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바울은 어떤 사역자였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10. 2. 14:55

바울은 어떤 사역자였나?

에베소서 1:1-2

 

1. 에베소 교회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기 이전에 아볼로라는 유명한 전도자가 에베소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하였고 23개월가량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바울의 선교전략상 아주 중요한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 선교사를 보면 중요한 선교 거점도시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에베소로, 에베소에서 로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도시들에서는 짧게는 몇 주, 길어야 몇 달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에서는 아주 작정하고 두란노라고 알려진 서원을 빌려서 성경을 강론하고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아데미스라는 다이아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은 가로가 55미터 세로가 115미터나 될 정도로 아주 큰 신전이었다고 합니다. 이 큰 신전 건물을 떠받치기 위해 세웠던 돌기둥의 수가 무려 127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신전이 얼마나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든지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에베소에는 이 신전의 모형을 만들고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에베소에 와서 전도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고 전하였습니다. 이 바울의 전도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아데미스 신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어 갔습니다. 그래서 이 신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과, 이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의 영업이 많은 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동을 일으켰고,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이 에베소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지체되면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에 들렸다가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 항구로 초청하여 마지막 당부의 말과 고별설교를 하고 헤어지게 됩니다.

 

이 후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어 가이샤라 감옥에 2년을 지난 후, 네로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됩니다. 바울은 이 로마 감옥에서 여러 편의 옥중 서신을 교회들에게 써 보냈는데 그 중 첫 번째 서신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에베소서는 에베소 장로들을 만난 후 약 3-4년이 지난 후에 보내졌습니다.)

 

이 에베소서의 가장 특징적인 주제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6장으로 된 짧은 서신인데 그 안에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1-2장에서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다루고 있고, 3-6장에서는 교회의 속성들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2. 에베소서 본문 강해

 

서론적으로 이 정도 살펴보고, 이제부터는 에베소서 본문 강해를 시작합니다.

에베소서 1: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먼저 로마식으로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편지를 쓸 때 언제나 먼저 발신자수신자를 언급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도 당시 로마인들이 인사말을 하는 방식대로 먼저 발신자와 수신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발신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입니다.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입니다.

 

첫 번째로, 에베소서의 발신자 사도 바울에 대해 살펴봅니다.

 

1절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바울의 삶을 보면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바울은 사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일을 앞장서서 하던 박해의 선봉대장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사도행전 9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해 오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를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 바울은 복음의 박해자에서 복음의 전도자로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만남에는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바울을 찾아가셔서 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여 오려고 가고 있던 바울을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이 사건의 주도권을 바울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이 사건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1의 말씀을 보면,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사명을 받았던 그 주도권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만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과정을 보면, 또 모든 사람들이 사명을 받는 과정을 보면, 그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대해 에베소서 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5절에서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예정하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 주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예정해 주셨기 때문에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로마서 8:29-30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우리 구원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계시다고 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싶다.’ ‘이제 예수를 믿어야지,’라고 결단한다고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예수 믿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있다는 것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만세 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해 주시고, 때를 따라 우리를 불러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믿음을 은혜요,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니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실지라도, 은혜로 선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에게는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해 주시고 부르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고 섬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행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여 살아갈 책임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했던 질문이 바로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을 보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주님 누구시니이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이 누구시냐? 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질문입니다. 두 번째 한 질문은 주님 무엇을 하리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게 된 내가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삶에 관한 질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두 가지 질문 믿음에 대한 질문삶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왜요. 이 세상에는 바른 믿음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바른 믿음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른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바른 믿음과 바른 삶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첫째, 그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그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바른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아멘.

 

여러분도 이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바른 믿음이고,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삶 또한 바른 믿음의 삶일 것입니다.

