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은 어떤 일군이었나?
에베소서 1:1
우리는 지난주에 에베소서 1:1절의 전반부의 말씀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후반부의 말씀인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인들의 통상적인 인사법으로 그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서신을 보낼 때 가장 먼저 발신자와 수신자를 언급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감옥에서 옥중 서신들을 보내고 있는 바울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이런 로마인들의 전통에 따라 그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에베소서의 발신자에 해당하는 부분은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에베소서의 수신자 즉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성도들은 어떤 일군들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에베소서의 수신자 즉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그러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이 사람들은 에베소라는 도시와 그 도시 인근 지역에 살고 있었던 성도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을 2장에서도 에베소와 그 인근지역에 사는 성도들을 다 합하여 에베소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이름을 부르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각각의 교회 별로 구분하여 그 이름을 부릅니다. 참빛교회, 온서울교회, 상신교회 등등으로 부릅니다. 이렇게 교회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은 개개의 교회를 중요시 하고 있으며, 그만큼 개교회주의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을 보면 바로 옆에 있는 교회와도 전혀 교류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가져온 것이 바로 개 교회주의입니다. 요즘은 개교회주의가 극단화 되어서 바로 옆에 있는 교회와 교류가 없을 뿐 아니라, 그 가지고 있는 신앙까지도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에베소 지역에 성도들이 모이는 작은 모임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모임들을 개개의 교회로 보지 않았으며 그 지역에 있는 전체 모임들을 하나의 교회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와 그 주변에 있는 모임들을 총칭해서 에베소 지역에 있는 교회 즉 에베소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와 그 주변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전체 성도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당시에는 어느 지역에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가 여럿이 있다고 해도 그 모든 성도들을 하나의 교회로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방식으로 부르면, 서울에 있는 서울교회, 인천에 있는 인천교회, 광주에 있는 광주교회, 대구에 있는 대구교회, 부산에 있는 부산교회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또 1절 말씀을 다시 보면 바울은 이 편지의 대상자들에 대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따로 있고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동일한 성도들을 부를 때 앞에서는 지역을 중심으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부르고, 뒤에서는 에베소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특징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서로 다른 두 대상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같은 대상을 그 강조점에 따라 서로 다르게 불렀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먼저 살펴볼 것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란? 호칭에 대해
바울은 에베소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도(聖徒)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성도'라는 말에는 거룩할 성(聖)자와, 무리 도(徒)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이란? '거룩한 무리들'이란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성도라는 호칭은 참 영광스런 호칭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은혜로 불러주시고 성도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라는 말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던 우리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는 이 성도라는 호칭이 경시당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서 성도님이라고 부르면 그 즉시 정색을 하며 반발합니다. ‘저는 안수 집사이거든요. 저는 권사이거든요.’라고 하며 반발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반발할까요?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호칭들을 보면 ‘장로님, 안수 집사님, 권사님, 집사님, 권찰님, 구역장님, 기관장님’ 등등의 호칭들이 있습니다. 이런 호칭들 중에 성도라는 호칭은 언제 씁니까? 성도라는 호칭은 이제 막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초신 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말은 교회에서 가장 낮은 서열에 속한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성도라고 불러주는 것 보다는 앞에서 언급한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이라는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 속에서 건져 냄을 받아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성도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호칭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호칭들 즉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등등의 호칭은 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붙여준 호칭이라면, 성도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붙여주신 영광스러운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받은 직분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성도로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아멘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저도 성도이고 여러분도 다 성도인 것입니다. 아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성도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고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즉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불러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살아가야 하는 곳은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관계로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법과 이 세상 법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신앙적인 갈등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성도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는 신앙적인 갈등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삶 속에 이런 갈등이 없다면 아마 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의 법으로 내 주변에 있는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켰던지, 다른 하나는 내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여 살지 않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든지 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법과 세상 법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에베소 성도들의 삶의 정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세속적인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성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의 충돌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써,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 세상의 법과 싸우고 전투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성도로 세상 속에 사는 이유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바로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지 않으시고, 왜 이 땅에 세워주신 교회 안에서만 살게 하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의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세속적인 일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법을 세워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 세상 속에서 계속 머물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이 세상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던 곳이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이 세상은 원래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와 반역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는 마귀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가는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 이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춰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가지게 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을 바꾸어 나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해온 일이 바로 이런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유교적인 사회였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예수를 믿게 된 성도들은 유교적인 사회를 기독교적인 사회로 문화와 풍습을 바꾸어 나가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습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입니까?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들은 개인주의가 극단화된 사회를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적인 사회로 바꾸어 나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물질만능주의 사회를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인정을 받게 되는 그런 사회로 바꾸어 나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또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우리 사회는 이기주의와 탐욕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성도들은 사랑과 공의가 흐르는 사회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해야만 합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자기 믿음은 지켜 나갈 수 있어도, 세상의 가치관을 바꾸고 세상의 기준을 새롭게 세워 나가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이미 세워져 있는 이 세상의 기준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가치관으로 바꾸어 나가려면 연합이 필수적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 새로운 기준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 명확한 예를 우리는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AD 70년에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그 후 1948년 5월 14일에 독립을 할 때까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에 붙어서 살다가보니 많은 손해와 피해를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그 나라의 기준을 자신들에게 맞게 바꾸어 나가는 일을 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서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백화점들은 토요일과 주일 이틀을 쉽니다.
