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라
출애굽기 20: 7
오늘 우리가 본문 삼고 있는 출애굽기 20:7절 말씀에서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제 3계명인 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 부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이름을 꼭 말해야 할 때에는 ‘저희 부모님은 무슨 자 무슨 자 무슨 자이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최대한 조심하여 부모님의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님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배경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 말씀의 배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을 공경하고 높이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요구를 하고 계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경외심과 공경심을 가지고 부를 수도 있고, 나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망령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죄를 반드시 물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제 3계명의 말씀을 통해 하고 계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름 중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이름도 있고 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도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 3계명을 통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함부로 부르지 말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하신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잘못 생각하여 이 계명을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우리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을 사용하며 살되, 함부로 부르지 말고 망령되게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편 96: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사람들의 올바른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되겠습니까?
학생들이 그 선생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화로우심에 합당한 영광을 담아서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것은 제 3계명을 어기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개인의 인권과 자유와 평등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평등이라는 가치에 기반을 두고 서로를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적인 일에서는 그 사람이 손윗사람이냐 손아랫사람이냐를 구분하지 않고 똑 같이 누구누구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그 예를 병원 같은 공적인 자리에 가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간호사는 사람들을 부를 때 그 나이를 가리지 않고 00님이라고 호칭합니다. 만약 간호사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그냥 이름을 부르면 아주 불쾌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적으로 아는 사람을 만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잘 아는 사람이거나 자신과 친한 사람이거나 혹은 존경하는 사람일 때에는 존칭을 붙여서 이야기 합니다. 그 예로 ‘누구누구 목사님이 다음 달에 그 자녀 결혼식을 행하신다내요.’ 라고 존칭을 붙여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 하는 상대방이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면 존칭을 생략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비록 그 이야기 하는 대상이 대통령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윤석열, 한동훈, 조국, 문제인 이렇게 개인들의 이름을 지칭하며 대화합니다. 물론 이 모든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일 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거의 매일 아침에 공원에 가서 사람들과 어울려 아침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목사님이라고 존칭어를 붙여 부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두 사람은 제가 있는 앞에서도 목사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저를 존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이렇게 부르는 사람의 마음 안에 목회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하며 운동합니다. 목사님들은 운동을 해도 목사님들과 모여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만약 그런 모임이 있다면 거리가 좀 멀어도 그곳에 가서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였습니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며 사는 언어를 보면 존칭어들이 아주 발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모님이나 스승이나 손윗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합당한 예의를 갖추고 존칭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이렇게 예의범절을 갖추고 존칭어를 사용하였다면, 사람들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어떻게 불러야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에 합당한 경외심을 가지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과 마음과 고백을 담아서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3계명은 바로 여기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 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와 자세에 대해 교훈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늘 경험하며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아서 가뭄이 들게 되면 곧 바로 자신이 믿지도 않고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비난하고 욕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나거나 또는 장마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그 피해가 늘어나게 되면 곧 바로 자신이 믿지도 않고 자신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고, 쉽게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거부감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봅니까?
사람들은 그 마음에 가득 담겨 있는 것을 그 말로 그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라고 하신 이 계명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그런 사람,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 성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이 이 제 3계명의 말씀을 통해 하고 계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마음과 사람들이 하며 사는 말은 상호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그 입으로 말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진 마음과 그 하며 사는 말의 상호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라고 하신 이 계명을 잘못 이해하여서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3계명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아예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이 하나님의 이름은 원래 네 개의 히브리 자음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네 개의 자음을 절대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말하였다가 그 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 속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 단어를 ‘아도나이’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아도나이는 ‘주’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해서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근자에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 보다 야훼가 더 정확한 발음이라고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라는 단어를 모두 다 야훼로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 그 자체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이름과 권세와 능력을 사용하며 살 수 있는 권한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황제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면 황제나 왕이 직접 나서서 그 사람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전에 신문고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백성 중에 어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이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 시간에 신문고를 두드립니다. 그러면 왕이 그 신하를 보내어 그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의 말이 사실로 확인이 되면 백성에게 악한 짓을 사람이나 권력자를 잡아서 그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습니다.
로마에서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제도를 이용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다가 붙잡혀서 2년 동안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때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을 희생양으로 유대인들에게 내주려고 한다는 첩보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 자였던 바울은 이런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지 않고 로마 황제였던 가이사에게 직접 재판을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어 갔고, 이 일을 통해 바울은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도 힘없는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시편을 보면 억울함을 당한 성도들이 자기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가 당한 억울한 일을 신원하여 주실 것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때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도와주실 분은 주밖에 없다고 하며 도우심을 호소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은 고아가 아니고 난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왕이 계십니다. 우리의 왕은 온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호소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가지고 사는 놀라운 특권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국 시민이 북한이나 중국 공안에 잡혀서 억류를 당하게 되면 미국 정부는 어떻게 합니까? 미국 정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국민을 구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구해내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패권국가인 미국의 힘입니다.
