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구원 파 이단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2. 28. 12:26

 

 

구원 파 이단

요한복음 15:1-6

 

지난 23일은 이단 경계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들에서는 지금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단들을 연구 조사하여서 성도들이 이단의 심각성을 알고 경계할 수 있도록 이단에 대한 설교를 동시에 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이단에 대한 설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명절을 앞에 두고 있는 주일이라서 설교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 늦었지만 우리교회에서는 2월 넷째 주일인 오늘 구원 파 이단에 우리 시선을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1. 구원파의 특징

 

그러면 구원 파 이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성도들을 향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미혹하는 이단입니다.

이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을 받았다면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묻기 때문에 구원파라고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기성교회 교인들은 이런 질문을 받게 될 때 당황해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성 교인들은 내가 그냥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 구원 받는 줄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았다면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어오기 때문에 당황해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구원파 사람들이 묻는 이 질문을 듣고 머뭇거리면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구원받지 않았는지 잘 모르는 것을 보니 당신은 구원받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만약 당신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확실한 구원의 경험을 잊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는 구원받은 날자 뿐 아니라, 그 정확한 시간까지 기억하고 있다.’라고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는 아무리 다녀 보았자 구원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다니는 구원 파 교회로 나올 것을 권합니다. 구원 파 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구원의 문제는 구원 파 사람들이 강조해서 말하지 않더라도 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인지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구원에 대해 많이 가르치기는 하였지만, 구원 파 사람들과 같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구원파가 한국교회에 미친 장점이 있습니다.

개인의 구원문제를 이슈로 공론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때문에 교회에서도 이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성도들도 이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이 행한 긍정적인 면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 파는 심각한 교리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는 집단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2. 구원 파는 어디서 왔는가?

 

한국에는 구원 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 파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나라 구원파에 속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구원 파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유병언. 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 이요한(이복칠)의 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의 대한예수교침례회(기쁜소식선교회)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구원파가 되었을까요?

구원파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외국인 딕 욕’(Dick York)입니다.

딕 욕1960년대 초 대구에 와서 성경학교를 세우고, 기존 교회에는 구원이 없으며 죄 사함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우리와 다른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내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딕 욕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에 대한 깨달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단으로 배척받게 되었습니다.

 

딕 욕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제자 된 사람 중에 우리가 구원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다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 파 중에서 완전히 망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세월호 사건에 연류된 유병언의 기독교 복음 침례회입니다. 그 후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기쁜소식선교회의 박옥수입니다.

 

이 박옥수는 본래 장로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중퇴한 후 딕 욕을 만나서 그에게 신앙교육을 받다가 1962년 죄 사함에 대해서 처음으로 깨달게 됩니다. ‘딕 욕은 자신이 죄 사함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이 박옥수에게 개인적으로 안수하여 목사가 되게 했습니다.

 

이 박옥수는 신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의 스승이었던 딕 욕에게 목사안수를 받고 곧 바로 대구 계명대학교 앞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박옥수는 대구에서 1983년까지 단독 목회를 하다가, 1984년에 대전 변동으로 장소를 옮겨 한밭중앙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기쁜 소식 강남교회를 담임하였습니다.

 

이 박옥수는 포교활동을 위해 죄 사함의 비밀,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 대도시의 체육관을 빌려서 성경 세미나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 매년 45일의 일정으로 기쁜 소식선교회 수양관이 있는 경북 김천에서 여름수양회도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선교회의 이름으로 많은 책을 배포하며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3. 박옥수의 다른 신앙

 

그러면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는 박옥수의 잘못된 신앙은 무엇입니까?

첫째,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박옥수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라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람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라고 말씀하므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가 이렇게 확실한데도 박옥수는 성경 어디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한 말이 있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에 대한 깨달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하고 있습니다. 박옥수는 지식이 바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바로 구원이라고 했던 사람들을 영지주의자라고 합니다.

이런 영지주의자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박옥수는 20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적 지식을 가지게 되면 그 지식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지식적인 앎에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믿음이 구원을 경험하게 하고 이 구원의 경험이 지식을 가져다준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고 아는 사람들과 알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믿고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박옥소는 어떤 주장을 하고 있습니까? 알고 믿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원 파에서는 구원을 지식에 두니 그 구원이 얼마나 쉽겠습니까?

얼마나 구원이 간편합니까? 이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음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자신이 믿은 대로 순종하여 살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죄 사함에 대해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쉽습니까?

사람이 지식적으로 알게 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쉽겠습니까? 지식적으로 알게 되면 구원을 받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살아왔지만 믿음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죄 사함에 대해서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는 박옥수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신천지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이 구원파가 승승장구하며 그 세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그 만큼 많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박옥수의 잘못된 신앙은 무엇입니까?

둘째, 성경은 구원을 언제나 관계론 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박옥수는 구원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합니다.

