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도 감내하는 신앙
로마서 5:3-5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고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그 만큼 우리의 삶 속에는 고난과 아픔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속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고난들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먹지 못해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질병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 학교폭력이나 왕 따 문제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공부가 얼마나 부담이 되고, 또 왕따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청소년 자살이 거의 하루에 1명꼴로 일어나고 있겠습니까?
이 뿐 아닙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평생 육체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태어날 때부터 불치병에 걸려서 평생을 중환자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우리 마음속에서는 안타까움이 일어나고 또 측은지심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다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종으로 죄 아래 팔린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가져다주는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죄가 가져다주는 고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 ‘나는 고난을 좋아한다.’ 라고 하실 분이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고난을 예찬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119:71절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개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절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언제 이 고백을 했겠습니까?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이겠습니까? 고난을 믿음으로 승리한 이후이겠습니까?
이런 고백들은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고 난 후에 한 고백들입니다. 이런 고백을 했던 사람들까지라도 고난을 당하고 있을 그 당시에는 그 아픔을 주는 고난을 피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인 욥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욥도 고난당할 그 당시에는 그 당하는 고난을 너무 괴로워하며 ‘저녁이 되면 가중되어 오는 고통 속에서 빨리 아침이 되었으면 하였고, 또 아침이 되면 그 극심한 고난을 잊고 싶어서 빨리 저녁이 되었으면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빨리 죽어서 이 고통을 끝낼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은 될 수만 있으면 고난은 피하고 싶어 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는 이유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신앙을 가지게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삶에 다가온 고난은 피하고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자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질병치유를 바라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경재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런 세상을 향해 이렇게 증거 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예수 믿고 부자 되세요. 예수 믿고 건강의 복을 누리세요. 그래서 교회 이름들도 보면 ‘부자 교회, 행복한 교회, 은혜교회, 푸른초장교회’ 등등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만한 이름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기는 신앙을 가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고난이 꼭 손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고난을 통해 얻게 되는 신앙적인 유익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고난 보다는 안락하고 평온한 삶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해 하는 것이 바로 고난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 받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을 이해하였던 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당하며 사는 고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둘째,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봅니다.
로마서 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절 말씀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할 때에 이 모든 것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고난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당하며 사는 고난까지 선을 이루어 가시는 도구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고난이 마냥 저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중에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극한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 다가와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고난을 결국 선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인류역사는 종말의 날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환난과 파멸과 심판의 날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데 왜 우리들은 소망을 가집니까? 그 환난 이후에 이루어지게 될 하늘나라를 믿고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 심판의 날은 믿음이 완성되는 날일 뿐 아니라, 우리가 믿고 기다려온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경험한 단 한 번의 고난 빼고는 별 다른 고난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힘들고 어려운 생애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많은 차이가 나 보입니다.
이삭은 어릴 때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노년에는 그 믿음이 별로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라”라는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영적인 사람인 야곱보다 육적인 사람인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은 어렸을 때 간사하고 교활하고 기회주의자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야곱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담함도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이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변했습니까? 야곱은 수많은 고난을 친히 겪으면서 그 인격이 성숙되고 숙성되어서 나중에는 세계의 주권자인 애굽 왕 바로를 축복하는 족장이 되었고 또 그 열 두 자녀들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축복해 주는 영적 거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보면서 고난이 꼭 나쁘지만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을 인격의 성숙의 기회로, 삶의 축복의 기회로 삼으려면 어떤 사람들 되어야 합니까?
시편 119:71절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개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절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을 자신의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았던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고난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닫고, 무언가를 얻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고난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고난은 말 그대로 고통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고난이 복이 되고 고난이 저주가 되는 것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웠느냐 무엇을 얻었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고난을 통해 배우고,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기에 고난까지도 복이 되는 것입니까?
셋째, 고난을 통해서만 진주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아시지요.
