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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어가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8. 4. 08:31

 

 

일어나 걸어가라

<요한복음 51-9(19)>

 

 

1. 들어가는 말

 

사람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집니다.

둘째는 부부의 만남입니다. 부부의 만남은 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거의 대부분의 생활을 함께할 인생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부인이나 남편을 잘못 만나서 평생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 사람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혹 부모를 잘못 만났거나 부부가 서로 잘못 만났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남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부모나 부부는 잘 만났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모두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록 현재 여러가지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어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박효진 장로의 신앙간증 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인생이 변화된 이호성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천성이 착하고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악한 영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 악령에게 3일간 괴롭힘을 당한 후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악령의 지시를 따라 자신의 부모와 형과 형수와 조카 이렇게 다섯 식구를 죽이고 암매장 했습니다. 정상적인 한 사람이 악한 영을 만나게 되자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악령에 사로잡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악령에 사로잡혀 있던 그가 서울 구치소에서 박효진 장로의 전도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살인자였던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자신의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살인자의 신분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 심령 속에는 늘 예수님을 모시고 천국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법은 그를 용서하지 않고 사형수로 심판하였지만 그는 예수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살인자에서 천국 백성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5장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게 될 사람도 38년간 질병을 앓으며 절망적인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1절을 보면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다고 합니까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명절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다들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모든 성년 남자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요즘 같이 도로가 발달되고 교통수단이 다양해진 시대에도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네 다섯 시간이면 갈 거리를 20시간 넘게 도로에서 지체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더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로 통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같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 지방을 통과하는 한 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통수단도 걸어가거나 나귀나 마차를 타는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명절마다 이 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 행렬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순례 행렬의 모습은 우리가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 거리도 멀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여러 날을 가족과 함께 걸어가야 하는 힘든 길이었습니다.

 

군인들은 100키로나 60키로 행군을 합니다.

이 때 대대단위로 행군을 하는데 한 대대의 인원은 약 500명 정도 됩니다. 이 인원이 행군을 위해 부대 정문을 나서는 데만 1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행군을 마치고 돌아올 때 정문을 통과하는 시간은 30분 이상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행군 대열이 길게 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절에 참여하는 유대인들은 군인들 같이 젊거나 훈련 받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가친척이 함께 모여 가는 순례객들이었습니다. 명절에는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동시에 예루살렘으로 향해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행렬이 얼마나 혼잡했으면 예수님의 부모들은 예수님이 12살 때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하루 길을 간 후에 알았겠습니까. 유대인의 명절에는 이렇게 민족의 대 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 성년 남자는 1년에 세 차례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되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인구는 약 5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명절이 되면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작은 성곽도시인 예루살렘에 이렇게 많은 인구가 모이게 되면 사람의 홍수를 이루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모였기에 예루살렘에서는 숙박할 방을 얻기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인근 지역으로 가서 숙박하거나 인근 야산에서 숙박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숙소를 구하지 못하여서 습관을 쫒아 자주 가시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 곳은 감람산이었습니다. 종종 명절에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며 쉬기도 하셨습니다.

 

 

2. 잃은 양을 찾아가신 예수님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셨지만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사건이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성전을 방문하셨습니다. 이 때는 우리가 잘 알듯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짐승들을 내어 쫒으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기록이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이 때는 성전이 아닌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수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 성전으로 가시지 않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성전제사에 참여할 필요가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은 거룩하시고 무죄하신 분이셨기에 자신을 위하여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 없어서 일까요?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비유가 생각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 비유입니다. (15:1-7)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함께 먹는 사람 중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떡을 먹는 자는 복된 자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을 청하였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일치하게 사양하여 나는 밭을 샀으니 못가겠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못가겠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못가겠다. 하는지라 그 집 주인이 노하여 종들에게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 병신들, 소경들을 데려오라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리가 비어 있어, 주인은 길과 산울로 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했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허다한 무리가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잃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도 이 말씀을 듣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왔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은 왜 죄인들을 가까이하여 함께 음식을 먹느냐고 불평합니다.

이 불평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가족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형제의 초청으로 거지 여러명이 와서 우리 가족모임 자리에 함께 하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불편하지요. 가족 중에서 불평이 일어나겠지요. 

