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위에 세워진 신앙
로마서 8:31-39
로마서를 보면, 1-8장까지의 말씀에서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5: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8:30절 말씀을 보면,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게 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어지는 로마서 8:31-34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4가지 혜택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며 살게 되는 4가지 혜택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성도들이 누리며 사는 네 가지 혜택
첫째는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위하시는 성도들은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사로 비유를 보면, 중병에 걸려서, 아무런 선한 일도 하지 못하고, 구걸하며 살아가던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에 들어가게 되고,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서 부자가 된 것을 즐기며 살았던 어떤 사람은 죽어서 음부 곧 지옥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하나님의 결정이 어떻게 보입니까?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하나님의 결정은 올바르지 않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살아서 부자로 삶을 즐기며 살았던 사람은 멸망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중병에 걸린 몸으로 근근이 구걸하며 살았던 거지 나사로는 낙원에 들어가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낙원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갑니까? 육신을 가지고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낙원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볼 때 나사로는 비록 그 몸에 중한 병을 가지고 있었고 또 거지로 구걸하며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약속해 주신 메시야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낙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자는 열심히 일하고 성실히 일해서 많은 재물을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은 재물로 삶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약속해 주고 있는 메시야를 믿는 믿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음부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두 부류로 구분됩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서 떠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셔서 구원해 주시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지 않으셔서 멸망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느냐? 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고 합니다.
8:31절 말씀에서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의지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으면,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선택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적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며 살게 되는 혜택이 무엇입니까?
둘째는 31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자기 자식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까워하시면서 주시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더 가치 있는 영혼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을 위해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그 무엇을 아까워하시며 주시지 않으시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모에게는 자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데 아낌 없이 씁니다. 그러다 부모는 자신의 미래 삶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여력이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자녀의 장래를 위해 부모로써의 역할도 감당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예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부모의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일까지 있다고 합니까?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의 이름으로, 혹은 부모의 이름으로, 자녀의 이름으로, 고액의 보험을 가입 해 놓고서는, 그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부모를, 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목숨보다 돈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액의 보험금을 받아 내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었겠습니다. 성도들이 할 일은 이 전도된 가치관을 바로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 속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생활은 아주 불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었지만 늘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 다윗이 주변 나라들과의 전쟁을 거의 마쳐갈 즈음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한가롭게 왕궁을 거닐다가, 왕궁의 성벽 아래에 있었던 한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게 되고, 그 일로 인해 결국에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이 그 죄를 회개하고 나오도록 약 1년 가까이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래도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자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 죄를 책망하게 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여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기 위하여 너를 사울 왕의 손에서 구원해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다. 그리고 만약 그것으로 부족할 것 같으며 내가 네게 이것저것 더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네가 어떻게 충성된 부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느냐?’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책망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만일 ‘네게 부족한 것,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내가 이것 저것 다 주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네 충성된 부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아 취했느냐? 라고 그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내 아들까지 내어주었는데 무엇을 주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주셨겠습니까? 너희는 더 이상 ‘욕심내지 말고, 탐내지 말고,’ 너희 삶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기도하며 구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도로 구할 때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린 아기가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면 부모는 다 해 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아빠가 면도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해 보고 싶어서 면도칼을 달라고 하면 줍니까? 면도칼을 주면 사고가 나기 때문에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신다.’라고 하시는 말씀 속에는, ‘네가 달라는 것을 다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봐서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을 다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이 볼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다 주신다.’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며 살게 되는 혜택이 무엇입니까?
셋째는 33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누구도 고발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그 누구도 고발하거나 비난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입니다. 이런 성도들을 고발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사형수가 거룩하신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좌우편에 강도 두 사람이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방이 가당치나 한 일입니까? 사람들이 성도들을 비방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비방이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회개하고 나아와서 낙원을 약속받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며 살게 되는 혜택이 무엇입니까?
넷째는 34절입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성도들을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라고 하시자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람들이 가진 믿음을 보시고 ‘너는 이제 의로운 자다.’라고 인정해 주실 때에, 그 사람 안에서는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변화가 일어난 성도들을, 아담 안에서 죄와 악을 그 본성으로 물려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죄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칭의 선언은 사람의 죄의 성향을 의를 향한 성향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는 죄를 향한 육신의 소욕과 의를 향한 영혼의 소욕이 함께 공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아직 육신에 속하여서 육신을 따라 간혹 죄를 짓기도 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에 계속 거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곧 바로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로운 삶, 거룩한 삶,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늘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성도들을 ‘누가 정죄할 수 있느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성도들을 정죄하지 못하는 이유 두 가지를 말씀해 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도들을 정죄하지 못하는 이유로
그 첫 번째는, 성도들을 위해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시고, 나를 의롭다 해 주시기 위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성도들은, 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여서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런 성도들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도들을 정죄하지 못하는 이유로
두 번째는,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 중재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말씀의 간구는 중재기도를 말합니다.
로마서 8:26절 말씀의 간구도 중재기도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중재기도)하시느니라.’
중보와 중재의 개념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중보’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이 중보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가 하면 ‘중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의 완성인 영생에 이르도록 하나님 앞에서 계속 중재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중재는 두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령님이 우리의 중재자가 되십니다. 그러나 저 하늘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재해 주십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땅에서는 성령님이 우리를 중재해 주시고, 하늘 보좌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중재해 주십니다. 34절은 말씀에서는 이런 성도들을 ‘누가 정죄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을 정죄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2. 사단이 사용하는 도구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8:35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어려움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어려움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위해 사단이 사용하는 도구들입니다.
이 어려움으로 인해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는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을 만나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지 않는 사람들이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사단이 사용하는 구체적인 도구는 어떤 것입니까?
환난입니다.
