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본이 되는 교회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12. 5. 14:27

본이 되는 교회

데살로니가전서 1:1-8

 

우리는 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분이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쳐 왔는지를 잘 보았습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곳곳에 있는 분향소마다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카톨릭 신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없는 불신자들불교인들,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 그 분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행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추모하는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든지 방송사들이 생방송을 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교회를 평가하고 신자들을 평가합니까?

그 가진 신앙이나 그 고백하는 신학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만약 신앙이나 신학으로 평가한다면 김수환 추기경은 그렇게 존경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존경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기독교가 경계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입니다.

 

1962년 교황 요한바오로 23세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 고 선언하면서, 타 종교인들이 가진 좋고 참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 그런 것들은 마침내 모든 사람으로 생명의 빛을 얻도록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 평생 이 사상의 신봉자를 자처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살아온 삶은 존경을 받을 만했습니다.

그는 독재 권력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편에 섰으며, 일부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에 비해 검소하고 소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삶을 산 김수환 추기경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은 신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경 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성경을 읽지만,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삶을 읽는다.” 이 속담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는 신실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올바르고 정직한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의 삶이 엉망이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종교호감도 조사

 

국민일보에서는 1984년부터 2014년까지 30년 동안 5차례 한국인의 종교의식 변화를 조사한 일이 있습니다. 종교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당신은 어떤 종교기관을 신뢰합니까? 라는 질문에, 카톨릭 교회를 신뢰한다고 한 사람들이 35.2%, 불교 사찰을 신뢰한다고 한 사람들이 31.1%, 개신교 교회를 신뢰한다는 사람들이 18%였습니다. 특히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한 사람들 중에서 14.1%가 개신교 교회보다 카톨릭 교회를 신뢰한다. 라고 응답했고, 카톡릭 신자 중에서는 1.1%가 카톨릭 교회보다 개신교 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종교별 호감도 조사에서는 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31.5%, 카톨릭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29.8%,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20.6%였습니다. 이것만도 심각한 상황인데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 중에 3/4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나는 기독교에 호감을 가진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 중의 1/2이 불교신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감도가 지극히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당신은 한국교회를 신뢰합니까? 신뢰하지 못합니까? 라는 질문에,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자수는 18.4%,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응답자 수는 48.3%였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한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 속에서 이렇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한국교회가 정말 사람들에게 신뢰하지 못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교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당장 우리나라에서 한국교회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그 즉시 세계 어느 나라보다 타락한 나라, 죄와 악이 관영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 자정의 능력이 없는 나라, 사상적인 혼란 이념적인 혼란 속에 빠져 헤매는 그런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사회 구석구속에서 이 나라를 떠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라도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이런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들만이 이 어둔 세상을 비쳐주고 있는 빛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삶속에서 자기 역할을 잘 해 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인 저는 다릅니다. 저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고, 그런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의 주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우리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일부 교회지도자들과 일부 성도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전체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나쁘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이렇게 나쁜 평가를 받고 있는 되는 우리의 잘못이 큽니다.

그러면 우리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사실 변화의 종교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고,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들은 이런 성도들의 변화보다는 외적인 현상에 집중해 왔습니다. 교회는 교회 건물을 반듯하게 지어 놓고 그것으로 자기 과시를 하려고 했습니다. 교인들을 모으기 위해 성경에도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을 하며 성도들을 향해 복 받으라. 복 받으라고 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를 보며 그 교세를 자랑하고 그 힘을 자랑해 왔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인기 관리를 위해 마치 개그맨처럼 말씀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지향했던 방향과 성도들의 욕구가 맞아 떨어지면서 곳곳에 메가 처치들이 세워졌습니다. 교회가 메가 처치가 되자 교회 본연의 모습은 사라지고 세상의 성공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성공이, 능력이, 힘이 곧 믿음으로 치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는 힘을 자랑하고, 능력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믿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성도들은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메가 처치들만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교회 전체가 다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성경 전체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가지고 있는 믿음이 제각각입니다.