 

이런 바리새인들의 불평을 듣고 예수님은 이 비유를 베푸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여러분께 물어봅시다.

여러분이 양 일백 마리를 방목하고 있다가 집에 돌아가기 위해 숫자를 세어보니 아흔 아홉 마리가 있고 한 마리가 부족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흔 아홉 마리나 있으니 이것들만 데리고 집으로 가자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그 없어진 한 마리를 찾아서 일백 마리를 다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마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그 자리에 두고 없어진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함께 식사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곳에는 한 마리 잃은 양 같은 38년 된 병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시다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건강한 사람 수십만 명이 모여 제사 드리고 있는 성전으로 가시지 않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신 이유는 예수님은 병든 인간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라고 하나님에 의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으로 와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이곳에 와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처럼 우리의 고민과 문제도 해결 받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좌우 옆에 있는 사람과 서로 축복하시겠습시다. 오늘 예수님을 만납시다.

 

 

3. 베데스다 연못의 상황

 

1) 베데스다 연못가

 

베데스다 연못을 발굴한 보고서에 의하면 이 연못의 넓이는 60미터, 길이가 90미터인 쌍둥이 연못이었다고 합니다. 이 연못의 네 모퉁이에는 행각이 하나씩 있고, 나머지 하나는 두 연못 가운데 있었습니다. ‘행각은 사나운 날씨를 피할 수 있도록 기둥과 지붕만 있는 건물을 말합니다. 이 연못의 벽면에는 희미하지만 물을 휘젓는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즉 당시 의술로는 고칠 수 없었던 불치병 환자들이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 베데스다의 치유 역사

 

이들이 베데스다 연못에 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가끔 천사가 나타나 물을 휘저을 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질병에 걸려있든지 상관없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치유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베데스다 연못물이 요동치면서 막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곳을 지나가던 한 여행객이 연못물이 요동치는 것이 하도 이상하고 신기하여 호기심에 자신의 손을 그 연못에 살며시 담궈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손이 물에 닫는 순간 갑자기 온 몸에 강한 전기가 통하는 듯 하더니 그 시로 그 동안 앓고 있던 자신의 지병이 순식간에 치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이 치료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급기야 이곳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연못가에 있던 다섯 개의 행각에는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상관없이 물이 끌어오를 때 먼저 들어가는 환자는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치유 역사를 믿고 베데스다 연못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곳에 모인 병자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보았지만 해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할 수만 있으면 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물이 동할 때에 먼저 들어가려고 시선을 집중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3) 38년 된 병자

 

5절 말씀을 보면 거기에 38년간을 병으로 고생한 한 남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에는 의원에게 자신의 병을 고쳐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원은 그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점쟁이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각종 민간요법도 시도해 보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그 결과로 재산만 다 탕진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친구들이 베데스다 연못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으로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왔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겠지만 긴병에 효자 없다38년이나 된 지금은 혼자 외롭고 절망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 이 병자도 처음에는 희망을 가지고 왔다.

이 병자가 처음 이곳에 올 때는 희망을 가지고 왔습니다.

병에서 나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왔습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자비의 집이란 뜻이며,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자비의 집이란 이름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베데스다 연못에 도착해보니 이곳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2) 철저한 경쟁사회의 모습을 체험했다.

베데스다연못은 자비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과는 달리 철저한 경쟁사회였습니다.

이곳에는 자신의 질병을 고치려는 경쟁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병자 중에서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치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쟁이 지나쳐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매일매일 다툼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형편은 헤아리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었던 곳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고침을 받을 수 있었기에 치열한 경쟁이 생활이 된 곳입니다.

 

이곳의 상황을 생각하면 좁은 입시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시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또 학교를 졸업하고 좁은 취업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취업지도학원 인터뷰 학원 심지어 성형수술까지 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생각납니다. 고시촌들이 모여 있는 신림동이나 대학가의 고시촌들이 생각납니다. 고시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시촌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어디 이뿐 입니까? 우리나라가 세계화에 동참하기 위해 WTO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이후 이제 기업 환경은 무한경쟁시대가 되었습니다.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기업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한참 일할 나이인 40대인데도 경쟁에서 밀려 직장에서 명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치열한 생존 경쟁의 모습과 베데스다 연못가의 상황은 같았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이 있는 이곳에서는 젊거나 질병이 경한 사람들이 유리했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생하였고 이제 나이까지 많아진 이 병자로서는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생계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배에 참여하러 온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거나 성전에서 주는 빵으로 생계를 연명해 나갔습니다. 그러기에 빵 한 조각을 놓고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3) 자신의 노력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하였다.