 

기독교의 구원론

우리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종교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로 것이 이것입니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꼬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함으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이 죄는 하나의 거대한 담이 되어서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 죄의 담이 제거되지 않는 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모두가 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죄인 된 다른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죄의 담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신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되 죄가 없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속제 제물이 죽어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죄의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고, 의롭다 함을 받게 되고, 이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관계를 성경은 접붙임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무에는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지들 중에서 한 가지를 잘라내면 어떻게 됩니까?

잘라낸 가지는 아직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똑 같은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나무로부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어 결국 말라 죽습니다.

 

이 때 나무에 계속 붙어 있어서 생명을 누리는 가지와 나무에서 잘려 나와서 죽게 되는 가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 둘은 다 똑같은 나무의 가지이지만, 한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서 물과 영양을 계속 공급받고 있고, 다른 가지는 나무에서 잘려져서 더 이상 물과 영양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원 나무에서 잘려 나온 가지가 다시 생명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다시 그 잘려진 나무에 접붙임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다시 나무로부터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아서 살게 됩니다. 가지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나무의 가지의 경우와 같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분리 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인의 후손이 된 사람들이 비록 육신으로는 태어나 살아 있지만 그 영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치 나무에서 분리되어 죽은 가지처럼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미 죽은 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전에 아담의 범죄에 함께 속하여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게 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 관계의 회복이 바로 구원사건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렇게 관계론적으로 이해합니다.

 

박옥수의 구원론

그런데 박옥수는 우리와 달리 구원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합니다. 박옥수는 아담이 범죄 함으로 아담과 그 후손된 인간들에게 죄가 들어와서 모든 인류는 다 죄의 덩어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범죄한 인간을 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 그래서 원하든 원치 않든지 관계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 ‘더 이상 선을 행한 아무 가능성도 없는 죄악 덩어리,’ 또는 죄 투성이가 되었다고 하므로 죄를 존재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박옥수에게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는 죄의 덩어리가 된 인간이 죄 사함이 비밀이나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게 되면, 이 깨달음이 이전에는 죄의 덩어리였던 사람들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이후에는 죄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범죄 하기 전 아담과 같이 의인으로 그 존재를 완전히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박옥수는 죄 사함의 비밀에 대해 지식을 깨닫게 되면 그 깨닫게 된 지식이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이 깨달음이 전에는 죄의 덩어리와 같았던 죄인들을 완전한 의인으로 변화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박옥수는 구원을 우리와 같이 관계론 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처음 믿기 시작할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여러분의 존재가 완전히 바뀌었습니까? 이전에는 죄의 종으로 죄만 짓고 살았는데 예수 믿은 이후에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어서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고 있습니까?

 

박옥수의 말대로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으므로 존재가 바뀐다면,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는 다시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이것은 저를 보아도 그렇고 여러분을 보아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우리 모두 전에는 죄의 종으로 죄만 짓고 살았는데,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영의 회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 두 가지 본성이 함께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 안에서 주어진 죄악된 육신의 소욕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새롭게 창조해 주신 거룩한 소욕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순종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의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또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은 여전히 전과 같이 죄를 지으면서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두 세력의 싸움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 두 서로 다른 소욕의 갈등을 로마서 7장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바울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탄식이 언제 극복됩니까?

자신 안에 이 두 영적 세력의 갈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여서 살 때 극복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바로 로마서 7장 마지막 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누리게 될 승리의 고백을 로마서 8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니라 아멘.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는 죄의 종으로 죄만 행하면서 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성도들이 왜 죄를 짓고 범죄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우리는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지만, 전처럼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면 죄악된 육신의 열매를 맺으며 살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써 경건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면서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으며 살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바른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후에도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전과 같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우리는 구원밖에 있는 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죄를 지으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죄악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존재가 변하여서 우리가 의롭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의롭게 살 수도 있고, 죄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박옥수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관계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박옥수는 존재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박옥수의 잘못된 점이 무엇입니까?

셋째, 성경은 신자들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죄악된 옛 생활을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화를 이루어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죄를 회개하는 삶을 삽니다.

죄를 회개하고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박옥수는 죄의 덩어리이던 사람이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달음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존재가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구원받은 이후에는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성경은 구원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칭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음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해주신 것을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둘째는 성화 구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영적으로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죄 있는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죄의 성향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움 모습으로 날마다 변해 가는 과정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변해 간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영화 구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약속대로 재림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게 될 때 육체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홀연히 거룩한 영체를 입은 새로운 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되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과 같이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다시 설명해 보면, 우리는 칭의를 통해 과거에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화를 통해 오늘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영화를 통해 미래에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어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박옥수는 구원을 어떻게 봅니까?

그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은 그 깨닫는 순간 완전히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때 박옥수가 말하는 구원은 존재론적입니다.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에 그 존재가 완전히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죄인이었고 죄의 덩어리였으나,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닫게 된 후에는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존재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박옥수의 말대로 이렇게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로 변화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죄인들처럼 죄를 회개할 필요가 있을까요? 박옥수는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죄와는 무관하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완전한 의인으로 존재가 변했는데 왜 죄인처럼 회개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파에 속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의 은혜로 더 나은 믿음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완전한 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파 사람들은 구원 받은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또 박옥수의 잘못된 점이 무엇입니까?