 

또 오늘날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실정법을 어겨서 구속되는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앞장 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다 보니,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을 배우고 삶을 배운 성도들의 삶 또한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를 세상이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결국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 통계를 보면,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종교를 선택할 경우 1위가 불교이고, 2위가 천주교이며, 3위가 기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종교별 호감 도를 보면 망연자실할 실정입니다. 종교 호감도전체를 100%로 보았을 때, 불교에 대한 호감도가 42%,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가 39%,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가 12%,. 기타가 7%순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전도가 잘 되겠습니까? 오늘날은 참 전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라도 뉘우치고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해결 방안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비방 받는 사람, 거리끼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노력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사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정말 성경적인지, 나의 가정생활, 직장생활, 학교생활, 교회 생활은 어떤 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는 성도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나 우리교회가 세상의 비방거리가 될 때 가장 타격을 받는 것은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전파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성도들과 교회가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의 노력에 잘 호응하였던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감사하게도 5절에서는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다고 하였습니다. 6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진 복음이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과 우리를 본받는 자가 되게 했다고 합니다. 7절에서는 그렇게 예수님과 우리를 본받으며 산 너희의 삶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8절에서는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너희의 소문이 마게도냐아가야로마 각처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너희의 삶이 복음 전파와 복음의 확장에 큰 기여를 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우리가 복음 전파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 건전하고 건강하고 확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이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에 어려움이 생기게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며, 복음 전파를 수월하게 해 주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요. 신자들은 성경을 보고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지만,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삶을 보며 신앙을 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늘 성경을 보며 신앙생활을 해 나가듯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신앙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해를 가지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복음 전파가 수월해 질 수 있습니다. 아멘.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8:1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5절 말씀에서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신 말씀대로 정말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삶 하나하나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과 같이, 사람들에게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밝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삶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현재 이 땅에 계시지 않고 저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는 빛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지금 이 세상의 빛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이제 성도들이 곧 이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세상의 빛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2:36절입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빛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1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일하게 너희만 세상의 빛이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빛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8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예수를 믿음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빛의 자녀가 된 너희들은 더 이상 어둠의 자녀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요.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5절입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빛인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본이 되는 삶이 예수님이 살았던 삶이고, 사도바울이 살았던 삶이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가르쳤던 삶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삶은 본을 보여주기 위한 삶이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던 그 모든 삶은, 사람들에게 너희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 라고 본으로 보여주신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달은 후, 자신도 예수님이 사셨던 그런 삶의 본을 따라 살았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1: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아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사는 자가 되라.’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로부터 이런 교훈을 받았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 가르침을 받은 대로 충실하게 사도바울을 따라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1:6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삶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전해지면서 그곳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삶이었다고 합니다.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이렇게 볼 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려고 세상 속에 세워주신 모델하우스와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속에 교회를 세워놓고, 세상 사람들에게 너희가 천국에 대해 알려고 하면, 너희가 천국 생활에 대해 알려고 하면, 내가 세상 속에 세워 놓은 모델하우스인 교회를 보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창조해 주신 하나님을 전해주고, 그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는 천국과 천국에서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참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고, 그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는 곳이어야 하며, 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생활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강해

 

이제 남은 시간동안에는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은,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도 안에 있는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한편으로는 데살로니가 인의 한 사람으로 살고 있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중적인 신분을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들도 육체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으나, 영으로는 하늘 백성으로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두 세계에 속하여 살아갑니다. 사람들 중에서 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두 세계를 연결해 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늘 복음을 세상에 전해주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 복음을 전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참 귀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서의 첫 구절에서 이 귀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 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자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성도들입니다. 또 바울은 1절에서 이 귀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존귀하게 여겼던 사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기를 기원했던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믿음 안에서 볼 때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존귀하고 복된 사람은 없습니다. 아멘.