이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이 고침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연못가 좋은 자리를 경쟁할 힘도 없었습니다. 나이 많고 늙고 병들어 몸도 추스르기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질병을 치료해야겠다는 기대는 있었으나 몸은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병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인내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인내하며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 병자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 못가로 가신 이유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서 모든 가능성이 다 막히고 전혀 소망이 없게 되었을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 은밀하게 하는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아멘.

 

 

4.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신 예수님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은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1)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38년 된 병자의 경우와 같이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경우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

 

먼저는 왕의 신하입니다.

그는 왕의 신하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찾아가 거의 죽게 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이렇게 겸손한 믿음을 가진 왕의 신하에게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다가, 종을 만나 아이가 산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는 아이가 낫기 시작한 시간을 물어 보았는데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시던 그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살려주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 온 집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요한복음 4).

 

다음은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보내신 분이신 줄 알았지만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명예와 사람의 이목 때문에 낮에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거듭남 위로부터 남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구약 모세시대에 있었던 불 뱀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내용은 모세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하시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쳐다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39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인류 구원을 위해 장대 위에 달린 구리 뱀처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주님을 믿었고 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 쯤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니고데모가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복음3)

 

또한 백부장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이방인이었던 한 백부장이 나아와 중병으로 괴로워하는 자기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백부장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유대인들도 아닌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그 능력의 역사를 보고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신의 하인 즉 당시로 보면 소유물 정도로 여겨졌던 하인의 괴로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자기의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백부장은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인 세계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네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시로 그 하인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아멘

 

여기 예로 들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갔던 중풍병자,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치료될 것을 믿었던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 등,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나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믿고 나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사람들과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도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네 믿음대로 될찌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때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도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찾아온 사람들

그런가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이 먼저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가신 사람들도 있습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의 경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던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계명을 어긴 죄인이 되었습니다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범죄 한 자리, 죄의 자리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더하여 너는 그 범죄 한 자리에서 나와야 된다는 뜻도 포함된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고, 지금도 남편 아닌 자와 살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유대인들이 다니기 꺼려하던 사마리아 수가 성으로 친히 가셨습니다.

 

또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육신이 썩어가는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군대 귀신들려 거라사인 지방의 무덤가에서 괴로움 속에 자신의 몸을 상해하고 있던 한 이방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들을 찾아가셨을까요?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신 사람들은 대부분은 귀신들렸거나 중한 병에 걸렸거나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잃은 양과 같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중한 질병 때문에 환경적인 제약 때문에 사람들의 편견과 관습 때문에 스스로 나아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들을 찾아가시지 않으시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3) 38년 된 병자

 

예수님이 찾아가셨던 또 한 사람인 38년 된 병자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병자는 베데스다 못가에 있으면서 가끔 물이 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먼저 들어가기 위한 사람들의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신도 누군가가 도와주면 먼저 들어가 병을 고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러나 병이 중하고 늙은 자신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이제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양문제물의 양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사람은 수많은 제물의 양들이 양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섬기던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학교를 가지 못한 사람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듯이,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의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도는 변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민이면서도 질병으로 인해 죄인 취급 받았고, 회당예배에도 성전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는 자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 받았고, 사람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으며, 이제 가족도 그를 외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양문을 통해 제물의 양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땅에,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성전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건강한 몸이 되어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드리는 기도는 마치 이방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통 가운데 예루살렘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시온에서 다시한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했던 유다인의 처절한 기도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마치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와 나실인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눈이 빠진 채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포로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게 한번만 다시 한 번만 원수갚을 기회를 주시기를 간구했던 삼손의 기도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베데스다 못가에서 처절한 부르짖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던 잃은 양 같은 한 사람 38년된 병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도하고 있던 이 사람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응답해주십니다

 

38년을 병으로 고생한 사람의 아픔을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저도 육신이 건강하지 않기에 약하고 아픈 사람의 심정을 다소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생한 사람이 느끼는 아픔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시면서 우리 인생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을 보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계실 때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어려움들을 다 알고 계신분이시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동일하게 겪으셨기 때문에 이런 고난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민이 되고 고통이 되는지 다 아십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도 남모르는 병이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아픔을 홀로 삭이고 계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자신만의 고민을 안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아픔들을 잘 알지 못합니다.