 

만약 예수 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해본적도 없고 이 질문에 대한 답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사상누각(沙上樓閣) 일뿐입니다. 주로 이런 사람들이 이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 구원의 주도권과 살아가는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알게 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가지게 된 사도바울은 두 가지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확실한 대답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도 반드시 하나님께 이 두 가지를 질문해야 하고, 또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받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믿음도 바른 믿음이 될 수 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바른 믿음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또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바울을 친히 찾아가셔서 만나주시고 구원해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이 가졌던 신앙이 바로 지식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졌던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단들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을 만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기초를 교주가 전해주는 지식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기초를 하나님과의 만남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만나 믿고 아는 신앙이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지식적으로 배워서 알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신앙에 대해 무엇이라 고백하였습니까?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계시로 받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이 신앙 이외에 다른 신앙을 전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 전체를 암송하는 것입니까? 전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까? 큰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큰 규모의 사회 복지시설을 세우는 것입니까?

 

물론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할 수 있으면 이런 일들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교회가 재가센터를 설립하고 노인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 일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센터를 통해 섬김을 받고 있는 어르신들이 유익을 얻습니다. 우리가 복지관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관을 통해 교회를 통해 우리의 섬김을 받는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성낙침례교회를 세운 김기동 목사님을 보십시오.

귀신 론으로 인한 이단논쟁은 뒤로 하더라도, 그 목사님의 전도와 설교를 통해 그 교회는 수십 만 명의 성도를 가진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교회 성장이 그 목사님에게 유익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목사님은 그 유명세를 잘못 사용하여서 여신도와의 성적인 문제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성낙침례교회를 통해 유익을 얻은 사람들은 그 교회를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 예수 믿고 구원을 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큰 교회를 세운 것은 결코 목회자의 자랑거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말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늘 조심하며 살고 있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으로 구원을 받게 한 후에, 나 자신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갈까봐 나는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그 일은 바울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을 위한 일은 내가 전도자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예수님을 더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멘.

 

예수 믿는 우리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경험하는 삶을 살면 살수록 이런 사람들은 점점 예수님을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점점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 가게 됩니다. 이런 경건한 삶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장차 주를 뵙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난 예수님께 자신의 생애를 드리고, 그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 믿음이 성장하고 그 인격이 성숙되면서 우리들의 구원이 완성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신앙생활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서도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심지어는 성가대나 교회학교에서 봉사하며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과는 다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만나서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만난 예수님께 자신의 삶 전부를 드리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삶 전부를 드려 헌신하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믿음 생활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예수님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고 예수님을 점점 더 많이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과 감정과 인격이 변할 뿐 아니라, 우리는 전 생애를 통해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할 신앙생활입니다.

 

또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23-4절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 성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라.’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합니까?

바울은 인류가 세운 최초의 도시 중의 하나였던 다소에서 태어나 헬라인의 교육을 받았고, 성장한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지도자였던 가말리엘 문하생이 되었던 엘리트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어떤 사람으로 변하였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자신의 자랑거리였던 그 모든 것들을 마치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으며, 오직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이방인의 사도의 사명에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3:7-9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바울의 삶은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은 그 가치관이 달라졌고, 그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 바울에게 있었던 변화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때 살았던 그 모든 삶 즉 하나님과 원수 된 삶을 다 떠나고, 그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된 삶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믿음의 삶입니다. 아멘.

 

또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넷째,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사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날 때 햇빛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빛은 바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3일 동안 장님으로 있으면서 나는 평생 보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나니아란 사람이 찾아왔고, 그 사람의 안수를 받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예수님이 주시는 사명을 전해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15-16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실 때 앞으로 그를 사용하실 계획을 다 세워놓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만 이렇게 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이 다 계획을 세워놓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뿐이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자마자 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를 이 땅에 더 남겨 두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 주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 가장 먼저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1:17). 그런 후에 안디옥 교회의 초청을 받고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바울은 안디옥 교회 부목사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고,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아시아와 유럽에서 선교하는 일에 그 나머지 생애를 드리게 됩니다(11:25-26, 13:2-3).

 

우리의 삶에 적용)))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과 사명은 사람들마다 다 다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일과 사명을 정리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공통적으로 받은 일과 사명이 있고, 또 개별적으로 개개인에게 주신 일과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통적인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통적인 사명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고 있듯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삶을 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모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모델로 삼고 성도들은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아무리 능력 있게 전해도, 복음을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전해도,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전해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되나 정작 복음을 전해 준 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능력이나 업적이나 성취나 그 나타나는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본받으며 살아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6).

