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9. 19. 20:50

2계명 :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출애굽기 20:4-6

 

우리민족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들 속에는 이교적인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명절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분쟁과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 지나면 추석이 됩니다.

이 추석의 기쁨도 신앙 때문에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명절을 앞두고는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추석을 앞에 두고 있는 이 주일에 하나님이 주신 2계명을 통해 우상숭배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1계명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제 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계명이었습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에 대한 계명입니다. 하나님만 우리의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2계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라는 계명입니다.

 

2계명의 말씀은 예배의 방법에 대한 계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섬길 때, 하나님의 형상이나 또 다른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계명과 2계명의 말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1계명은 예배의 대상에 대한 계명이라면, 2계명은 예배의 방법에 대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두 계명의 차이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가 2계명을 통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2계명에 대한 보충설명이 출애굽기 20:23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를 비겨서라는 이 말씀은 나를 만든답시고 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2계명은 하나님을 만든답시고 그 어떤 신상도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사람들이 형상을 만드는 이유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자꾸 신상을 만들고 형상을 만들어서 세우려고 합니까?

사람들이 신상을 만들고 형상을 만들어 세우는 데는 한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 부처상을 만드는 것은 부처를 숭배하기 위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면, 인천상륙작전의 아주 중요한 장소였던 인천자유공원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운 것이 바로 인천상육작전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또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로 길에 이순신장군의 동상과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운 것은 이 사람들이 한 업적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예술적인 목적으로 만듭니다.

로마에 가면 대리석으로 만든 많은 조각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공적인 인물들의 조각이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런 조각품들은 예술가가 예술적인 동기로 만든 것들입니다.

 

이 중에서 성경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종교적인 목적으로 형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2계명에서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신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지금도 종교적인 목적으로 형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가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의 형상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형상은 언제나 성당 입구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 형상이나 제자들과 성자들이 형상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런 형상들을 세워 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2계명에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런 형상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2계명의 말씀을 버젓이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 카톨릭교회는 무엇이라 변명하고 있습니까?

로마 카톡릭 교회는 자신들의 형상숭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형상 숭배를 금하고 있는 제 2계명의 말씀을 그 앞에 있는 1계명의 말씀에 포함시켜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우리 개신교의 십계명은 다릅니다.

 

우리는 1계명은 예배의 대상에 대한 계명으로, 2계명은 예배의 방법에 대한 계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교회는 1 계명과 2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봅니다. 이 두 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만들면 어떤 계명이 됩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고, 우상이나 신상은 만들지 말고 절하며 섬기지 말라.’라는 말씀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제 1계명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우상은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으로 예수님이나, 마리아나, 성자들의 형상은 만들어 섬겨도 괜찮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예수님이나 마리아나 성자들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고 기도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번 양보해서 예수님과 마리아와 성자들의 형상 앞에 절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냐? 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절하는 것은 이 분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예의를 표하는 것이지 결코 예배하거나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로마카톨릭 교회는 결국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조상들에게 제사 드리며 절하는 것은 조상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존경을 표하고 예를 표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은 더 나아가서 신사참배를 허용하게 됩니다.

1932년 일본 천주교회는 일본 정부에 신사참배가 종교 의식인지 국민의례인지 답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의 일종이라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일본 천주교는 신도들에게 국민의례인 신사참배를 해도 괜찮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일본의 상황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였고, 그 결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한국교회 성도들의 순교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무엇이라고 변명합니까?

자신들은 성모 마리아를 보면서, 베드로를 보면서, 성자들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형상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시청각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졌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형상들에 입을 맞추고, 형상들 앞에서 성호를 긋고, 기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사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은 십계명의 1계명과 2계명이 서로 다른 계명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의 계명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결국 로마 카톨릭교회로 하여금 형상숭배의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재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단들도 우리가 쓰는 이 성경 말씀을 텍스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해석하는 것을 보면 우리와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늘 기도하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신앙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아멘.

 

2.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2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형상은 특정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으나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그 논과 밭에 허수아비를 세워 놓습니다.

농부들은 왜 허수아비를 세워 둡니까? 그 이유는 자기가 항상 거기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밥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하고, 다른 논에도 가야하고, 다른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때 곡식을 해치는 새가 날아오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자기 대신에 허수아비를 세워놓는 것입니다. 새들이 그 허수아비를 보고 겁을 먹고 곡식을 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농부가 언제나 그 밭에 있을 수가 있다면 허수아비를 세워놓을 필요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너희들은 너희를 위하여 그 어떤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어떤 면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농부가 허수아비를 세워 놓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만들어서 세워놓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고 또 죄도 덜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호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 계명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주와 축복이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 계명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로 간주해서 삼사 대까지 벌을 주신다고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간주하여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만 보아도 하나님이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이 2계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농부는 왜 허수아비를 세워 둡니까? 자기가 거기에 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수아비로 자기를 대신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워둡니다. 만약 농부가 언제나 그 밭에 있을 수가 있다면 허수아비를 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또 어디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특별한 장소에 하나님의 형상을 세워 놓고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 라는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139:7-10 말씀에서는 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모르게 일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들이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두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을 대신 할 그 무엇을 만들어서 둘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만약 불교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 교회 안에 세워 두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형상이 서 있는 교회에 와서는 엄숙한 체하고 거룩한 체하겠지만,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외식하는 신앙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하나님을 형상화 하여 두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그 형상이 있는 곳만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아주 곳곳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세울 필요성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페루나 칠레는 안데스 산맥이라는 높고 긴 산맥을 따라 세워진 국가입니다.

