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어거스틴 이전의 기독교 역사에서 칭의 교리의 소외에 관한 연구 1
박영실(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이 논문은 박영실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어거스틴 이전의 신학적 조류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 이전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나는 칭의 교리의 소외에 대하여 연구하여 제시한다.
1. 들어가는 글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필자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믿음의 조항(articulus stantis vel cadentis eccesiae)”으로 간주했던 칭의 교리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칭의 교리의 강조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들에게 있어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칭의에 대한 법정적 진술”은 기독교 근원으로의 접근로였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칭의 교리의 태동은 바울 서신들의 연구와 더불어 이루어져왔으며, 그 칭의 교리의 성격 역시 바울의 서신들의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일관성 있게 이뤄져 왔다. 그런데 역사신학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은 “바울이 교회 역사의 처음 350년 동안 교회의 사상에서 비교적 사소한 비중을 갖는 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가 존중되고 인용되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서방 신학적 시각에서 볼 때, 이신칭의에 관한 바울의 놀라운 통찰력은 이 시기에는 잊혀졌던 것 같다.” 라고 언급하였다.
사도바울 이후부터 어거스틴이 등장하는 5세기까지, 바울의 칭의 교리가 소외되어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먼저 칭의 교리를 소외시켰던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명론적 상황이었고, 또 그런 여건의 조성은 영지주의와 마니교로 기인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그런 운명론적 상황에 직면하여 그 3세기 반 동안 기독교 저술가들의 칭의교리를 포함한 구원론적 진술들을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칭의란 어거스틴 이후의 신학적 용어이다.
따라서 어거스틴 이전의 칭의론 등장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면, 칭의와 관련주제들일 수 있는 인간의 타락, 원죄, 자유의지, 은혜, 예정론 등에 관한 이해들을 포괄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운명론적 상황
바울 이후 350년 동안에 기독교 저술가들의 칭의론적 진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대적 상황은 바로 결정론적 운명론상황이었다. 이런 운명론의 부상을 야기한 것이 바로 영지주의와 마니교였던 것이다.
2.1 영지주의
3세기까지의 초대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단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연 영지주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영지주의는 기독교 이상으로 오래된 영육 이원론적 경향성을 띤 사상으로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이 사상은 1세기의 신약성경 형성에서부터 3세기까지의 기독교 사상 전개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영지주의를 간단히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잡다한 사상들이 혼재된 혼합주의(syncretism) 양상을 띠고 있고, 통일된 조직체가 없는 다양한 종파들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많은 종파들을 망라하여 영지주의라 칭함은 지식(Gnosis)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세계와 물질계의 관계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였다. 영과 정신은 선하고, 물질과 육체는 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그리고 인간을 문제가 있다는(problematic) 시각에서 인식한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인 인간의 상황을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 칭한다. 이처럼 초대교회를 괴롭힌 위험한 사상이었던 영지주의는 이레니우스(Irenaeus)나 터툴리안(Tertullian)과 같은 교부들이 남긴 논박(論駁)이나 논설(論說)을 통해서 파악되어 오다가 1945년 이집트 나그 함마디(Nag Hammad)에서 발견된 나그 함마디 자료들을 통하여 현재는 이 사상에 대하여 많은 연구들이 이뤄졌다.
이런 영지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같은 학자는 영지주의를 “기독교의 예리한 헬라화”(acut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라고 규정했지만 영지주의를 헬레니즘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편향된 것이다. 헬레니즘은 영지주의에 용해되어 있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주의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제설혼합주의를 표방하며 이를 근거로 세상과 인간 운명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했다. 영지주의에서의 세상 지배 원리와 관련하여 한스 모나스(Hans Jonas)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영지주의의 주요한 특징은 (두 개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가) 신과 세상의 관계를 지배하고, 따라서 (두 개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가)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급진적 이원론이다.”
이런 원리들에 근거하여 영지주의자들은 인간과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영과 물질 즉 선과 악이 날카롭게 대조되는 이원론적 세계 사이에서 인간 존재의 상태는 혼란과 곤란인 것이다. 이런 인간과 세상의 구조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초월한다는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결정론적 운명론의 색채를 띤다고 하겠다.
