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존귀한 하나님 나라 일군들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9. 8. 15:16

존귀한 하나님 나라 일군들

디모데후서 4:9-18

 

1. 바울의 회심

 

사도바울은 아주 특이한 케이스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예수 믿는 과정을 보면, 어떤 사람은 질병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던 사업의 실패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 믿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이 베푸어 주는 사랑 때문에 등등 다양한 이유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다가 강권 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바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던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직접적으로나 혹은 간접적으로 바울에게 박해받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 대한 반감도 컸고, 일부 사람들은 바울이 거짓된 회심으로 숨은 성도들을 찾아 잡아가려고 연극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동네에 예수 믿기 전에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니, 동네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몹쓸 짓을 많이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전에는 동네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만 주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며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하고, 나중에 신학 공부를 한 후 목사가 되어서 그 고향 땅에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해도 그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가서도 사람들은 작심하고 예수 믿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한 동역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만한 영성과 인격을 가진 다른 사람이, 이 동네에 와서 목회했다면 아마 큰 교회를 이루었을 텐데라고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이 사람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는 열심으로 유대교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유대교 신앙을 대적하고 유대교의 전통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선봉장을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에 바울에게 핍박을 받았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교를 배반했다고 하면서,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켜고 따라다녔습니다.

 

이런 교회 안. 밖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3년 동안 아라비아로 갔던 이유입니다.

 

2. 아라비아와 다소 전도

 

이렇게 해서 바울은 홀로 아라비아 땅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아라비아 사역을 주목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예수 믿기 이전의 바울과 예수 믿고 난 이후의 바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를 만날 수 있도록 만남을 주선해 주게 됩니다.

 

이 만남이 바울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만남을 통해 자신의 회심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이 만남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근간에 떠도는 바울에 대한 루머 즉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회심을 가장하고 있다는 루머의 진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은 바울이 진짜 회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사역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달랐습니다. 전에 바울에게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 바울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반감이 너무나도 컸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변절자 바울을 향한 유대인들의 적의 또한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바울의 회심을 확인하고서도,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바울에게 이런 권고를 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예루살렘 성도들의 시선이 곱지 않고, 또 유대 당국자들의 적의 또한 크니, 당신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서 활동하지 말고, 다시 전에 사역하던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의 고향 다소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함을 좋게 받아들여서, 이후 자기가 태어난 고향인 다소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3. 안디옥에서의 목회 사역과 전도 여행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을 때 흩어진 평신도들에 의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그 교회 책임자로 바나바를 파송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예루살렘 교회 평신도들이 박해를 피해 안디옥으로 가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담임목사였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 혼자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여기저기에서 자신과 동역할 일군들을 여러 명 청빙 해서 왔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과 가까운 다소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던 바울도 청빙해 오게 됩니다. 사도행전 13:1절입니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는 계속 부흥하고 있었기에 더 많은 사역자일군들이 필요했습니다.

안디옥 교회 사역자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 하나님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 담임 목회자였던 바나바와 교회의 핵심적인 일군이었던 바울을 선교사로 보내는 것은 안디옥 교회로서는 너무나도 큰 손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에는 선교 사역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가 파송하여 보낸 첫 번째 교회 개척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안디옥 교회가 자기 교회만 생각했더라면 이런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기 교회보다 하나님하나님 나라의 일을 우선 적으로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교회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이 선교사 파송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안디옥 교회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디옥 교회는 사람이 주인인 교회가 아니고,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이 주인인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요구하시는 대로 바나바와 바울을 교회 개척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이후 선교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의 교회 개척 사역은 세 차례 선교여행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이 세 차례 선교여행을 통해 소아시아그리스 지역에 많은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이일은 안디옥 교회와 다수의 동역 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그 사역에 동역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로마서 16장은 이런 기록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중에 집에 가서 로마서 16장을 한 번 정독하며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역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과 복음에 헌신했던 그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 지게 되실 것입니다.

 

4. 바울의 로마 감옥생활

 

바울은 세 차례의 전도 여행으로 소아시아그리스 지역에 많은 교회가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바울뿐 아니라 다른 전도자들도 나름대로 교회를 세워왔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에는 어느 정도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스페인영국을 선교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스페인과 영국은 안디옥 교회를 선교기지로 삼고 선교하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교본부를 로마로 옮겨 로마 교회의 후원을 받아서 스페인과 영국에 선교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보낸 편지가 바로 로마서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 다섯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가이샤라에서 약 2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2년 후에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의 시도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가이사 앞에 가서 재판받기를 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압송되어 갑니다.