부모 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녀들입니다. 만약 그 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부모는 만사를 제쳐 놓고 그 자녀를 도우려고 나설 것입니다.
저희가 전에 성도님 집에 심방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날 함께 간 예은이가 놀이터를 보더니 ‘잠깐 놀이터에 가서 놀다가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그 놀이터가 보이는 곳에 앉아서 예은이가 놀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예은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은이를 데리고 오려고 놀이터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은이는 그 놀이터에 없었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없어졌으니 부모 된 저희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때부터 그 아파트 단지를 뒤지며 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예은이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혹시 예은이를 잃은 것은 아닌지 염려되고 걱정되었습니다.
하물며 그 당사자인 예은이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저희는 가슴 조이며 정신없이 예은이를 찾아다녔습니다.
나중에 예은이를 찾고 난후에 자초지종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은이는 그 놀이터에서 좀 더 많이 놀다 오고 싶어서 막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놀이터에는 어른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무서워서 다른 놀이터를 찾아가 놀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파트는 생전 처음 와본 곳이라 무섭고 겁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찾아보려고 ‘이리 갔다 거리 갔다’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은이의 모습을 이상하게 본 어떤 아주머니가 예은이에게 가서 이야기를 걸어 왔고, 아파트 관리실로 데리고 갔고, 관리실에서는 다섯 살 난 예은이라는 아이를 아파트 관리실에 데리고 있으니 부모님은 와서 데리고 가라는 방송을 하였습니다. 이 방송을 저희가 그날 심방을 간 그 집사님이 듣고 저희에게 전화를 해 주어서 우리는 예은이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 일 후 저희는 예은이에게 아빠 엄마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으면 혹시 잃어버려도 금방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핸드폰이 나와서 언제 어디서나 연락이 되고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급한 일을 만나면 마치 우리가 전화를 걸어 도움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호소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의 호소를 듣고 응답해 주시기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바로 119 구급대입니다.
우리가 위급한 일을 당하게 되면 119 구급 대를 부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급한 일을 당하게 되면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실제 가지고 있는 재산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병이 들었을 때에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에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와 적을 이기게 하시고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서 두려울 때에는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 해 주시고 마음의 평안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제 3계명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할 권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이 특권을 그 삶 속에 누리고 사용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이 이 제 3계명의 말씀을 통해 하고 계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된 우리들에게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나쁜 마음이나 올바르지 않은 의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또 거짓말을 참말인 것처럼 꾸미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서도 안 됩니다. 또 사기를 치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거짓말 하겠습니까?” 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제 3계명은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제 3계명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시되고 있습니까?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서 이 계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악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함으로 이 계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오늘날 사람들은 양 극단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신성시하여서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지도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며 심지어 욕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어에는 ‘오 마이 갓’ 이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와 같이 ‘하나님’이라는 말과 ‘예수’ 라는 말을 욕설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학생들도 이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서 친구들이 이런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 뜻도 모르면서 대화중에 사용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알려 준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과 같이 사용하고 있는 인간의 언어생활 속에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주 받은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13-14절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왜 이런 특권을 주셨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시기에 우리들은 한번 두 번 도움을 주시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리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고 있는 그 기도를, 마치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기도 같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 응답해 주셨듯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으로 들으시는 것입니다. 아멘.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사람이 당장에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는 듯이 주목하여 쳐다보았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일을 우리가 한 것처럼 어찌하여 우리들을 주목합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은 사람들을 축복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고, 기도를 할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했고, 믿음으로 행하며 살았던 그 모든 일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귀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설교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제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의 설교와 기도와 구제에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람들 중에는 대통령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찰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 곧 바로 잡아갑니다. 왜요. 이런 사람들은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서 사기를 치고 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아무리 사용해도 잡아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책임을 져 주십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살 수 있는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렇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을지라도, 이 귀한 이름을 함부로 사용함으로 죄를 짓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권으로 주신 이 귀한 이름을 올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제 3계명의 말씀도 똑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잠언 19:23절 말씀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알아주시고 그 수고와 헌신을 좋은 것 선한 것으로 갚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하며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삶’을 살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살아감으로, 그 이름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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