그러므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본받으며,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첫 번째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통적인 사명은 무엇입니까?

2) 세상에 하나님을 예수님을 복음을 전해주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상 함께 있으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6:15-16절에서는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이 주신 이 명령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하기를 힘쓰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전해주고, 예수님을 전해 주고, 복음을 전해주는 이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두 번째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공통적인 사명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한 이 두 가지 사명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함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이 두 가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24:49, 1:4-5). 그러므로 항상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함을 받으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 안에서, 그 자신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 가고, 세상을 향해서는 복음을 전해 주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둘째, 개별적인 사명입니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주신 성품과 기질과 은사와 삶의 여건에 맞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2:6-8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8-11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2) 하나님이 주신 이런 개별적인 사명들은 공통의 사명을 이루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받은 은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은사가 최고의 은사나 되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받은 은사가 마치 자기의 것인 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은사와 기질과 성품과 삶의 환경들을 가지고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공통적인 소명을 이루어 가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공통적인 소명에서 벗어나 있는 개별적인 소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만의 독특한 은사나 사명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타락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8절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그 주신 사명들로 함께 협력하여 주의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내가 받은 개별적인 사명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공통의 사명을 이루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개별적인 사명으로 언제나 공동체적인 사명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개인적인 사명과 공통적인 사명이 상호 조화를 이루게 될 때 개인과 교회와 하나님나라가 함께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적인 사명과 개별적인 사명이 분리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되면 개 교회는 성장하는데 전체 그리스도인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병든 교회의 모습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것은 공동체적인 사명보다 개 교회를 더 중요시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큰 교회가 자신이 가진 인력과 시설로 매력적인 교회를 만들어 가면 갈수록, 그래서 그 교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에게 마치 천국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면 할수록 그 교회는 성장하여 갈 것이지만 이 땅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쇠퇴하여 갈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교회는 본래 하나님을 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본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 그래서 그 하나님의 위해 그 인생을 바치고 생애를 바친 사람들의 모입니다. 그런데 성장하는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좋은 시설과 훌륭한 인재와 잘 갖추어진 예배 등등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관점을 바꾸게 합니다. 이런 교회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 교회를 선택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위해 세워진 교회가 나를 위한 교회로 교회의 체질이 바꾸어져 가게 됩니다. 이런 현상들이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이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쇠퇴하는 속도는 더 빨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교회가 큰 교회가 되고 매력적인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워주신 것이 아닙니다.

 

1세기에 세워졌던 예루살렘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그 어느 교회보다 뛰어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잘 갖추어진 대형교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완벽한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가 극단을 치닫고 있는 오늘날 교회들은 그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통해 이 예루살렘 교회를 로마 제국 곳곳으로 흩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가 나를 위한 교회로 체질이 정착되지 않고, 사도행전 1:8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위해 선교명령을 이루어 가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를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나를 위한 교회로 만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을 위한 교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아멘.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고린도는 항구 도시라서 살인, 폭력, 각종 범죄가 일상처럼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바울과 그 선교 단은 그런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두려움 속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바울의 솔직한 심정은 빨리 이곳에서 복음전파를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곳에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할 내 백성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은혜와 힘을 덧입어서 하나님을 위해 1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한국교회를 나를 위한 교회로 만들어 가면 그 앞날이 뻔합니다.

한국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충성하고 헌신하는 교회로 만들어 가는데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나를 위한 기독교가 될 때 교회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대형교회들이 선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형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성도님은 하나님을 위해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사도바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위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위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개인주의와 개 교회 주의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과 공동체가, 개개의 교회와 전체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공동체의식입니다.

이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것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나누고 있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의 교회들 안에, 한국교회 전체를 하나의 교회,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눈이 뜨여지길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를 더 이상 나를 위한 교회로 만들어 가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충성하고 헌신하는 하나님을 위한 교회로 만들어가는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우리 안에, 우리 교회 안에, 대한민국의 교회들 안에 일어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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