혹 알았다고 해도 도울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도움을 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베데스다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도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통하던 병자를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베데스다 못가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데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빈부귀천도 나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질병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 부족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정의 문제도, 자녀의 문제도, 생활의 문제도, 직장의 문제도, 결혼의 문제도, 사역의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해결하시지 못할 문제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문제에 개입하시기만 하면 즉시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런 사람들을 만나 주십니다.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찬양을 통해 만나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기도원에는 어떤 사람들이 옵니까?

교회에서보다 사랑을 더 많이 받아야 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사랑과 관심이 더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 필요한 우리들을 만나주시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2) 예수님의 보심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을 뿐 아니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불쌍하고 베데스다 못가에 있었던 사람들이 다 불쌍하고 다 사랑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특별히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고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21세기를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불쌍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이렇게 신년 기도회에 참석한 우리들, 하나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우리들을 더 불쌍히 여기시고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면 이 기도원에는 우리 끼리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고 보면 하나님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시고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21편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증거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내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는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찬양한곡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반주 부탁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우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저는 사내아이를 둘 키우다가 보니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자녀를 지켜보고 있는 부모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는 걸음마 하는 자녀의 모습을 보며 대견스러워하면서도 혹 넘어지지 않을까? 다치지 않을까?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이렇게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고난당할 때 나 혼자 고난당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늘 보고 계십니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보고 계십니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여러분을 상치 못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출입을 눈동자 같이 영원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3) 예수님의 아심

 

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보셨을 뿐 아니라 또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성육신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제한된 상황 속에 계셨지만 그 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신적인 통찰력과 해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 사람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은밀한 의도와 동기까지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 삭개오라 하는 세리장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는 언제나 이 여리고를 지나셨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여리고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고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세리 장이었기 사람들을 피해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있는 곳에 이르러 삭개오야 하고 부르시면서 그의 집에 하루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삭개오가 세리라고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당에도 예루살렘 성전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그 중심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앉고 일어섬도 다 아시며, 나의 생각도 다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십니다.”

 

삭개오는 자기의 은밀한 마음의 소원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토색한 일이 있으면 율법에 따라 4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삭개오를 외모로, 직업으로 평가하고 정죄하였지만 중심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의 중심을 보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삭개오의 간절한 소원을 아셨던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여러분들의 형편도 아시고, 처지도 아시고, 남모르는 나만의 고민도 아십니다. 마음의 아픔도, 영적인 갈등들도 다 아십니다.

 

요한복음 2:24-25에서는 예수께서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소원과 간구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가진 마음과 생각과 숨은 의도까지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우리가 가진 간구와 소원을 담아 두 손 높이 들고 찬양 드리겠습니다.

 

아시지요(3x) 주님. 할렐루야, 임마누엘, 믿습니다. 아멘,

 

4) 네가 낫고자 하느냐?

 

