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디모데 후서 4:6-8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말 중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왜 이 말을 했겠습니까? 소크라테스가 볼 때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사람에게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한 여성이 중병에 걸려서, 의식을 잃고, 한동안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한 말에 의하면, 그녀는 그 당시 이 세상과 저세상의 경계선상에서 방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자신이 마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위에 누가 있는가 보려고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고, 하나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온화하면서도 근엄한 목소리로 ‘너는 누구냐?’라는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주로 어디에 근거하여 생각합니까? 가족과 연관 지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저는 쿠퍼 시장의 부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는 네 남편이 누구냐?’라고 묻지 않았다. 라고 하시면서, 다소 더 엄숙해진 목소리로 ‘너는 누구냐?’라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니와 피터의 어미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나는 네가 누구의 어미냐고 묻지 않았다.’라고 하시면서 또다시 ‘너는 누구냐?’라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족 다음으로 자신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속에서는 자신이 하며 사는 일이며, 믿음 안에서도 그 가진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저는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또 다시 ‘나는 너의 직업이 무엇이냐?’라고 묻지 않았다.’라고 하시면서 다시 ‘너는 누구냐?’라고 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나는 네가 믿고 있는 종교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라고 하시면서, 가족과 직업과 종교 같은 것을 다 떠나서 ‘너는 너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철저히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대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해서 그런지 이 여인은 다시 세상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중병도 다 나아서 퇴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을 한 이후 이 여인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이제까지 자신과 가족만 바라보며 한평생을 교사로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 채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참된 기쁨이 있는데, 먼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다음에는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너는 누구냐?’라는 이 질문이 너무나도 어렵고 고상한 질문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삶 속에 나를 가두어 놓고, 이 여인처럼 온갖 타이틀만 더덕더덕 갖다 붙인 채, 아직까지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을 향해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그 자동차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동차와 관련이 없는 원숭이나 고양이나 개의 입장에서 자동차를 보고 대답을 하게 되면 자동차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냐?’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바른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강요를 읽어보면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제1장 1문에서는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2문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볼 수 있으며,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세우게 되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죄인으로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던 이사야가 깨달았던 자기 이해이고, 또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졌다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던 베드로가 깨달았던 자기 이해였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도다.’(사6:5)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세우게 되면 공통 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것과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은혜의 출발입니다.
이 세상에는 내가 죄인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들도 있고,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쓸 데 있듯이......나는 자신이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들을 불러서 구원하려고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은 후에, 그 지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아담을 찾아가셔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줄 것’이라는 복음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성육신하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죄인들을 향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사람의 뜻이나 혈통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요 1: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신성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온갖 비난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찔림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합니다. 징계를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합니다.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고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죽어주신 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첫째,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나는 죄인이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사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 사랑에 비유하여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정말 위대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고귀한 사랑이 있다면 아마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1995년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舊 소련 연방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서, 약 55,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때에 어머니 ‘수산나’와, 그 딸 ‘구이안’(Guian)은 무너진 건물더미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녀는 추운 겨울에,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작은 공간에 갇힌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 두 모녀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무서워서 “엄마, 나 무서워” “엄마, 우리 여기서 못 나가는 거야?”라고 하며 자꾸 울었습니다.