교부들은 영지주의가 무엇보다도 결정론적 운명론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신앙을 위협했기 때문에 이 사상을 반대하였다. 2세기 중반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로마에 왔다가 로마교회의 주교직에도 지원했다 실패했던 발렌티누스(Valentinus. 100∼160/180경)는 가장 뛰어난 영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세 형태로 분류하였다:
영에 속한 사람들(Pneumatics); 혼에 속한 사람들(Psychics); 육에 속한 사람들(Somatics).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세계로 복귀한다. 또한 혼에 속한 사람들도 선하게 산다면 영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육에 속한 사람들은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 영과 물질 사이의 이원적인 대조 속에서는 이처럼 영과 육의 결합체인 인간을 위한 어떤 가능성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런 영지주의가 어거스틴 이전 시대의 운명론의 상황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운명론은 개인의 범위와 능력을 초월하기에 결정론적 경향을 보인 것이다. 어거스틴 이전의 다수의 교부들이 인간의 책임이 실종되는 바로 이런 결정론적 운명론에 직면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칭의론 방향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2.2. 마니교
3세기 이후에 영지주의와 더불어, 혹은 영지주의적 강조점을 가지고 결정론적 운명론을 조장하면서 기독교 칭의론에 악영향을 미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또한 마니교이다. 실제로 마니교는 2∼3세기경에는 여러 영지주의의 분파를 흡수한 상태였고, 3세기 말엽에 마니교가 이태리와 북아프리카에서는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와 더불어 대단히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있다. 마니교(Manichaeism)는 메소포타미아 크테시폰(Ktesiphon) 출신 마니(Mani: AD c.210(?)∼276)에 의해서 창시된 종교이다. 마니는 24살 때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섭렵한 사상들을 혼합하여 마니교의 교리를 형성시켰다.
주로 조로아스터교와 고대바빌로니아 종교를 바탕으로 하고 불교, 기독교의교리뿐만 아니라 점성술까지도 포함시켜서 마니교 사상을 이뤄나갔다. 그는 조직의 천재였고 열정적으로 포교하였으며, 그의 종교 의식은 밀의의 종교 의식들로 여겨졌지만 이후 상당한 양의 마니교 자료들이 발견되어 쾰른 마니코덱스(Kölner Mani-Kodex)로 편집되었다.
마니교는 영지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또한 마니교의 우주관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세계는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 간의 투쟁이다. 이런 세상 구조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운명은 개개인의 선택 경계를 넘어서서 결정론적이고 운명론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런 이원론적 특징은 마니교의 주요한 저작인 『피흐리스트(Fihrist)』에 잘 진술되어 있다.
마니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두 개의 실체가 세계의 시작을 형성하는 데, 하나는 빛이며 나머지 하나는 어두움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빛은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이며, 어떤 수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으며, 신 자신이며, 빛의 낙원의 왕이다… 나머지 하나는 어두움 속에 있다… 마니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빛이란 실재는 양자를 구분해 주는 벽이 없이 바로 어두움이란 실재와 닿아 있다. 빛은 그 가장 아랫면에서 어두움과 접촉하지만, 그 위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는 무한하다. 그래서 어두움도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 왼쪽으로는 끝이 없다.
물론 마니 자신이 그런 이원론은 창안한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종교적 의도에 맞게 각색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제설혼합주의 형태인 마니교와 기독교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까? 마니교에서 예수는 전적으로 유대인의 악마적 메시야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가현설적(docetic)으로 해석된다. 마니 자신이 지식의 메신저로서, 최후 최고 선지자로 내세워진다. 그는 바로 빛의 대사이며, 보혜사인 것이다. 마니교 우주론은 고대 바빌로니아 원천에서 파생된 영지주의이고 마니교의 구원론, 즉 구원의 계획도 영지주의적이다. 마니의 가르침에는 또한 점성술도 포함되어 있다. 점성술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마니교의 운명론적 경향을 반증하는 것이다. 마니교는 비인격적이고 결정론적인 운명론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4세기 후반에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들어가서 그의 나이 19∼27세까지 청문자의 신분으로 지냈다. 한 천재의 지식적 황금기인 이 시기를 무엇이 그토록 9년이나 그곳에 억류할 수 있었는가? 마니교의 결정론적 운명론은 어거스틴의 죄책감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대립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실제로 어거스틴은 그 마니교에서 죄책감은 느낄 필요없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후에 마니교에서 벗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니교 이슈가 그의 생애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니교 논쟁”에 관여하는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결정론적 운명론인 마니교야말로 허구이자 기만이라고 매도하였다. 요약하자면, 3세기 후반부터 영지주의의 색채를 띤 마니교가 그 이전의 시대에 영지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결정론적 운명론을 조장하였다. 이런 숙명론적 분위기에서 그 시대 교회 저술가들은 인간의 자율성 특히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칭의론의 강조점에 크게 배치됨은 물론이다.