 

2절입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를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바울은 자신이 전도하여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기억하고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2절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항상 감사하며 살았던 바울의 삶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이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우리 생활 속에서 감사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원망할 일, 불평할 만한 일만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불평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으면 우리의 삶이 불편해 집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봄에 나무가 새 잎을 내는 것을 보면서도 감사하고, 여름에 풍성하게 달린 나뭇잎을 보면서도 감사하고, 가을에 아름답게 단풍이 든 잎을 보면서도 감사하고, 겨울에 모든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보면서도 감사하고, 겨울의 앙상한 가지 위에 쌓인 눈을 보면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감사하는 성도, 범사를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2절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며 살았던 바울의 삶입니다. 바울은 정말 기도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기도생활에 대한 바울의 몇 가지 가르침을 살펴보면, 데살로니가 전서 5:17절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로마서 12:12절에서는 기도에 항상 힘쓰라.’ 골로새서 4:2절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라고 합니다.

 

그러면 쉬지 않고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기에 힘쓰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꾸준히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계속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기도생활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생활을 하지 않다가 마음잡고 기도하려고 하니 기도가 어려운 것입니다. 늘 기도생활 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도생활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운동선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늘 운동하고 늘 훈련해 온 사람들에게는 운동이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운동을 하려고 하면 운동하는 그 자체도 어렵고 운동한 후에도 온 몸이 아프고 쑤시는 것입니다. 기도도 같습니다. 가끔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어렵습니다. 한 번 기도할 때는 몇 시간씩 기도하고, 또 쉴 때는 마냥 쉬는 사람에게 기도는 늘 전쟁입니다.

 

그러나 매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기도는 생활이고 호흡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그 생활을 힘들어 하지 않고 숨쉬는 호흡을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생활하는 것이 힘들고 호흡하는 것이 힘든 사람들은 건강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야 하며 인공호흡기를 끼워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늘 깨어서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은 기도생활을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렇게 요청합니다.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제자들이 볼 때 자신들에게는 기도가 어렵고 힘이 드는데, 예수님께는 기도가 아주 쉬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이 쉽게 기도할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꾸준히 기도생활을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기도가 호흡과 같이 되고, 기도가 생활이 되는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기도생활을 힘들어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렇게 기도가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기도가 호흡과 같이 되고, 기도가 생활이 되어 질 때까지, 기도훈련을 계속해 나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따라 오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바로 3절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반드시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소망의 인내가 따라 온다고 합니다.

 

1.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믿음에는 어떤 역사가 따르는 것입니까?

우리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믿음을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고백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 믿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시인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둘째, 내가 믿게 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전도자가 되게 합니다.

우리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내가 믿고 있는 그분에 대해 말해주게 합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을 가지게 되면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전도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난 이후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그 믿게 된 예수님을 전하게 됩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프로그램을 따라 하는 전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자원하여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는 전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가장 먼저 그 예수님을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엄마의 젖을 찾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성경 말씀을 읽게 되고, 그 믿게 된 예수님을 전해주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이 믿음은 우리에게 하늘 소망을 가지게 하고,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5:5절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재림을 바라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양 속담에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이 세상은 앞으로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최상의 낙원이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걱정 근심이 없는 지금의 생활이 천국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이 세상은 앞으로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최악의 지옥이다.”라는 속담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이 낙원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지옥으로 보입니까? 장차 하나님이 주실 하늘생활에 대한 이해와 소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낙원일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사람들이 거짓된 가치관에 속아 사는 사람들, 짧은 인생길을 마치면 멸망과 저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바보들, 한번 가면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가는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우리는 소속이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이해와 기대가 확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천년만년 살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하늘나라입니다. 아멘.

 

믿음을 가지게 되면 또 따라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2. 사랑의 수고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여 이기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늘을 소망하며 세상과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중요한 차이점 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특징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로마서 5:5절입니다. 소망의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님이 부어주신 이 사랑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부어주신 이 사랑은 섬기는 삶을 살게 합니다.

히브리서 6:10절입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이 부어주신 이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게 합니다.

이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시 하게 하며, 말씀으로 인해 받는 박해와 모욕과 수치를 감당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5: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14:2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일을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이 사랑은 무엇이든지 사랑으로 행하게 합니다.