엄마는 그런 딸에게 “아니야, 걱정하지 마라. 조금만 기다리면 아저씨들이 우리를 금방 찾으러 올 거야” 그러자 그 딸은 엄마에게 “만약에 아저씨들이 우리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해? 엄마,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못 나가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죽는 거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딸을 향해, 엄마는 계속해서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구조의 손길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날 때까지도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사흘이 지나자, 공포와 허기에 아이는 점점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엄마를 찾으면서 먹을 것과 물을 달라고 울며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아이도 엄마도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그 생명의 불꽃이 가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엄마의 손에 무엇인가 예리한 것이 잡혔습니다. 그것은 건물이 무너질 때 깨어진 유리 조각이었습니다. 엄마는 그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을 마셔라.”라고 하면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를 마시도록 했습니다. 당시 의식이 가물거리고 있었던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엄마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받아 마시므로 갈 한 목을 축이고 의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흘러가서 마침내 구조대가 이 두 모녀가 갇혀 있는 곳을 지나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건물 더미들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울고 있는 한 여자아이와 그 옆에 모든 물과 피를 다 흘려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엄마를 찾아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없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 이상한 과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는 모성애가 큰가 부성애가 큰가를 시험해 보려고 쇠로 만든 방 안에 어미와 새끼 원숭이를 넣어두고 그 바닥에 불을 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그 방문을 열어보니, 어미는 뜨거운 방바닥에 누워 죽어 있었고 그 새끼 원숭이는 어미의 몸 위에 앉아서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같은 방 안에 아빠와 새끼 원숭이를 넣어두고 그 바닥에 불을 때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방문을 열어보니 새끼는 뜨거운 방바닥에 누워 죽어 있었고 아빠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 위에 앉아서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모성애와 부성애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도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세상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하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어머니의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저와 여러분과 같이 택한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이 놀라운 사랑을 가지셨던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신성을 부인하시고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우리 대신 물과 피를 아낌없이 다 쏟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죄인인 내가 달려 죽어야 할 그 십자가에 내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찔려야 할 그 창에 내 대신 찔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아야 그 채찍을 내 대신 맞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해야 할 그 멸시와 천대를 내 대신 다 받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내 대신 물과 피를 다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큰 사랑으로 사랑해 주신 ‘나는 누구라는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보통 죄인이 아닙니다. 나는 십자가에 나타난 그 놀라운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만든 세상을 보아라. 내가 창조한 저 우주를 보아라. 이 모든 피조 세계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한다.’ ‘나는 내가 만든 온 천하 만물보다 너 한 사람을 더 귀하에 여기고 사랑하고 있단다.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하여 내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었고, 너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이다.’ ‘이 십자가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라고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견디지 못해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던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 하였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또 나는 누구입니까?
둘째, 나는 이미 천국 시민으로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20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러면 천국 시민으로 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고 있는 천국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빌립보서 3: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십자가의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빌립보서 3: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천국 시민인 우리는 ‘그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70-80년, 길면 100년을 살다가 끝나게 될 이 세상 나라 백성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마치 여행자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여행자의 중요한 특징은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행자는 먹고, 입고, 잠잘 곳만 있으면 충분하게 생각합니다. 소유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 무엇인가를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여행자가 아닙니다.
또 우리는 영혼 구원의 사명을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한 영혼이라도 구원해 내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노력과 내가 할 수 있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명 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천국 시민인 우리는 ‘그 관심 분야’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성취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천국 시민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과 그 나라와 하나님이 주신 뜻에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하셨습니다. 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D.L. 무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원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영원하지 않은 것은 무용지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마치 배설물처럼 버렸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모든 관심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에 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또 천국 시민인 우리는 ‘그 살아가는 삶’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24~26절 말씀을 보면 모세는 천국의 시민으로 장차 받을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에, 세상의 지위와 영광, 세상의 쾌락과 보화를 다 포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모세와 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천국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상충 될 때, 천국을 선택하고 세상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 천국 시민입니다. 천국 시민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 삶이 남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위해서 세상에서 당하며 사는 고난도 희생도 기쁘게 감내해 내게 됩니다.
또 천국 시민인 우리는 ‘그 마음과 하며 사는 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영의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데 그 결과는 생명과 평강”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육의 사람은 육의 일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데 그 결과는 파멸과 죽음”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천국 시민들은 벌써 그 마음이 다르고, 그 하면 사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 시민들은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또 천국 시민인 우리는 ‘보화를 쌓아두는 곳’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이라면 100년 남짓 살아가는 이 세상, 임시 거주지와 같은 세상 생활에 집착하거나 애착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차 유업으로 받게 될 천국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의 나라에 보화를 쌓아가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천국 시민으로 산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둘째로, 나는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날을 꿈꾸며 사는 천국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을 보면 천국 시민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결국 영화로운 하늘 백성으로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미래적인 완성을 믿음으로 내다보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로써 천국에서 이루어질 최종적인 완성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우리의 이 비천한 몸이 변하여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차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를 천국 시민으로 받아 주실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을 날을 내다보며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나는 누구입니까?