3. 어거스틴 이전의 신학적 조류
본란에서는 어거스틴 이전의 기독교의 저술가들을 사도적 교부들, 변증가들, 헬라교부들, 그리고 라틴 교부들로 나누어 그들 각각의 주장에서 칭의론이 어떻게 진술되는 지를 살펴볼 것이다. 1∼5세기는 고대사상 형성기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신학적 진술들이 명쾌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서로 부조화스럽게 언급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또한 칭의란 후대에 등장하는 신학적 용어란 점을 감안하여 칭의의 관련주제들일 수 있는 인간의 타락, 원죄, 자유의지, 은혜, 예정론 등에 관한 이해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1. 사도적 교부들(The Apostolic Fathers)
사도적 교부들은 그 호칭적으로는 사도들을 직접 알았거나 그들로부터 직접 배웠던 사람들을 일컫고, 대략적 1세기 말에서 2세기 중반에 활동하였던 교회의 지도자들을 지칭한다. 하지만 불란서인 장 코텔리(Jean Cotelier)가 1672년에 출간된 그의 책에서 기술한 대로 그것은 이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기독교 저술들까지도 포괄하여 사용된다.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으며 신약성경의 외경(Apocrypha)이나 위경(Pseudepigrapha)들의 등장함으로 기독교 신학의 변질이 우려되던 시대였다.
사도교부들이 인간의 죄인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겠지만, 인간의 죄인의 상태와 구원의 근거를 분석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사도적 교부들의 저술들 중에서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에 의해서 저술된 것으로서 일부 교회에서는 정경에 포함시킬 정도로 권위 있었던 『클레멘트 1서』 가 대표적으로 고려할만하다. 이서신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을 무렵인 9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약성서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클레멘트 1서』의 저술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클레멘트는 필경 로마에서 이 서신을 작성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순례자 신분을 강조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보냈는데,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서 겪었던 (고전 1: 12 이하) 바로 그 질서의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이 분열에 대해서 로마의 클레멘트는 주로 구약의 말씀으로 권면하는 데 그 논조가 바울의 그것과는 다르다. 바울은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다면 로마의 클레멘트는 헬레니즘적이나 스토아적 분위기에 젖어서 도덕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윤리적 권고에 집착한다. 또한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주도한 자들을 선택된 엘리트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비밀스런 지식인 영지(gnosis)를 자랑하는 자들로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로마의 클레멘트가 영지주의자들로 인한 악영향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클레멘트 1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익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바나바의 서신』(Epistle of Barnabas)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의 논의를 담고 있다. 이 서신과 관련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기원설이 가장 유력하고, 또한 알렉산드리아적 풍유법에 대한 강조가 특색이 있다. 역시 익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12사도에 의한 이방인들에 대한 주의 교훈』(The Teaching of the Lord to the Gentiles by the Twelve Apostles) 혹은 『디다케』(Didache)는 교회의 요리문답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데, 이집트나 시리아에서 작성되어졌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작성 시기에 대해서는 70∼90년이라는 매우 고대 시기가 고려되어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디다케』에서 『바나바의 서신』의 내용이 분명히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서 『디다케』는 분명히 『바나바의 서신』의 생성 이후에 기록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디다케』는 유대교적 경향인 도덕적 교훈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바나바의 서신』과 『디다케』에서 공통적으로 기독교적 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길”에 대한 설명이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 두 문헌에서는 전반적으로 도덕주의적 경향이 감지된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클레멘트 1서』, 『디다케』, 『바나바의 서신』과 같은 속사도 교부들의 문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구속의 가치를 은혜의 관점에서 충분히 다루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은혜의 관점에서 조명되는 것이 바로 바울의 칭의론의 핵심이라면, 그런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3.2. 변증가(The Apologists)
2세기 중반부터 박해의 주원인인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자 했던 기독교 저술가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저술가들을 기독교 변증가들이라 부른다. 변증가들에게 이르러서 인간의 이해가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대체로 이들은 일치하여 자유의지를 옹호했다.