6절을 보면 이렇게 38년 된 병자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병을 낫고자 하지 않았더라면 이 베데스다 못가에 와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병으로 오래 고생하게 되면 낫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 본 사람들은 알 수 있는데 병이 오래되고 더구나 불치병일 때는 치료를 포기하고 현실을 수용하는 자세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는 물으심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첫째, 이 병자의 가장 큰 소망은 병에서 나아 건강하게 되는 것이었지만, 38년간이나 병을 치료하지 못하였고, 또 비록 육신은 베데스다 못가에 있지만, 자신이 먼저 들어가 치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이렇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 그의 근본적인 문제를 부각시켜 주셨습니다. 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질병입니다. 그런데 너무 오랜 세월 병을 앓다가 보니 이제는 병 고침 보다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된 관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의 물으심은 그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다시한번 상기시키고 부각시켜 주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문제를 부각시켜 줌을 통해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치료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어떻게 걸어가요, 38년이나 이렇게 있었는데 하고 안주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이 물음에는 암시적이지만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겠다는 뜻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물으실 때는 그냥 묻지 않으십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는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십니까? 그것은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님을 통해 소원을 주시어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이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주실 때에는 그냥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소원이 일어날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알고 믿음으로 구하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를 인도하시되 마음의 소원을 주셔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물음을 통해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38년된 병자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부각시켜 주시고,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시고, 치료해주시고자 하셨지만 38년된 병자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5) 병자의 믿음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자의 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비정한 경쟁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사람에게 치료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병 고침을 열망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가끔 물이 동하여도 그가 물에 먼저 물에 들어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병자의 말에서 우리가 또 발견하는 것은 이 사람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해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지 1년이 훨씬 넘었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 고치는 표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으며 그 명성이 높아지는 것에 비례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 또한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만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런 예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 아니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그곳에서 근자에 일어나고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병자가 38년간 자신의 모든 노력과 시도가 허망하게 된 후에 할 수 있었던 것 한 가지가 있었는데 우리가 앞에 살펴보았듯이 기도였습니다. 그는 남은 힘을 다해 과거부터 믿어왔던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시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잃은 양 같이 잃어버린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 못가로 가셨습니다. 할렐루야

 

동일하신 하나님은 바른 성도가 되고 사역자가 되고 설교자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부족을 아파하며 눈물로 탄식하는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38년 된 병자와 같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채 자기의 수고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역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 이 자리에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참석하신 분이 계십니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참석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은밀한 소원과 기도 제목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역사의 주가 되셔서 역사를 섭리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성경은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예수님은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겨울이면 잘 걸리는 감기가 걸렸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이런 작은 문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것쯤은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의사에게 가서 한 일주일 치료받으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큰 문제가 닥쳤을 때는 어떻습니까? 이것은 너무나 큰 문제라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작은 문제이든지, 큰 문제이든지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문제에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기도로 그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시지 못할 문제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가 우리 자신이 보기에는 어렵고 해결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못하시는 한 가지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은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다는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신 약속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테복음 7:7-11)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기도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구하라 줄 것이다. 찾으라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라는 이 말씀의 뜻은 기도한 것은 반드시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를 통해 악한 아버지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데 하물며 의로우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심을 통해 기도에는 확실한 응답이 있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라고 말씀합니다.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반드시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기도하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조지 물러는 평생동안 5만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나는 기도를 많이 했는데 왜 응답이 적었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의 경우는 조지 물러와 달리 기도응답이 적은 것일까요? 기도 응답의 차이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 형태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첫째, 바로 응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째, 기다리라는 응답이 있습니다. 아직 적당한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때를 다 알고 계십니다.

셋째, 응답되지 않는 것이 응답인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대로 응답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응답해주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칼을 가지고 놀겠다고 졸라댄다고 칼을 줄 부모가 없듯이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해로운 것을 구할 때 그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6) 말씀의 능력과 은혜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치유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군에 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심한 두통이어서 대인관계에 지장을 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대 후 몇 곳의 입사 시험에 합격해 놓고도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개인사업을 시작했는데 경험 없이 시작한 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간의 교회 생활 한 후에 되돌아보니 교회를 나가던 날부터 그렇게 아프던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병 치료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머리의 아픔을 고치는 것이 저의 가장 시급한 문제였지만 그것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예배에 참석한 후 저의 최대의 고민이었던 두통이 씻은 듯이 나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것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필요하다면 기도하기도 전에 주권적 의지를 따라 먼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38년 된 병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아닌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에게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을 통해 이 병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부각시켰습니다. 이 물음을 통해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시고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말씀입니다.

요단강을 마르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리고를 무너지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어거스틴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변화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 가운데 있든지 이 능력의 말씀을 믿읍시다.

이 시간 나를 향해 하시는 능력의 말씀을 들읍시다.

나의 문제를 향해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는 말씀을 들읍시다.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도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심을 믿으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5. 예수님의 역사에 대한 반응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요한복음의 표적 사건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반응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1) 유대인들의 반응

 

(1) 안식일을 범함

먼저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유대인을 봅니다.

9절을 보면 38년 된 병자가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된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병에서 놓여나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해주지는 못하고 율법적인 판단을 하여 안식일인데 네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제지하였습니다. 또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다고 예수님까지 핍박하게 됩니다.