사랑으로 행한다는 말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동기로 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는 위대한 능력과 각종 은사와 놀라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의 동기로 하지 않는 일은, 그 일이 비록 사람들이 볼 때 놀라운 일이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한 일들만 인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발전을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하나님은 이런 삶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할 때, 이기적인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는 그런 성도로 살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믿음을 가지게 되면 또 따라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3. 소망의 인내입니다.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와 마찬가지로 이 소망의 인내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세상에서 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자식들이 잘되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망마저도 늘 불확실합니다. 사람들의 삶을 보면 대박의 꿈을 안고 밤새워 일하는 벤처 기업가가 있는가하면, 고시에 합격하여 신분 상승을 꿈꾸는 고시생도 있고, 한번의 잭팟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로또 복권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향한 성경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로 모든 것을 풍성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라.’(딤전6:17)고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그 소망을 땅에 두고 살지 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사 누리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라고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가지게 되는 이 소망을 영광스런 소망, 복된 소망이라고도 하며, 산 소망, 의의 소망, 선한 소망이라고도 하며, 구원의 소망, 하늘에 쌓아둔 소망, 생명의 소망, 더 좋은 소망이라고도 합니다. 이 소망의 성취는 우리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유가는 오르고, 물가는 오르고, 세계 정치 경제상황은 불안합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란은 유대 국가를 제거하고 멸망시키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소련과 유럽연합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소련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있으며 내년 초에 침공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극동 아시아에서는 대만과 중국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정세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코로나 정국의 장기화로 여기저기서 어렵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프리카 보츠나와에서 시작된 변종 바이러스 오미크론이 온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오미크론은 비말이 아니라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파력이 기존의 델타 변이보다 3배나 높다고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기존 백신의 효과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위중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내일부터 거리두기 단계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지혜로운 삶이 무엇입니까?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전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려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손자들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내려가서, 그간 돌보지 못했던 농장과 임야를 가꾸면서 산다고 카톡에 올렸더라구요.

 

이런 세상 속에 소망이 있어 보입니까?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가지고 사는 소망을 물어올 때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소망, 확실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소망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고 담당하게 우리가 가진 하늘 소망을 말해 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정리합니다.

바울 사도는 인사말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지고 사는 세 가지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셋째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 셋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닙니다. 이 믿음 소망 사랑을 다 가지고 살았던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이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확실하게 구원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1:4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4.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셨을 때 인간은 늘 실패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서 살인자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사람들 앞에 두었을 때 사람들은 늘 악을 선택하고 죽음을 선택하고 저주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런 인간의 선택과 너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카인대신 아벨을 택하셨고,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늙고 자녀도 없었던 아브람을 택하셨고, 많고 많은 민족 가운데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마엘 대신 이삭을, 에서 대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전1:26)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라고도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택하심은 우리 구원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5절입니다. 이는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지 않고,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능력과 확신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택함 받은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6-7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당시에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박해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을 가진 후에는 예수님과 전도자들을 본을 따라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삶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위는 있는데 믿음이 없는 것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위선적인 믿음, 외식하는 믿음입니다. 바른 믿음은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행함으로 그 가지고 있는 믿음을 보여주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과 행함이 함께 하는 믿음, 살아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소문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8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산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문이 그 주위에 있는 지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참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이 이렇게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간 상황이 사도행전 17:1-5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인 자신에게 재판도 없이 채찍질하고 감옥에 가둔 것을 항의하자, 빌립보 행정관들이 바울을 석방해 주면서 상황이 좋지 않으니 빌립보를 떠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간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3주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유대인들의 방해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베뢰아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3주 머물면서 세운 교회입니다.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성경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9-10절입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교회가 3주 동안 어떻게 세워졌는지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섬기며 살아온 우상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돌아와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첫째, 자신들이 섬기며 살았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믿음이 신실한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 교회는 둘째, 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며 살았던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다주실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삶을 살았던 교회였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의 요약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살았으며, 재림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요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들도 먼저 버릴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하늘 소망을 가지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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