2세기에 변증의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의 변증가는 단연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대략 100∼165년)이라 할 수 있다. 회심 이후 저스틴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왜곡된 시각에 반(反)하여 기독교를 위대한 철학으로 제시한다.
그는 자유의지를 변호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이나 거부의 방식으로 선택하여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인간의 자유의지의 변호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2세기의 운명론에 대한 전형적인 이교도적 반박의 경향성을 지닌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도 있다. 그는 스토아적 운명 이해에 반대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각자는 자기 잘못으로 죄를 범했다”고 한다.
저스틴은 플라톤과 그리스도교의 예언 관계를 언급할 때 기본적으로 양자의 사상은 상통(相通) 한다는 전제를 한다. 하지만 양자의 선후를 가린다면, 플라톤이 그리스도인의 예언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 이유는 예언이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서 발원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상에서 보건데, 저스틴에서는 분명 헬라 철학적 이해가 보이면서도 교회의 전통에 기초한 교회 신학자로서의 면모 또한 돋보인다고 하겠다.
이레니우스(Irenaeus. 약 130∼200)는 목회자로서 그의 시대의 교회에 큰 악영향을 미쳤던 영지주의자들과 논쟁할 수 밖에 없었다. 현존하는 그의 중요한 저서인 『이단논박』(Adversus omnes Haereses)의 1∼2권에서 그는 여러 영지주의들의 교리를 설명하고 그들의 결정론적 운명론의 모순을 논박하고자 한다. 이레니우스 구원론의 요체가 되는 총괄갱신(recapitulatio)은 총괄(總括)하여 갱신(更新)한다는 것이다. 그는 “총괄”의 의미와 관련하여 바울의 본문인 에베소서 1:10을 언급하고, 갱신과 관련해서는 창세기 1:26을 지적한다.
특별히 창세기 1:26에 언급된 “형상(image)”의 의미와 관련지어 아담이 이성과 의지의 자유(free-will)을 갖춘 존재였음을 강조한다. 요약하자면,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의 결정론적 운명론을 논박하면서 최초로 인간의 죄론과 의지의 자유 양 측면을 균형있게 강조하고자 했던 교회의 신학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3 헬라교부(Hellenistic Fathers)
4∼5세기 이르러는 헬라교부들을 중심으로 인간의 이해가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의 관점에서 활발하게 조명되었다. 인간의 현재적 상태에 관하여 헬라교부들은 대체로 헬라인들의 기질에서 비롯된 낙관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4세기에는 영지주의적 경향이 수용된 마니교가 유행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헬라교부들의 그런 경향은 마니교의 결정론적 운명론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헬라교부들은 성서적이기보다는 철학적 기반에 근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그들은 플라톤과 필로의 전통에 서서 그 시대의 운명론에 대항하고자 했던 것이다.
헬라교부들에게서는 죄와 관련된 아담과의 연대 교리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헬라 교부들로는 먼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을 거론해야 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신학과 철학은 상통한다고 전제를 가졌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상태에서 창조되었지만 단계적으로 향상되어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됨으로 창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그의 사상에서는 사실상 원죄를 위한 여지는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자들의 결정론적인 오류를 의식한 나머지, 각자의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클레멘트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을 완성시켰다는 오리겐(Origen. 185?∼253?년)은 “영혼 선재설(the theory of the pre-existence of souls)”을 가르쳤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나 영혼이나 귀신을 막론하고 일정수의 이성적인 존재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들의 본질은 같았고, 단지 다른 자유의지를 받았을 뿐이라 한다. 여기에서 오리겐은 영지주의자들의 결정론을 의식하여 분명히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여 그 모든 이성적인 존재들은 하나님께 순종 혹은 불순종여부는 선택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존재들의 결론적인 선택은 불순종이었다. 오리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본성은 이전의 죄로 말미암은 죄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초월적인 세계에서의 각자의 잘못된 선택에서 기인된 것이지 아담의 불순종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라면 결과적으로 오리겐은 기독교의 원죄 교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오리겐의 설명은 클레멘트의 그것보다도 더 자유분방해 보인다. 그래도 클레멘트에게는 역사적 실체였던 창세기의 기사가 오리겐에게서는 설화로 변질되는 양상을 빚기 때문이다. 대체로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에게서는 희랍 사상의 특징적인 낙관적인 색채가 분명히 드러난다. 4세기 헬라 신학계의 경향은 죄는 인간의 자유의지 오용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의 이해는 바울의 칭의론적 이해와는 크게 차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세기에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논쟁은 단연 아리우스 논쟁일 것이다. 그 논쟁과 관련하여 니케아 신학의 챔피언이랄 수 있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3?∼373년)의 현주제와 관련된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아타나시우스의 인간이해는 성경적 기사에 분명히 기초하면서도 플라톤 철학적 경향성이 온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결과 스스로 부패하게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그의 자유의지에 관한 견해는 약간 다른 톤을 유지한다. 처음 인간의 창조 시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분명히 선과 악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의 전적인 파괴를 주장하지 않는다.