그래서 높고 험한 산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험준한 산길에 가면 굽이를 돌때마다 개집만한 새하얀 집들이 지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에게 저것이 무엇이냐고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집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도로가 하도 험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집에 계시면서 지켜 주시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집을 많이 지어 놓았다고 합니다.

 

또 페루와 칠레에는 험하고 깊은 골짜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 골짜기 마다 사람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 사람이 골짜기를 지켜 준다고 믿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페루와 칠레는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로마 카톨릭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이것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까? 이런 행위들은 아마 제 2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고 그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행위가 아닙니까?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2계명의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은 왜 형상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물질로 존재하시지 않고 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신에 대해 상상을 해서 만들어 세웁니다. 사람들은 신이란 많은 사람을 도와야 하니까 손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손이 많은 신을 만들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신이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리한 눈을 가진 신을 만들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신이란 사람들에게 복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많은 유방을 가진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 형상화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영으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 이라는 한계 속에 물체로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과는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계신 곳을 우리는 하늘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계신 영의 세계인 3층천까지 갔다가 왔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영의 세계에서 보고 들은 것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말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영적인 세계에서 본 것을 물질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듯이, 영이신 우리 하나님을 물질적인 세상의 언어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물질세계에 속한 언어로 자신을 계시해 주실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하고 짐작하여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그 어떤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왜 하나님은 형상 세우는 것을 금하셨습니까?

셋째, 이 세상 모든 형상은 모두 다 인간보다 못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도 더 뛰어난 존재입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짐승들이나, 바다 속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 아무리 아름답고 신비해 보여도,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인간들보다 열등하고 그 가치가 떨어지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것은 사람들이 그런 형상들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신이라고 하면서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유치한 행동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사건 중에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간 후에 오래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해 오던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또 다른 인도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것이 바로 금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이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 송아지는 하나님이 타고 다니시는 송아지라고 하면서 이제부터 이 송아지가 우리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하며 그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고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무슨 핑계를 대었습니까? 자신들은 금송아지를 신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그 금송아지를 통해 자신들을 인도해 주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한 죄가 됩니다.

 

나이가 들면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왜요. 사진이 예쁘게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잘 나오지 않은 그 사진을 액자에 담아 집안에 걸어 둡니까? 아니면 없애버립니까? 우리는 이상하게 나온 사진은 비록 그것이 내 얼굴이라도 보관해 두지 않고 없애 버립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존귀와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하나님이시다. 지금부터는 이것으로 하나님을 삼자 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순간 곧 바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손상되고 훼손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크나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만드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엄히 금지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형상으로도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계십니까? 하나님은 신적인 고유한 속성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영성과 지성과 도덕성 거룩성 등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속성들로 이 세상 속에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그 신적인 속성 일부를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성령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이 신적인 속성들을 받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성도들의 삶에 대해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성도들에게는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거룩하게 사는 삶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삶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신앙의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남미의 카톨릭은 완전히 우상종교화 되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예배당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설치해 두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데 도움이 될 거다.” 라는 생각을 하고 하나 둘 우상들을 만들어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남미의 카톨릭 교회는 우상종교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일부 교회들이 이를 따라서 강단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제단상이라는 것을 강단 뒤에 두고 설교하는 단은 좌우로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 상 양편에는 촛대를 설치하고, 또 강단 벽에는 조명이 뒤로 비취는 십자가를 달기도 하고, 그 십자가 아래에는 커다란 성경책을 펼쳐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고 발전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결국에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게 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뭔가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개별 의자보다보다 장의자를 더 좋아합니다. 성가대도 평상복이 아닌 성가대 가운 입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야 경건한 분위기 거룩한 분위기가 더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이런 교회들을 선호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보다 성당을 좋아하는 이유는 성당에 가면 뭔가 거룩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당에 가면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이 가진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도 큰 건물을 건축하고, 고전적인 분위기가 나는 인테리어를 하고, 장엄한 소리가 나는 파이프 오르간으로 장식을 하고, 교회 벽에는 성 삼위 하나님을 형상화한 모자이크를 새겨 두면, 사람들은 그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좋아해서 모여들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입장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신 말씀이 바로 2계명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남겨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만 남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형상이나 유품도 남겨주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나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는 수의가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구리 뱀이 달린 장대가,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올무가 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남겨주신 유품들이 있다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사람들이 만져 보려고 하고 그 앞에 가서 절하며 섬기게 될 것입니다.

 

카톨릭을 보십시오.

어느 곳에 있는 마리아 상의 눈에서 피가 흐른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가서 기도하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2계명은 예배당을 깨끗하게 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단을 귀하게 여기고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금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의 강단은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예배는 신상 앞에서 절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깨닫고 돌아가서는 그 생활 속에서 깨달은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면 질투가 무엇입니까? 질투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일어납니다.

 

내 남편 곁에 어떤 다른 여자가 어른거리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여인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 남편은 또 자신만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내의 주변에 다른 남자가 어른거리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아내는 나만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부사이에 무엇이 끼어들면 질투와 분노가 생기고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살인까지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속이 좁고 옹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하여 전혀 질투를 느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모자라서 우리 같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질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특별한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죄와 형벌 속에서 건져주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이제 너는 내 것이라고 하면서 그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훨씬 진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 다른 신을 사랑한다면 그냥 넘어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소홀하게 취급하는 어떤 행위도 금지하신 것입니다.

 

이 둘째 계명을 바로 지키려면, 우리는 요한복음 4:24절 말씀과 로마서 12:1절 말씀을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이 말씀은 형식적인 예배와 형상숭배와는 반대가 되는 말로서,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예배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2:1절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함께 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받은 말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는 자세로, 그 받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2계명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을 섬기며 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신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나 다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2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살아가는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드리는 참 예배이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날마다 산 제물이 되어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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