 

로마로 간 후 오랫동안 재판을 기다리는 미결수로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활동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로마의 상류층과 로마 황실인 가이사의 집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재판이 늦어지자 바울은 가석방 처분을 받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풀려나 로마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그 개척한 교회도 돌아보고 복음도 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로마에 대 화제가 일어났습니다. 네로는 그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씌워서 대대적인 박해를 하게 됩니다. 이때 사도들과 성도들이 많이 순교하게 되고, 바울도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디모데후서는 이때 쓴 서신입니다.

이때는 처음 가택연금 상태로 있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전에는 아직 미결수로 있었던 시기여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갇혀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디모데후서 4:1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당시 바울은 가이사의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에 서서 바울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바울을 변호해 주기 위하여 나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두 다 자기의 안일을 생각하여 나서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때 바울과 함께 있으면 바울이 형벌을 받을 때 자신도 같은 형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울과 함께하던 동역자들도 하나둘 바울 곁을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누가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바울과 함께 있어봤자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까?

10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만약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데마에 대해서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하지 않고, 데마는 데살로니가 교회 사역 때문에 바울을 떠나갔으며라고 기록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바울의 곁에 있다가는 그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죽는 것보다 더 살아 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곁에 함께 남아 있고 싶지만, 데살로나가 교회에 가서 사역해야 한다고 하며 바울을 떠나갔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데마는 데살로니가 교회 사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울을 떠나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영감하여 주신 성경에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의도와 마음의 숨은 동기까지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데마가 바울을 떠난 숨은 의도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떠나간 것은 사역을 위해 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을 사랑해서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어떤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고, 의사가 이제 생애를 정리하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두 가지 경우를 보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즉시 짐을 챙겨서 하나님께 금식 기도하기 위하여 기도원으로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목숨을 걸고 금식 기도하면서 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며 매달릴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이제까지 자신의 삶에 함께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이 병까지도 섭리로 주관하고 계신다고 믿고, 그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사람 중에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생사를 걸고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께 그 응답을 받아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이 세상을 목적하며 산 사람이며, 누가 하늘나라를 목적하며 산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 금식하고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낸 사람이 큰 믿음을 가진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바꾸어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이 금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의 삶 때문입니까? 이 세상에서의 삶에 그 목적을 두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살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금식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누가 좀 더 빨리 죽고, 누가 좀 더 늦게 죽는 것의 차이뿐입니다. 이 사람이 이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를 목적하며 산 사람이라면 건강을 위해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늘나라를 그 목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순교자들과 같이 그 죽음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입니다. 이들은 신상을 숭배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이런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들의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욥도 하였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여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 믿음을 하박국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찬송가 94을 보면 믿음으로 이런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아.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 찬송은 세상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사는 부귀, 명예,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를 수 없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만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은 하나님의 섭리 적인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내가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겠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부르며 살 수 있는 찬송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하늘을 목적하며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불치의 병에 걸린 것을 알고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살려주시기를 바란 사람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인정하고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산 사람이겠습니까? 이 두 사람 중에 누구의 믿음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이겠습니까?

 

우리가 겉모습만 보면 데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기려고 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은밀한 우리 마음의 동기를 다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달랐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또 다른 동역자였던 그리스게 갈라디아로 갔다고 합니다.

바울의 또 다른 동역자였던 디도달마디아로 갔다고 합니다. 이들이 왜 바울을 떠났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아마 이들도 데마와 같은 마음으로 바울 곁을 떠나갔을 것입니다.

 

바울 곁에 있던 많은 동역 자들이 이렇게 하나 둘 떠나갈 때 끝까지 바울 곁에 남아 있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11절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누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울의 주치의로서 일평생 바울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이 누가는 끝까지 바울을 떠나지 않고 로마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바울의 곁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 충성된 동역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누가를 존귀하게 보시고, 이 누가에게 성령으로 영감을 주셔서 누가복음사도행전을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가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믿었던 2세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누가에게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과 함께했던 다른 동역 자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세상에서의 더 나은 삶을 목적하며, 바울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자기의 꿈과 계획과 생사까지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바울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누가를 보면 무인불승, 유인필승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 말은 인내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고, 인내가 있으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요한 두 기둥은 믿음과 기도입니다.