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사상이 그를 계승하여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에서의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삼위일체적 진술에 관한 신학적 작업을 완수했다는 카파도키아 교부들(The Cappadocian Fathers)에게 영향을 미친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기아 교부들 사이에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예상과는 달리 얼마의 차이점이 노출된다. 이들의 공통적 관심사는 성자의 신성에 관한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들의 신성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해결해 보려고 하는 반면에,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굳이 그 주제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고찰할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파도키아 신학자들 역시 알레고리를 도입하여 창세기 기사의 해석이 가능케 하고자 한다. 그들은 아담의 에덴에서의 삶을 자유의지가 부여된 완전한 생존으로 묘사한다.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이처럼 공통적으로 의지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을 보면 그들 또한 결정론적 운명론의 상황을 의식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하겠다.
안디옥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역사적, 문자적 해석에 근거함으로 쉽게 영해로 가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년)으로 알려진 안디옥의 존은 과연 안디옥의 신학자답게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의 구절의 문자적 의미를 탐구한다. 창세기 1장 26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아담의 통치권을 의미하고, 또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표현에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 반복된 것은 사실상 인간이 노력한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첫 사람 아담은 의지의 남용 때문에 타락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악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마니교적 오류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담의 범죄의 죄책이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상에 대해 헬라교부들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헬라교부들은 자유의지를 옹호했고 모든 인간의 죄의 뿌리는 바로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었다, 이들 헬라 교부들은 후대의 정통신학 원죄의 교리를 그대로 강조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된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크리소스톰 모두 신생아는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헬라교부들에게서는 바울의 칭의론의 핵심인 아담의 죄의 유전을 명시한 구절을 찾기가 쉽지 않다. 헬라 교부들의 공통적인 사상은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헬라교부들의 이해는 바울의 칭의론적 강조점과는 근본적으로 차별된다고 할 수 있다.
3.4 라틴교부(Latin Father)
서방에서는 특별히 펠라기안 논쟁을 거치면서 비관적인 인간의 이해가 더욱 고착화되었다.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일 수 있는 인간의 원죄와 부패에 관한 주장은 라틴 교부들에게서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 구원이라는 주제는 3세기에 이르러 동서방 교회 간에 분명한 간극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방신학의 선구자 터툴리안(Tertullian. 155?∼240?년)은 비관적인 인간타락에 대한 이해를 표명하였다. 먼저 동방교부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자유의지에 관한 그의 견해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그는 마르시온(Marcion of Sinope. 85?∼160?년)에 반대하여 분명하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변호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피조되었다. 바로 그런 실존적 조건의 인간에서만이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다. 터툴리안의 시대에 분명히 영지주의적 경향을 보인 말시온주의가 만연되었고, 또 그 말시온주의는 결정론적 운명론을 조장했을터이니, 터툴리안이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이해가 된다. 서방에서는 터툴리안의 등장과 더불어 처음으로 구원론이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서방 신학에서의 구원론의 출발점은 바로 죄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은 왜 선보다 악을 행하는가? 터툴리안은 바로 원죄의 교리를 가지고 인간의 이 경향성을 설명해 가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세상을 타락시킨 자인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부추긴다. 그런 인간은 이제 죽을 운명이 되었고, 또 그 인간은 그런 자신의 유산으로 온 인류에게 부패와 저주를 심게 되었다. 하지만 터툴리안의 원죄교리에는 아담과의 연대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아직 불충분 교리였다. 거기에서는 그런 결핍성이 어린 아이에게는 현실태라기 보다는 가능태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인류의 아담과의 연대성이 이후에는 동방보다 서방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년)의 아담과의 연대성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 아담은 우리 모두 안에 있었고, 그 첫 사람 아담의 죄의 본성적 유산이 우리 모두에게 전가되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모든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라틴 교부들의 죄의 연대성(solidarity) 이해도 아직 충분치 않았다. 일반적으로 라틴 교부들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것은 그의 죄과 자체가 아니라 죄의 경향성이라고 믿었다. 앞에서 나온 암브로시우스가 그렇게 생각했고, 최초 바울 서신들의 주석가로 간주되는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의 설명이 그런 것이었다. 