 

(2) 신성모독 죄

17절을 보면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시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라고 하면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육신에 속하여 하나님의 일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에게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교리에 매여, 종교적 형식과 틀에 매여, 자기 기준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38년 된 병자가 나음을 입자 축하해주기는커녕 오늘은 안식일이니 그대로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병 고침 받은 병자의 감격과 기쁨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2) 구원받은 병자의 반응

 

(1) 은혜로 구원받음

38년 된 병자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병자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진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명절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버림 받은 상태였으며,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의 병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자기의 공로나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2) 하나님과 화목을 이룸

5:14절을 보면 이 사람은 구원받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불화관계에 있던 그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 무엇이라고 권하십니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죄를 범치 말라

이것은 다시 신앙에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38년의 고통 속에서 죄의 심각성을 체험하였기에 모르긴 몰라도 다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는 범죄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전도인의 삶을 살다

5:15절에서 이 병자는 이후에 죄를 짓지 않는 소극적인 신앙을 넘어, 적극적으로 전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죽이려고 서슬이 시퍼런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분은 예수라고 전합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위협적인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예수의 은혜를 전한 이 사람이, 아무 위험이 없었던 백성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증거 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6.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은 사건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명절에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셨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제사 드리고 있는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 못으로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십니다.

 

둘째, 인간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의사를 통해, 점쟁이를 통해, 민간요법을 통해 자신의 병을 고쳐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까운 세월만 보냈습니다. 그가 고침을 받은 것은 예수님을 만난 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과 육신과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참 의사십니다.

 

셋째, 예수님의 구원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문제를 아시는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심으로 문제를 부각시키시고, 기대를 가지게 한 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심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3에도 동일한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구걸하는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 하여 무언가 기대를 가지게 한 후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자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서서 걸고 뛰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의 경우도 같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먼저 38년 된 병자와 같이 여러분의 문제가 부각되어야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대가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 때 우리도 네 문제를 떨치고 일어나라 ...걸어가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넷째, 이 병자의 삶을 통해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38년 된 병자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돌리며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증거 하는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7. 나가는 말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리 잃은 양 같이 고난 가운데 있는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셔서 그 병이 벌써 오래 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면서 문제를 부각시키시고, 치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불러일으키시고,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말씀을 통해 고쳐주셨습니다.

 

이 병자에게 질병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현재적인 심판 즉 육체적 고난을 당함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다 해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증언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지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면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밖에서 당하는 고난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변하여 도리어 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당신의 고난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고쳐주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집시다.

기도로 우리의 소원과 간구를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38년 된 병자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사람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절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전후좌우 사면이 꽉 막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움을 당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혼자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너무 힘든 고난 가운데 있는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이런 소원이 마음속에 일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이런 분이 계시면 이 시간 일어서십시오. 기도해드리겠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기도해주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성령이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까?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소원이 일고 계신 분이 계시면 지금 일어서십시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통성으로 이 자리에 서 계신 분들의 문제를 위해 함께 중보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문제도 해결해 주시기를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8. 기 도 

 

예수님은 명절에 성전에서 제사 드리던 수십만 명의 사람들 보다 베데스다 못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는 스스로 죄인이며 병든 자라고 생각했던 잃은 양과 같은 38년 된 병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가 바로 죄인이며 병든 자이며 잃은 양입니다. 저희에게도 찾아오시고 이 시간 만나 주옵소서.

주님 이 시간 믿음으로 일어난 성도님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옵소서. 이분들을 얽어매고 있는 삶의 고통들을 해결해 주십시오.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해결해주옵소서. 저희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옵소서.

 

비록 우리의 믿음이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안에서 고쳐주시고 구원해주옵소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신 말씀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도 말씀하여 주옵소서.

능력의 말씀으로 죽은 우리 신앙을 회복시켜 주시고,

풍랑같이 우리를 격동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옵소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주옵소서,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주옵소서

직장의 문제를 해결해주옵소서,

질병의 문제도 해결해주옵소서,

 

그래서 이 시간 이후 저희도 고침 받은 병자와 같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삶을 살게 하옵소서.

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생명을 바쳐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자원하여 전도인의 삶을 사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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