‘진주’는 조개의 부드러운 속살에 모래나 작은 돌 같은 이 물질이 들어가게 되면, 조개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또는 그 부드러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모래나 작은 돌에 진주액체를 보내서 감싸게 합니다. 그래서 그 딱딱한 모래나 돌이 마치 부드러운 자기 몸과 비슷하게 함으로, 몸을 보호하고 또 몸이 상처를 입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액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지고 굳어져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조개가 그 고통을 통해 값비싼 보석인 진주를 만들어내듯이, 사람도 고난을 통해 진주와 같이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많은 고난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과, 고난이라고는 전혀 받지 않고 살아온 사람을 보면, 그 살아가는 인생의 폭이 다르고 그 깊이가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 삶에 왜 고난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도 없음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후에는 반드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성화시켜 나가실 필요가 있으신 것입니다. 이를 이루시려고 우리 삶에 고난을 주시고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고난을 주십니까?
우리가 주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형상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변화시키시고, 인격을 변화시키시고, 삶을 변화시키시고, 가치관을 변화시키시고, 지식을 변화시키시고, 감정을 변화시키시고, 의지를 변화시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안에서 내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보다 지금 많이 변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고, 영적인 역사와 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로마서 5:3-5절 말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로마서 5장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고난 중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연단’은 “인격” 으로도 의역이 가능한 구절입니다.
이렇게 연단을 인격으로 의역해 보면 이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인격을 인격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무엇이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는 말씀입니까? 고난을 인내하면서 변화된 인격이 우리에게 참 소망을 준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이렇게 환난을 인내하면서 연단을 받아서 그 영성이 변하고, 그 인격이 변하고, 그 삶이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부어진다고 합니다. 이 때 성령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고난당하는 삶마저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에 대해 이런 관점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을 보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분 죽을 뻔하였으며,....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면서 바울은 주님과 주님의 복음 증거를 위해 당한 이런 고난의 삶들이 바로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표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가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결국 어떤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믿음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에 대한 바른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난을 통해 일하신다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고난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시라면, 우리는 고난에 대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이 우리가 가져야 할 고난에 대한 바람직한 신앙적인 이해이겠습니까?
참 신앙은 무엇입니까?
첫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 삶 속에 고난이 올 때 우리는 그 고난이 가져다주는 어려움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고난과 고난이 가져다주는 어려움만 보면 누구나 고난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믿음의 눈으로 고난을 보아야 하고, 또 고난의 배후에서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우리 마음속에 긍정적으로 역사하여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또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런 기대가 있는 성도들이 될 때 우리들은 고난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에는 누가 있습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서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 속에 들어가야 하는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그 뜨거운 풀무불만 바라보았다면 그 고난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난 너머에서 자신들을 도우실 수 있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들이 고백한 신앙고백의 진정한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 내 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들은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설사 자신들을 구해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 세운 신앙에게 절하지도 않고, 왕이 세운 신상을 섬기는 그런 우상숭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 아닙니까?
운동선수들이 왜 그렇게 힘들여서 고통스럽게 연습에 몰두합니까?
그 훈련의 고생과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의 금메달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힘겨운 고통도 이겨내고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왜 아침 이른 시간인 6시부터, 저녁 12시까지 고통스러운 공부에 매진합니까?
그렇게 하면 장차 반드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그래서 좋은 대학을 나오면 또 그 장래가 보장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 것입니다. / 현실만 보는 학생들은 이런 고난을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공부한 후에 얻게 되는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과 좋은 가정을 이루게 되는 열매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학생 때의 고생도 고난도 힘들어하지 않고 묵묵히 그 바라보고 있는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오늘 편하고자 아무 것도 아무 시도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바라보고 은혜의 역사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오늘 수고를 통해서 내일 얻게 될 기쁨의 열매를 수확하기 위하여 오늘 기꺼이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면 오늘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광의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 내 앞에 놓여 있는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무엇입니까?
둘째, 고난을 감내해 내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고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고난 후에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알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고난당하는 길을 자청하여 걸어가고 또 그 삶에 찾아오는 고난을 기꺼이 감내해 나가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한국교회도 이제 교회역사가 백수십년 되면서 교회를 직접 개척하는 목회자들보다 이미 있는 교회에 청빙을 받아 가는 목회자가 훨씬 더 많아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요즘 목사님들이 사역할 교회를 선택하는 것을 보면,
어떤 목회자는 부모님이 하시던 목회를 이어 받아 목회하기도 하고, 또 어떤 목회자는 내게 유리하고 목회하기 좋은 교회를 선택하기 위하여 수년 동안 이력서를 내며 수고하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목회자는 자신을 청빙하려고 하는 교회가 여럿 있는 대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어려운 교회를 선택하여 가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목회자는 그 학벌이나 경력으로 보면 큰 교회의 청빙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이 중 어떤 목사님들이 고난을 자처하고 또 고난까지라도 감내하겠다는 신앙을 가진 목사님들이겠습니까?