본래 미국사회는 일주일에 하루만 쉬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렇게 토요일과 주일을 쉬도록 기준을 바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도입한 주 5일 근무제는 이렇게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과 근로자들이 연합하여 한 나라의 기준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바꾸어 놓은 기준을 우리나라와 전 세계가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틀을 쉬도록 바꾸었습니까?
미국 UCLA 대학은 이례적으로 주일에 졸업식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대학 후원자들이 대부분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원하는 날 졸업식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주일 개념을 무너뜨려갔습니다.
또 맨해튼의 상권을 유대인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달력을 납품 받아 배부할 때 토요일과 주일 모두가 공휴일로 표시가 되어 있는 것만 납품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토요일과 주일 모두가 공휴일로 표시된 달력이 미국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쳐서 나중에는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를 이끌어 올 정도로 뉴욕에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많았습니까?
아닙니다. 뉴욕시민 중 유대인들의 숫자는 겨우 1%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의 유대인들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뉴욕 전체의 기준을 유태인에게 맞게 바꿔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 전체의 기준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많은 나라의 기준들까지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적은 수의 유대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대인 특유의 끈끈한 결속력 때문입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 아주 저렴한 아파트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또 이민을 온 유대인들이 자립을 할 때까지 경제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족을 해치거나 그들의 질서를 해치지 않은 한 서로를 철저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연합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이 뉴욕의 기준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뉴욕시는 유대인들의 기준을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 여유 있는 교회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뭔가 내 세울 수 있는 것에 투자합니다.
교회들은 선교사님을 지원합니다. 동남아에 학교를 세워줍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우물을 파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급식 지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을 하려면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헌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곳에서도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꾸길 원하는 교회는 먼저 우리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게 될 때 비로써 교회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들을 향해 여러 편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들은 서로 다 다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빌립보 교회에 대한 내용을 기록해 보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에베소 교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내용을 기록해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그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는 세상과 구별된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이 일을 위해 모든 성도들이 교회들이 하나로 연합해야 합니다. 성도들과 교회가 하나로 연합해야만 이 세상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주일날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는 물건을 사지 않는 운동을 하게 되면, 그 지역에 있는 모든 가게들은 장사에서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주일날에는 가게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뉴욕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이라는 부흥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일을 철저히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일에 상점 문을 여는 가게는 이용하지 않기로 하는 불매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양에 있는 상인들이 그 많은 성도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서 주일이면 자진해서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모든 평양 시민들이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연합하기만 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연합하면 음주문화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뇌물문화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음란문화도 바꿀 수 있습니다. 또 성도들이 연합하면 국가시험을 주일에 보고 있는 국가적인 폐단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또 교회들이 연합하기만 하면 주일마다 열리는 공공기관의 행사들을 전부 중지시킬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나가는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을 타협 없이 지키기로 스스로 결단하고,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기도하면서 무슨 일을 시행하게 되면, 하나님의 법과 기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기준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바로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결국 20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것 같은 그런 부흥의 역사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앙의 부흥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전에 있었던 세속적인 기준들을 대체할 새로운 기준들이 성도들을 통해 세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아멘.
