생명이며, 그래서 신의 성품과 신의 본질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생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신적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소망을 골로새서에서는 ‘복음의 소망’이라고 했고, 베드로서에서는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부활신앙은?
첫째,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기록들이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 ‘나사로’를 보십시오. 그는 중동의 무더운 나라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 몸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자 나사로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자기 발로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 예수님이 나인이란 한 성에 들어가실 때 그 성에 사는 한 과부가 죽은 외아들을 장사하러 가면서 얼마나 슬피 우는지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 하시고 그 상여를 멈추게 한 후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은 청년이 다시 살아났던 일도 있습니다.
- 예수님 뿐 아니라 베드로도 욥바에서 살다가 죽은 ‘다비다’ 라고도 하고 ‘도르가’ 라고도 하는 여 제자의 시신을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 라고 하자 그가 눈을 뜨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다시 살아났지만 그 육신의 생명을 다 하고 난 후에는 다시 죽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지 부활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부활신앙은?
둘째, 하나님이 주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소망하며 살았던 ‘부활’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생명이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인간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란? 하나님이 영생 하시는 분이신 것 같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신성으로 충만하신 것 같이 신적 영광으로 충만한 그런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
그런데 ‘부활신앙’에서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이 부활생명을 어떤 사람들이 누리고 참여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한다고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가장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잘못된 종말 신앙을 가진 사람들, 특히 시한부 종말을 추종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전에 이장림 목사를 중심으로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면서 얼마나 재림을 열망했습니까? 직장도 포기하고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매일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그날이 다 되었을 때에는 모두 금식하고 흰옷을 해 입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대망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한다고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 참여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전혀 상관이 없이 살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날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은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이 그 성령을 통해 주시는 새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이 땅에서 성령을 통해 거듭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만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생명은 사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어도, 장차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생명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게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있다고 해도 네가 이 땅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생명을 받아 가진 사람이 되어야 종말의 날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의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 주시는 성령을 통해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소유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긴박하게 행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3. 죄와 악이 가득한 이 세상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됩니까?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또 나는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중요시해오던 세상의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을 마치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 저도 예수 믿기 이전에는 노래는 잘 부르지 못해도, 당시 유행되던 유행가를 흥얼흥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후 유행가 가사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 전에는 오락을 좋아했는데 오락이 별 흥미가 없어지더라고요.
- 전에는 고교야구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고고야구에 흥미를 잃게 되더라고요.
심지어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월드컵 경기까지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난 번 올림픽 경기가 열렸을 때 우리 교회 앞 세탁소 사장님은 밤을 지새우면서 보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올림픽에 별로 관심이 없다 라고 하자 사모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 못 듣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저는 사람들과 대화를 위해서 경기가 끝난 후에 그 결과를 신문으로 확인하였지 올림픽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만 있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폭력과 성범죄와 묻지마 살인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죄인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언제나 죄와 악가 각종 범죄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갈등, 긴장, 위기, 공포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노예들입니다. 노예는 같은 사람이면서 그 주인에게 마치 물건처럼 소유물처럼 취급을 당합니다.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 된지 벌써 오래 되었지만 오늘날도 이 세상에는 2,700만 명의 노예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대부분이 인도, 파키스탄, 네팔, 중동, 중국 등에 있고, 우리나라에도 현재 10,000-15,000명의 노예가 있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지요.
브라질에서는 12-13세 어린 여자 아이를 150 달러에 사고판다고 합니다.
그 어린 여자 아이를 사서 매춘을 시키는데, 하루 최고 14번까지 매춘행위를 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바로 21세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험악해도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건강이 있고 젊음이 있다면 그래도 살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다 가진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알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과 ‘무질서’ 즉 ‘아미노 현상’의 공포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윤리와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고통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을 환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런 비합리적인 세상을 끝낼 하나님 나라가 빨리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 우리는 이런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런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이 비록 의미 없는 세상이고 죄와 악으로 외곡 된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을 긍정하고 가치 있게 여기고 삽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땅의 삶을 긍정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는 이 땅의 삶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비록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지만 이런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우리들에게 이식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수여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이 땅에 살아 있을 때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을 기회도 끝이 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지금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이고 이 땅에 살아 있는 지금이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도 끝이 납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때이고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삶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이 관영한 세상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 생명이 살아 있는 이 땅에서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땅을 ‘천국의 작업장’이라고도 하였고, 또 이 땅을 ‘하늘의 자궁’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 땅의 삶이 끝남과 함께 생명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끝이 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는데 그렇게 헌신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가족을 보며 조급해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4장의 비유를 보면 이 땅은 하나님의 생명의 씨가 뿌려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뿌려진 씨는 처음에는 싹으로, 나중에는 이삭으로 또 충실한 곡식으로 자라나는데 그것도 이 땅에서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씨가 뿌려진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성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게 되는 것도 이 땅이고 그 주어진 생명이 자라나게 되는 것도 이 땅에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가 익으면 낫을 대어 추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에서 영적으로 성숙한 열매들을 추수하여 하늘 곳간에 넣을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의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는 중생을 의미합니다.
씨가 자랐다는 것은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고 성장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 때 알곡을 모아 곡간에 넣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땅에서 그 받은 생명이 열매 맺고 결실한 성도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실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신 이후에 장차 도래하는 천국에서 부활의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 사람들은 누구라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거듭나 그 마음 안에 이미 하나님이 주신 부활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그 소유하고 있는 생명이 자라서 알곡으로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5.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증거
이번에는 성경을 통해 그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증거를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3:2절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말씀은 천국이 가까이 와 있지만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2:2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21절입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으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성령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이 땅에 또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제자들의 마음속에 와 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요한계시록 11:15절 말씀에서는 하나님나라가 앞으로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 여기서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그 나라는 후 3년 반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 쏟아지고 난 후에 임하게 될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 이 땅에 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가시적인 나라로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현장에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그 마음 안에 와 있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그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골로새서 1:13절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이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 나라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우리 심령 안에 임한 영적인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올 것입니다.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예수님이 가지고 오실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대해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3절에서 이렇게 증거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어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장차 주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시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이 땅에 우리 마음 안에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로 이 땅에서 시작되어서 장차 도래하는 가시적인 나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임한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아직 임하지 않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가 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영적 전투를 하며 영적 성숙을 이루어 가면서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앞으로 임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신앙의 모델은 목사님도 아니고 교회 중직도 아니고 옆에 살고 있는 다른 성도도 아닙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통치를 받으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세의 삶이 바로 우리 신앙 신앙의 모델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존경스러워 보이는 사도 바울의 삶이 바로 우리 신앙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이 땅을 살았던 사도들의 삶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았지만 이 땅의 백성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이미 천국을 소유한 천국백성으로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제물을 버리고 세상 명예와 자랑을 버리고 오직 주와 그 나라를 위해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른 신앙이라면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신앙이라면 우리들도 이 땅에서 살 때 나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산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 있고 세상을 버릴 수 있고 주와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남은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42-44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 -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땅에서 썩을 것으로 심고 욕된 것으로 심고 약한 것으로 심고 육의 몸으로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20-22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었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무형교회로 지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록 조직교회인 참빛교회, 온서울교회, 상신교회 등에서 서로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로 보십니다. 이런 교회가 완성을 이룬 모습이 바로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예수 믿고 거듭나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된 사람들로 지어져 가고 있는 이 하나의 교회라는 이상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유형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아니고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형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무형교회의 실체를 보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을 극복하고 육신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초림으로 가져오신 영적인 하나님 나라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재림으로 가져오실 가시적이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아 그 영혼이 거듭난 영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다 될 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도 이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전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으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