믿음과 기도라는 두 기둥을 세운 성도들이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바로 겸손히 인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히 인내하는 사람들을 높여주십니다. 인내하는 삶이 없이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가 바로 그렇게 믿음으로 인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무인불승, 유인필승이란 말과 같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게 되든지, 믿음으로 인내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9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지금 바울의 곁에는 누가 한 사람만 있습니다.

지금 바울에게는 그 마음을 잘 알고 따랐던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로마로 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당시 바울이 개척한 에베소 교회 담임 목사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로부터 로마로 와서 나를 좀 도와달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요청에 응답하여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에베소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디모데는 아주 보람 있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사역을 위해 에베소 교회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의 마지막 삶의 길에 함께하기 위해서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가는 것입니다.

 

이 일은, 바울 곁에 있다가 바울을 떠나간 사람들의 삶과는 아주 대조적인 삶입니다.

디모데에게 이 결정이 쉬웠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디모데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디모데의 아내라면 남편에게 무엇이라고 말해 주겠습니까? 가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디모데는 자신의 믿음의 아버지와 같았던 바울의 요청에 응하여 로마로 갔습니다.

이를 통해 디모데는 자신이 바울의 진정한 믿음의 동역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디모데와 같이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함께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동역자가 아니겠습니까?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지만 어려움은 나누면 반감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누가와 같은 동역자, 디모데와 같은 동역 자가 있었기에 행복하게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신앙생활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디모데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교회 개척자가 되고 행복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은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 마음 안에 행복이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가와 디모데와 같은 헌신자를 귀하게 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주를 위해, 주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을 귀하게 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1절을 다시 봅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은 디모데가 로마로 올 때에 요한 마가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진정한 동역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좋을 때뿐 아니라 어려울 때 함께 하여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마가가 누구입니까?

마가는 예수님이 다락방을 빌려서 최후의 만찬을 했던 부유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집은 후에 예수님 제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더구나 이 마가는 초대교회의 유명한 목회자였던 바나바의 생질이었습니다. 마가는 부유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모님과 삼촌 바나바에게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입니다.

 

마가는 나중에는 바나바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의 동행자가 됩니다.

당시 선교여행을 다닌 지역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튀르키예의 고산준령을 넘고 넘으며 다녀야 했던 길이었습니다. 이 힘든 선교여행을 하였지만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부자 집에서 태어나 고생하지 않고 자란 마가에게는 아주 힘든 선교여행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전도의 열매로 별로 없었습니다. 마가는 열매도 없는 힘든 선교여행에 지치고 실망하고 흥미를 잃어서, 중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마가의 돌출 행동은 선교팀의 사기를 확 꺾어 놓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마가는 하나님의 일에 별로 쓸모가 없는 청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바나바가 자기 조카인 마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나는 마가와는 같이 선교여행을 할 수 없다고 하며 거부하였습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투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전도팀을 꾸려서 선교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이 마가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네가 로마로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요한 마가는 나중에 회개하고 새로운 전도자로 거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실한 복음 전도자로 변화된 마가는 나중에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면서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 그를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마가를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과거에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별로 쓸모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잘못한 일들이 있을지라도 과거를 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과거에 나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회개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면, 과거는 다 잊어주시고 믿음으로 그 사람을 받아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비록 과거에는 실패자였고 가치 없는 삶을 살았더라도, 이제는 가치가 있는 사람, 하나님의 일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에 마가는 별로 유익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마가에게 임하자 그도 변화되어서 교회와 바울의 선교사역에 유익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기쁨과 감격을 주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순종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큰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가 그랬습니다.

전에는 그의 경솔한 행동으로 바울과 그 전도 팀의 사기를 꺾어 놓고, 바울의 교회 개척 사역에 별 유익을 주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이제는 바울과 바울의 선교사역에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마가에게 주셨던 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서 받는 성도들이 됩시다.

그리고 실패자가 성공자로 변하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가 되게 하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모두 다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동역자 중에는 바울을 대적하여 많은 피해를 준 사람도 있습니다.

14절입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로마 법정에서 바울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여서, 바울이 정죄 받아 순교하게 되는데 일조를 한 사람입니다.