셋째, 나는 천국 시민으로 오늘도 믿음의 경주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4:18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인생의 최후를 준비하던 때 기록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믿음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전해 준 유언서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디모데후서를 ‘바울의 유언장’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종 바울의 고별사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디모데후서 4장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인 색채가 짙은 본문입니다.
순교를 앞두고 있었던 바울은 자신의 일생을 운동선수에 비유하기 좋아했습니다.
바울은 운동선수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나는 ‘싸웠고’, ‘마쳤고’, ‘지켰다’라는 세 마디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의 생애는 ‘선한 싸움을 싸워온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평생을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싸웠다’라는 이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는, 고대의 여러 운동 경기 중에 특별히 ‘레슬링이나 씨름 경기’에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당시 레슬링 혹은 씨름 경기는 사실 목숨을 건 싸움이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링 밖으로 완전히 밀려나거나 링 위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경기였습니다.
실제로 바울의 삶이 이렇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 참으로 고통스러운 싸움을 했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돌에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파선된 배에서 죽을 고비도 넘기는’ 등등,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겪으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들을 설립하고, 성도들을 세우고,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더 견고하고 더 강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결론은 그 모든 싸움에서 사도 바울이 링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싸우고 있는 이 싸움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인생을 걸고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고 있는 이 싸움이 믿음의 선한 싸움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먹고 살기 위한 싸움,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싸우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싸움은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싸우는 믿음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분명한 자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해 주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또 바울은 ‘열심히 달리기를 마친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치고’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는, 고대의 여러 운동 경기 중에 특별히 ‘마라톤 경기’에 비유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라톤 선수가 42.195km를 끝까지 완주해서 면류관을 쓰는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의 삶, 복음 전도자의 삶을 완주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달려온 이 신앙 경주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핍박과 박해, 굶주림과 목마름, 감옥 생활과 유대인들의 중상모략’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장애 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애물 앞에서도 바울은 신앙 경주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 푯대를 바라보며 그 달리기를 완주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은 위대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영웅적으로 화려하게 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한 발 한 발을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충성스럽게 살아가겠다.”라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삶에 때로는 ‘낙심 거리와 시험 거리가 찾아오고, 환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결코 중단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달려가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울처럼 그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신앙의 완주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온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킬 것을 꼭 지키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리와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런 신앙 자세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먼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친구가 되어 주시고, 생명이 되어 주시고,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부활해 주시고, 나의 구주 나의 왕 나의 임금이 되어 주셨다는데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바울은, 자격 없는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은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평생을 다 바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평생을 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살아갈 때 어떤 사람들은 바벨론 사회에 동화되어 살았고, 어떤 사람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들이 결국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시온의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는 망하였고, 전쟁포로가 되어서 노예와 같은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럴 때 믿음을 지키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다가 혹 내가 죽게 되면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생명을 건 각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낸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 안에 자신을 굳게 세우고, 자신이 받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나의 목숨까지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각오와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켜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믿음을 바로 지켜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어서 절박하게 예수님을 부르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더 많은 소득을 얻고 그 소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부요와 풍요의 삶이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 길을 가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팎으로 수많은 장애물 들이 놓여 있어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지 못하도록 그 길을 가로막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의 목숨까지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던 사도 바울과 같은 각오와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각오와 결단이 있으면 우리들도 이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바울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난 데마와, 갈라디아로 간 그레스게, 그리고 달마디아로 가버린 디도 같은 사람들입니다(10절). 심지어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큰 해를 끼쳐서 바울이 주님께서 대신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들도 한 때는 바울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예수를 잘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자기들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자, 예수를 믿는 믿음과 동역자 바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중단하고, 믿음으로 달려갈 길을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기권한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의 지조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을 팔았던 가롯 유다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 어디에 속하여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끝까지 지켰더니, 그런 나에게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의의 면류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바울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신앙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고, 믿음의 지조를 지켜 낸 모든 사람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에 예비해 놓으신 이런 상급을 받아 누리는 주인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세 가지 단어로 요약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싸우고’ ‘마치고’ ‘지켰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 가지 단어를 꼭 기억하시고 바울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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