환난은 고난을 말하되 외적 고난이 아니라 내적인 문제, 마음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환난은 박해라는 상황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박해 상황 속에서 느끼게 되는 마음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신앙이 불법인 북한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내려고 불심 검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앞에서 검문을 받으려고 순번을 기다리고 서 있다면 그 두려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곤고는 외적 상황 즉 환경의 문제를 말합니다.
신앙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박해를 당하는 등등을 곤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곤고한 일을 앞에 두고 겪게 되는 우리의 마음과 감정이 느끼는 두려움을 환난이라고 합니다.
21세기 신앙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감정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때문에 환난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와 고난 앞에서도 평안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굶주린 짐승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콜타르를 칠한 채 십자가에 달려 인간 횃불이 되기도 하고,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기름에 튀겨지기도 하고, 격투를 통해 검투사들에게 죽기도 하고, 사지가 짐승처럼 찢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성도들을 원형경기장 안에 가두어 놓고 굶주린 사자를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로마 시민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경기장에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으르렁대면서 다가오는 사자들을 피해 한쪽에 몰리게 됩니다.
그때 한 소녀가 사자를 뒤로하고 돌아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바다보다 깊다.’ 그러자 한 사람 두 사람 이찬양을 따라 하기 시작합니다. 사자들의 표효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원형경기장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로마 시민들은 긴장을 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주목합니다.
그때 사자는 가장 바깥에 있는 성도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앞에 있는 성도들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힘을 주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영혼을 그 육체의 한계에서 놓여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담담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멘.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던 성도들이 평안하게 죽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육체의 한계에서 그 성도를 놓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의 죽음과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성도들은 죽을 때 모두 다 천사의 모습을 하고 평안하게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혜로 평안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육체를 이겨내고, 그 감정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성경을 통해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태복음 10:18-20절입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빠져들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잠기게 되면, 그 어떤 고난도 환난도 박해도 우리를 사랑하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끌어내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20:22-24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곤고입니다.
환난이 내적인 마음의 문제, 마음의 두려움을 말한다면 곤고는 좁은 문과 좁을 길과 같은 외부적인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등산을 해 보면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 사이로 난 길이 아주 좁거나 아니면 바위 사이에 난 구멍을 지나가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이 곤고는 곤궁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곤궁은 좁은 독방에 갇힌 것을 말하는데, 감옥의 독방 중 좁은 곳은 겨우 한 사람이 서 있을 정도로 좁은 감옥도 있습니다. 그러면 죄수는 움직일 수도, 앉을 수도 없습니다. 이때 죄수는 얼마나 앉고 싶겠습니까? 이렇게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곤궁이라고 합니다.
순교 사화를 보면 줄리안이라는 소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당국자들은 아무리 해도 이 줄리안이 신앙을 버리지 않자, 독사와 각종 뱀을 가득히 넣어둔 가방에 줄리안을 산채로 넣고 잠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다에 던져 죽였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35-38절입니다.
‘어떤 이들은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곤궁한 삶을 살았던 신자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었습니다.
핍박입니다.
핍박은 사냥 군이 사냥감을 추적하듯이 그렇게 추적당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냥 군들은 사냥개를 풀어놓고 토끼나 고라니를 추적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믿음 때문에 사냥 군에게서 도망치는 짐승들처럼 그렇게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기근, 적신, 위험, 칼 등등도 다 신앙 때문에 당하였던 어려움들을 말합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 고백이 바로 36절입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한 고백은, 그 어떤 어려움도 바울을,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해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바울은 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해 오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원수였을 뿐 아니라 복음의 훼방자였습니다. 이런 바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을 사랑해 주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바울은 이후 그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일에 충성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전도자의 삶에 헌신했던 바울은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과 같은 장애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자신을 끊어낼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38절을 말씀을 보면 ‘내가 확신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확신한다고 하고 있습니까?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바울 자신을 ‘우리 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말씀을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에게서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의 중심적인 내용은 사랑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죄인들의 사랑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해 주신 사랑이고, 그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죄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고백하는 사랑의 고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세워진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기독교는 어떤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첫째,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서 시작되는 신앙입니다.
둘째, 나의 삶에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성장해 가는 신앙입니다.
셋째,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신앙입니다.
이렇게 사랑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말씀 보고, 충성하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전쟁의 폐허더미 위에서 절규하던 하박국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사랑을 알고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동일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은 무엇이라 외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으리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에게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런 삶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생활은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시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가 시켜서 주일을 지키고, 또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가의 강요함을 받아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강요나 의무감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참된 섬김은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우리의 거듭난 영이 기쁘게,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거듭난 내 영 안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 신앙의 바로미터는 사랑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교회는 유명한 목회자들이 많이 사역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가진 믿음이 아주 대단하였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책망을 들었을 정도로 사랑이 부족했던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쓴 에베소서를 보면 에베소 교회를 위해 두 번 기도한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1장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이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사도 요한은 또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에베소 교회에 보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촛대는 교회를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로 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신앙의 길에서 실패하고 넘어진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비록 네가 실수하고 넘어졌어도 그 신앙이 완전히 파선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 신앙은 거기서 끝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끝까지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적도 사랑하는 삶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또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그 사랑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또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어떤 어려움과 유혹이 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 누구보다 큰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 또한 그 누구보다 더 큰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신앙의 성공과 실패가 갈라집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똑같이 실수하고 넘어졌습니다. 그 차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느냐? 업었느냐? 의 차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었던 베드로는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던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높고, 깊고, 넓고, 크신 사랑을 경험할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나오게 됩니다. 이 사랑이 두려움에서, 고난당하는 삶에서, 박해자들을 피해 살아가야 하는 핍박에서 우리들을 지켜 줍니다. 우리에게 이 사랑이 있다면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으리라.’ 이 사랑의 고백이 우리가 하며 살아가는 고백이 될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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