양자는 최후에 심판받는 것은 아담의 죄과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그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들 모두 최후 심판시에 처벌받는 것은 아담의 죄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죄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서방에서의 공로신학 부상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터툴리안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채무는 각자의 것은 각자에게 준다(reddens unicuique quod suum est)는 고전적인 틀 안에서 인간의 선행으로 충족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도덕주의가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리베룸 아비트리움(liberum arbitrium. 자유의지)을 비롯된 여러 라틴어 신학용어들의 서방에서의 정착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터툴리안은 공로신학의 핵심 용어일 수 있는 “공로(meritum)”나 “만족(satisfactio)” 같은 용어를 사용한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암브로시에스터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공로를 쌓을 수 있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대로 터툴리안의 공로신학적인 견해에 근접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요약하자면 라틴 신학에 등장하는 원죄의 개념과 아담과 연대성의 이론은 바울의 칭의론의 핵심 개념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이런 개념들이 충분히 발전되지 못하였다. 일테면 아담과의 연대성의 이론은 죄의 경향성은 유전되지만 아담의 죄과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은 바울의 칭의론적 강조점과는 아직 괴리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선행이나 공로, 자유의지의 강조들은 바울의 칭의론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헬라교부의 구원론적 이해가 바울적으로 수정이 되기 위해서는 신학적 천재라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을 기다려야 했다.
4.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4세기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죄과 은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흐름들이 있었다. 이 두 견해와의 사이의 충돌이 5세기에 펠라기안 논쟁(Pelagian Controversy)으로 비화되었다. “당신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라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년)의 기도는 펠라기안들을 자극했다.
펠라기안 논쟁의 핵심에는 원죄에 관한 교리가 있다. 펠라기안들은 전통적인 원죄를 부인한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범죄는 오로지 아담 자신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경우에서 보여 지듯이 이 세상에는 죄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왔다고 저들은 주장하였다. 이런 견해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매우 낙관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 반하여 어거스틴은 전통적인 원죄 교리를 수용한다. 사실 어거스틴 이전에도 라틴 신학에서는 원죄 교리가 라틴 신학의 뿌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심플리키아누스에 대한 질문』(Quaestiones ad Simplicianum. 396-7)에서 펠라기안들을 반박하면서 아담의 죄는 그 후손에게 전해져서 인류는 “정죄받은 덩어리(massa damnata)”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의 초기 주해자로 인식되는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가 로마서 5장 12절: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라는 구절을 오독한 결과 사도바울의 언급 “그 안을” “아담 안에서”라고 해석한 것을 그는 아담의 대표원리의 근거로 받아들인다. 이후 어거스틴의 원죄 교리는 히포의 주교로서 이른바 3대 논쟁들,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 논쟁을 해 가면서 자신의 죄론과 은총론을 더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펠라기안 논쟁의 또 하나의 주요 쟁점은 자유의지의 교리이다. 근엄한 영국수도사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년) 역시 384년부터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 매우 낙관적인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면서 인간 본성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매우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펠라기우스, 켈레스티우스(Caelestius), 그리고 에클라눔 줄리안(Julian of Eclanum)으로 이어지는 펠라기안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조건으로 옹호하고자 했다. 펠라기안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이 복음처럼 소중했고 사실상 행위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가장 유능한 펠라기안이었던 줄리안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만으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펠라기우스의 『의지의 자유 변증』(Defense of the Freedom of the Will)에 잘 나타나 있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양방향 즉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그 방향은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 의지의 향방에 따라 다양하게 산출될 수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사실 우리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의지를 죄짓는 고착화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은혜에 의해서 자연이 고쳐질 수 있다고 본다.” 오로지 인간에게는 은혜만이 선행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는 인간의 것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주장이 분명하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 인간의 의지가 죄짓는 데 편향되어 있다는 그의 설명은 매우 바울적인 이해인 것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원죄와 그 원죄의 유전, 아담과의 대표성 강조 등을 다 포함시켜서 사실상 자신의 칭의론을 바울의 그것과 일치시키게 되는 시점은 그가 펠라기안 논쟁을 거치고 난 이후였다. 죄와 은혜라는 바울의 칭의적 도식이 교회의 역사에서 특히 서방 교회의 역사에서 원래의 충분한 형태로 복원된 것을 은총의 교사 어거스틴에 이르러서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어거스틴이 자신의 15권에 이르는 펠라기안 논박 작품들 여러 곳에서 바울의 서신들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데서도 확인된다고 하겠다.