 

이런 거짓 선동의 최초 사건이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뱀의 배후에서 거짓 선동으로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마태복음 4을 보면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도 유혹했다고 합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곳곳에 거짓으로 유혹하는 손길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흰 말로 상징되는 첫 번째 인 재앙의 시대, 미혹의 시대에 이미 들어선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거짓 증언을 하고, 거짓으로 선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선동을 일삼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광우병 의혹, 생태탕 의혹, 청담동 술집 의혹, 후쿠시마 오염수 의혹, 계엄령 의혹등등 실체도 없는 각종 의혹들을 제기함으로 자기 목적을 이루고, 자기 이득을 취하려고 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참과 거짓, 진리와 불의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불의와 죄악을 거부하고 의와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사람,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거짓말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믿음의 아들이며 복음의 동역자였던 디모데에게, 거짓된 증언으로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힌 사람들을 너도 주의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가더라도, 예수 믿는 우리들은 이런 사람들의 거짓된 미혹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사람, 이렇게 선동하고 미혹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주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에게 행한 악한 일에 대해서 반드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한 행위나, 성도들이 주의 종들에게 한 행위를 반드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작정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대적할 때, 나는 그 사람과 맞대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판단과 평가를 맡기고, 하나님이 직접 나서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면서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해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도 이런 복 주시기를 구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하실 정도로 사랑해 주신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우리를 대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우리를 대적하며 거짓으로 선동하고 비방하고 대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믿는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준 것까지도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예수 믿는 성도들을 거짓으로 모함하고 적대시하고 대적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신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에, 우리 스스로가 악한 자를 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시는지, 우리는 조용히 그 결과만 지켜보면 됩니다.

 

이 세상은 다투고 선동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투쟁하며, 그 목적성취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사용하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특히 무신론자들인 공산당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이런 선동과 투쟁에 아주 능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화평을 통해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분쟁은 마귀의 방법이고 화평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그는 법정에서 바울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여 바울을 어려움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거짓된 말로 선동하고 비방함을 통해, 당장은 그 목적을 이루고 성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악 간에 판단하시는 그날이 오면, 그가 행한 거짓됨과 악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5. 신실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은 선한 사람은 그 선한 대로 선한 일에 사용하시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대로 악한 일에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사용되어야 하겠습니까? 선한 일을 이루어 가는 선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적으로는 어리석어 보여도 신실한 사역자를 사용하십니다.

디모데나 마가나 누가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꽉 막힌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요령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는 기독교는 불법적인 종교로 여겨졌던 시대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 때문에 재판을 받고 형 집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 바울과 함께 있으면 그 장래가 뻔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동역자들은 이것을 미리 알고 일찌감치 바울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런 바울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 담임 목사직까지 내려놓고 마가까지 데리고 바울에게로 왔다고 합니다.

 

이런 누가는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어리석어 보이는 누가를 귀하게 보시고, 성령으로 영감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주는 일군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누가는 오늘날 우리가 애독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기록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도 어리석은 길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하여 정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심을 통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이 방법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지혜로운 방법으로 보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도 어리석은 방법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을 떠나 다른 사역 지로 갔던 데마그리스게 디도가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 길을 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지혜로웠던 사람들을 인정해 주지 않으시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난받았던 바울을, 믿음으로 고난 받기를 자처했던 누가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까? 16절입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이 말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저주하고 비난하고 욕하던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드리신 기도와 같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유대인이 던진 돌에 맞아 죽어 가던 스데반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와 같지 않습니까?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 죽이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또 바울의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훈 즉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라는 말을 생각나게 해 주지 않습니까?

 

바울은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첫째, 바울은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이는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부인되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 무슨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에게는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17-18절입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지혜롭게 살아남아서, 자기 사역의 진보와 그 활동 영역의 확장을 위해 바울을 떠나갔던 사람들과 함께해 주시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삶을 살기로 결정한 바울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이분이 우리가 믿고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주를 위해 고난받는 삶을 자청했던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데마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존귀한 하나님 나라 일군들처럼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존귀한 일군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포기한 것보다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때가 되면 저와 여러분을 반드시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높여주시는 형태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반드시 높여주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높여주시는 보상을 주시지 못하시면, 하나님은 천년왕국에서 갚아주시든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에 상응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든지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 삶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바울을 높여주시고, 누가를 높여주시고, 마가를 높여주시고, 디모데를 높여주신 것 같이, 우리들도 반드시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런 날이 우리들의 삶에도 오게 될 그날까지,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믿고 섬기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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