오늘날 개척교회를 하는 것이 왜 어렵습니까?
믿음 안에서 고난까지 감내해 나가겠다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는 고난까지 감내해 나가겠다고 하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성도들은 개척교회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고난 받아 주셨으니, 나도 주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겠다는 신앙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모든 것이 부족한 개척교회의 고난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큰 교회를 택하여 갈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교회선택의 기준을 보면 교회가 내게 줄 수 있는 혜택과 유익과 안락함을 우선적으로 따집니다. 오늘날 이 사회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려고 결단하는 성도들이나,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은 공히 고난을 자처하는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슈바이처 박사를 아시지요?
그러면 왜 사람들이 슈바이처 박사를 존경합니까? 슈바이처는 주를 위해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아프리카로 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선교사님들을 존경합니까? 그 앞에 고난의 삶이 있을 줄 뻔히 알면서도 주의 복음을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선교사로 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15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실 복음을 처음 주신 곳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류의 구세주로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실 예수님의 고난당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복음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친히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수고와 헌신의 고난의 삶을 통해 세상에 전한 것이 바로 이 복음이고, 또 우리가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복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의 성공과 영광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복주의적인 신앙을 표방하면 사람들은 구름 때처럼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신앙이 바른 신앙이고, 우리가 가진 믿음이 바른 믿음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고난을 자처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고난 받으셨듯이, 나도 주를 위해 주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겠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그 삶의 고난의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주를 위해 고난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다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자청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바울처럼 내가 개척한 교회가 부흥하고 크게 성장하게 되었어도,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교회를 개척하러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만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고 있는 교회에서도 이런 일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신앙의 시작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에서 시작하였더라도, 신앙의 완성은 고난 받으신 주님을 따라, 자신도 고난을 자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며, 하나님께서도 이런 신앙을 인정해 주시고, 또 이런 성도들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무엇입니까?
셋째, 고난의 영광을 아는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자처하는 신앙을 갖게 되면, 나중에는 고난을 자처할 뿐 아니라, 고난을 즐기는 신앙을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을 즐기는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우리는 이런 신앙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라고 고백한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바울이었기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관원들에게 붙잡혀서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그 발이 차꼬에 채워져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주를 위해 고난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을 그 육체에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가시를 그 육체에 주사, 그가 비록 육신으로는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 안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당하는 고난과 그 약한 것을 오히려 즐기고 자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난을 즐기며 살았던 진짜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고난을 즐기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그 가지고 있는 신앙이 고난이 가져다주는 영광을 아는 높은 경지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즐기는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제 깨닫게 됩니까?
그것은 내가 고난 받는 삶 속에 있을 때,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신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삶 속에서 고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고난 뿐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는 다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메시야의 고난을 완전히 이해했습니까?
모리아 산에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그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그 외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니 그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 하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경험하면서, 인류를 그 죄와 죄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독생성자 예수님을 우리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실 수밖에 없으셨던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픈 사랑, 그 마음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믿습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언제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서 ‘음란한 아내 고멜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겪은 그 아픔을 통해, 호세아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며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아픈 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지식의 신앙, 배워서 알게 되는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을 가졌습니까?
여러분은 알고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구원파 이단이라고 전에 설교했지요. 우리 신앙은 지식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우리들을 바른 믿음으로 인도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에 이를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경험은 결국 하나님과 그 모든 말씀을 믿게 하는 견고한 신앙,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것을 아는 신앙도, 하나님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주셨음을 아는 신앙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임을 아는 신앙도, 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신앙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영광을 따라가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고난을 자처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구복신앙에 빠져 있는 교회들처럼 내가 받을 은혜와 복만 추구하고 살아야 합니까? 자기 안락을 위해 큰 교회를 선호하는 사람들과 같이 나도 그런 성도가 되어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주님의 고난을 본받아서, 고난 받는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우리들도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를 위해 고난 받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통해 전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왔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일에 우리 모두는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나도 주를 위해 받는 고난까지라도 기쁘게 감내하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있어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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