요약하자면, 어거스틴의 신학적 전제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펠라기안들은 사실상 인간의 자력 행위 구원을 지지하면서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을 극소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에게는 그것은 분명히 그들의 치명적인 오류였던 것이다.
5. 나가는 말
본 연구의 논제인 “어거스틴 이전 시대에서의 칭의론의 소외에 관한 연구”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가온다는 시사성을 고려해서 정한 것이다.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업의 출구는 일반적으로 바울의 칭의론적 설교에서 찾았고, 또한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정경되게 하는 기준(Principium Canonicitatis)”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바울 이후 3세기 반 동안 즉 어거스틴 등장까지는 바울의 칭의론이 소외되었던 점에 주목하여 그 역사적 사실을 비판적으로 고찰해 본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의 결과를 정리해 보면서 본 논문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첫째로, 개신교 구원론의 갱신은 칭의론의 회복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루터 자신이 칭의를 교회의 존폐를 결정하는 믿음의 조항으로 여겼던 데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 칭의론의 원전은 사도바울의 통찰력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루터 자신의 칭의 체험이 보여주듯이, 칭의론의 태동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같은 바울의 목회 서신서 연구와 더불어 이뤄졌으며 그 칭의론의 성격도 바울의 목회 서신서의 연구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규정되어 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셋째, 바울 이후 어거스틴에게 이르기까지 3세기 반 동안은 바울의 통찰력이 소외되어 온 것은 사실이었다. “이것은 어거스틴 이전의 신학적 조류”를 고찰해 보면서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적 교부들, 변증가들, 그리고 헬라교부들에게서는 윤리적 권고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라틴 교부들에게 오면 원죄의 교리가 언급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도 바울의 칭의적 개념들이 온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넷째, 바울의 통찰력의 소외는 결정론적 운명론의 부상 때문이었다. 이런 운명론을 조장했던 영지주의와 그 영지적 성격이 두드러진 마니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학 사상의 형성기인 1∼3세기에 아직 어린 교회를 가장 괴롭히는 세력이 바로 영지주의요, 유사 영지주의인 마니교였던 것이다.
다섯째, 이런 운명론적 현상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영지주의의 경향성에서 기인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어떤 단일 사상이라기보다는 잡다한 사상들이 혼재된 것이다. 그것은 혼합주의 양상을 띠고 다양한 분파로 나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던 것이다. 영지주의 사상의 이런 경향성은 3세기 중반 이후로는 역시 영지주의적 속성을 지닌 마니교에 의해서 이어졌던 것이다.
여섯째, 이런 바울의 칭의적 통찰은 신학적 천재 어거스틴에 이르러서야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인간에 대한 펠라기안들의 낙관적 견해에 반(反)하여 비관적 견해를 주장한 것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언급된 바울의 칭의론은 역사신학에서 350년 동안 소외되었다가 어거스틴에게서 회복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본 연구를 통하여 지금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인가? 한국 교회의 침체 분위기 속에서 윤리성을 회복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놓치지 말아야할 본질은 윤리적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이다. 인간의 회복, 교회의 회복, 사회의 회복은 인간의 의로서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바로 고대교회가 그 시대적 상황이었던 결정론적 운명론이 무서워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 복음의 본질을 흐려놓았었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인인 인간 행위의 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의(롬 1:17)에 기초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구원론의 갱신을 명분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한국교회, 그 어느 때보다 침체되어 있는 한국교회가 지금 들어야 할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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