넷째, 성경은 언제나 믿음과 삶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데, 구원 파에서는 구원받은 후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것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서신 서들을 보면 앞부분에서는 언제나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라고 하는 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뒷부분에서는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서신에는 사도바울의 간증이 세 번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한 질문도 이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믿음에 대한 질문인데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믿는 자의 삶에 대한 질문인데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하리리까?’라고 물었습니다. 우리 신앙이 바른 신앙이 되려고 하면 우리도 이 두 가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박옥수는 예수를 믿으면 그 존재가 완전히 변하기 때문에 이제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은 의로운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변화되려는 노력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것도 큰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구원 파에서는 이혼율이 아주 높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구원 파에서는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달음이 곧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켜 준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달리 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한 남편이나 아내를 볼 때 그 남편과 아내는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 곧 죄의 덩어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에도 영향을 미쳐서 사람사이의 깨어진 관계도 다시 회복되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그 남편이 또는 그 아내가 비록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 아내의 경건한 행실을 보고 혹은 믿는 남편의 사랑의 행실을 보고 그 아내나 그 남편이 변하여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그 아내 혹은 남편을 가정을 구원하라고 하나님께서 파송한 선교사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구원파의 다른 점입니다.

 

박옥수와 같지는 않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꾸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고, 불화를 조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져서 요즘 교회들마다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그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 또한 화목의 직분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까? 이어지는 18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또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자 된 우리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갈등과 분쟁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자신들은 하나님을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하지만 성경은 그런 일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정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고, 이 사회에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일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주신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공의의 직분이 아닙니다.

선악과 행위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직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태우는 초가 되어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는 직분입니다. 내가 녹고 죽으므로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는 직분입니다. 나를 희생하면서 이루어가는 화목의 직분이 바로 우리가 받은 직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구원을 관계론 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사람들은 반드시 사람사이에서도 화목을 이루는 직분을 부여 받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 구원을 위해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옥수는 구원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함에 따라, 구원받은 자신과 구원받지 못한 가족은 존재가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과는 더 이상 살수 없다고 하면서 이혼하는 가정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4. 박옥수의 잘못된 점

 

정리합니다. 그러면 구원 파 박옥수의 잘못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박옥수는 믿음에 신앙의 기초를 두지 않고 지식에 그 신앙이 기초를 두고 있는 점입니다.

둘째, 박옥수는 하나님의 구원을 관계론 적으로 보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셋째, 박옥수는 구원을 존재론 적으로 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존재가 거룩한 사람으로 완전히 변했기 때문에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박옥수는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은 존재가 변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율법폐기론 자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이상의 이유로 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인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등등에서는 박옥수의 구원 파를 사이비기독교, 혹은 기독교의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5. 구원 파 박옥수를 극복하기 어려운 점

 

그런데 이런 박옥수의 구원 파를 교회가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지식에 신앙을 두는 것의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신앙을 두지 않고 지식에 신앙을 두면 우리는 더 이상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됩니다. 죄를 아파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목말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믿는 성도로서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감도 없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죄 용서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해 고민하고 안타까워합니까? 그런데 구원 파는 단지 지식적으로 죄 사함에 대해 깨닫기만 하면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니 얼마나 매력적인 말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기쁜소식선교회라고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지식에 신앙을 두면 죄 사함을 깨달은 어떤 날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날짜도 확실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시간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힘들여서 말씀보고, 기도하고, 경건에 힘쓰는 신앙생활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 사함을 깨달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이 깨달음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이 의인으로 존재를 변화를 가져다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박옥수가 살아가고 있는 그 생활이 경건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이단의 모습은 그 하고 있는 행위만 봐도 이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이단들은 첫째 그 신앙이 아주 잘못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그 생활이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주들은 다 자신의 카리스마를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이단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표시가 확 납니다.

 

그러나 박옥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그 생활이 아주 검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그 추종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성교회 영성 있다는 목사님을 보라. 얼마나 월급이 많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느냐? 그 타고 다니는 차를 보라. 그 살고 있는 집을 보라. 그들은 말로는 영성, 거듭남에 대해 말하지만 그들의 실제 생활은 이 세상을 목적 삶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냐?’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박옥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변화된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존교회 목사님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지 못해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박옥수는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닫고 그 존재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교회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구원받지 못했는데, 성도들에게 무슨 구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셋째, 접근 방법이 실용적이라는 것입니다.

구원파는 청소년 영어 캠프를 통해 사람들에게 접근합니다. 해외봉사활동을 통해 접근합니다. 모범이 되는 학생들에게는 사회 덕망 있는 상을 수여하게 함으로 호감을 사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이들이 하는 활동은 다양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들이 교회들에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었을 때 존재가 변화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신분이 변화 되었다고 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신분이 변한 우리들은 아직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 죄를 지으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을 통해 영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거룩한 열매를 맺으면서 살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지금은 말세지말 입니다. 때가 악한 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우리는 늘 깨어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에도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한 주간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아들로 신분이 변화된 사람처럼, 성령으로 도우심을 받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