기독교 국가인 미국
오늘날 미국은 기독교국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이후 미국은 계속 세속화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존 F 케네디 이전의 미국은 기독교 국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에는 쓰임을 받은 한 가문이 있습니다.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후손들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1차 대 각성운동을 통해 미국의 영혼들을 깨웠습니다. 그의 외손자였던 ‘티모시 드와이트’는 제2차 대 각성운동을 통해 미국의 지성인들을 영적으로 깨웠습니다.
특히 이 티모시 드와이트를 통해 미국은 기독교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티모시 드와이트는 예일대학 학장으로 부임하면서 대학 캠퍼스의 영적 변화를 위해 전심으로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기도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가 지도하던 학생 225명 중 75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그가 말씀을 전하는 곳마다 지성인들이 회심하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영적 변화는 이후 30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 결과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신앙으로 회심하여 돌아온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1800년대 초 감리교인의 숫자는 2,801명이었는데 10년 후에 30,741명으로 11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1790년 침례교인의 숫자는 3,105명이었는데 1820년에는 31,689명으로 10배 증가했습니다. 1800년 초 장로교인의 숫자는 13,470명이었는데 1820년 72,096명으로 증가했고 1837년 226,557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영적부흥이 절정에 이를 그 당시 미국의 총 인구는 12,866,020(일천이백 팔십육만육천 이십)명이었습니다. 그중 기독교인이 12,136,935(일천이백 십삼만육천 구백삼십오)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인 중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숫자는 불과 6%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제2차 대 각성 운동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가 된 것입니다. 아멘.
이런 역사적인 기록들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어떤 마음이 듭니까?
우리나라가 복음화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기준을 정립하고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이 땅에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나가기를 결단하고 함께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과 그 후손으로 이어지는 한 가정의 눈물과 기도가 미국이라는 국가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듯이, 우리들도 한국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도들은 지역사회 안에서 이 세상의 기준을 폐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타협 없이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기준을 지역 사회 속에서 세워 나가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세상 속에 더 살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세상 속에 세워나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가 그런 일을 감당해 나가야 할 현장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노원구이고 상계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를 상계동으로 보내셨고 또 참빛교회를 통해 함께 연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멘.
다음에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란? 단어는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고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부르는 대표적인 명칭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바로 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나오게 되었습니다(행11:26).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란? 그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한 분이 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그 모든 복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 안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각종 은사와 능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역사, 즉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응답이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게 되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의 기도는 효력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기도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느냐 보다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
다음은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라면, 예수라는 말은 그 인격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인격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삶을 살라.’라고 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과 그로 인한 은사와 능력과 역사는 강조하나, 예수님의 인격적인 특성은 등한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바른 믿음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 안에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사역을 믿는 믿음과 함께, 예수님의 인격적인 특성을 본받아 사는 삶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왕이신 그 나라 안에 우리가 산다는 말씀도 되며, 또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왕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는 말씀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 같이, 너희도 예수님을 너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고 교훈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고 또 그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맺으며 살아가는 그 삶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되면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들인데 성령의 열매는 모두 예수님의 성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또 예수님을 그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신실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실하다’라고 한 말은 믿음이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신실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그 마음 안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삶을 통해 거룩한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성경을 보면, 신실(信實)이란 말에 믿을 신(信)자와 열매 실(實)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판단하실 때 그 맺으며 사는 열매를 보고서 판단하십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판단하실 때 그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정직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을 보고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도 전에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요구했습니다. 너희는 아브라함이 혈통적인 조상이니까, 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과감하게 외쳤습니다(마 3:7-10). 이 세례요한의 외침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교회에 다니고, 교회생활에 익숙하다고 저절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 받은 자에 걸 맞는 열매를 그 살아가는 삶에서 맺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22:12절 말씀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기를,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딛 3:14). 사도 베드로도 그 편지에서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벧후 1:5-9).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그 맺으며 살아가는 열매를 통해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신실한 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믿음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을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삶에서는 예수님을 그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에베소서 6:24절 말씀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를 평가하신다면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에 기초를 둔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성품을 소유하고 드러내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사는 성도들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도,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이 되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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