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삶
로마서 6:1-5
오늘은 로마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로마서의 중심적인 내용을 크게 나누어 보면, 먼저는 죄인을 향한 정죄가 나오고 있고, 그다음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칭의가 이어지고 있고, 그다음에는 의롭다칭함을 받은 사람들이 이루어가야 할 성화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로마서 6장은 성화의 부분을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삶을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란? 우리의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고 성스럽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삶을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합니까?
1900년대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 마을에는 신임 관리가 부임하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주 정직한 삶을 살아서, 그런 고을에서는 개인적인 치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지방 관리가 되려고 하면 돈을 많이 써야 했습니다.
그 쓴 돈을 관리로 있는 동안 다 뽑아내고 한밑천을 잡아 나와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문 기사는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불과 수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진 신앙만은 진실하고 대단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1980-90년대 한국교회 성장기에는 성도의 숫자가 1,20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많이 줄어서 약 800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정직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부정부패가 발붙일 수 없을 정도로 청렴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이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가리켜 부패 공화국이라고 합니다. 너무 부패해서 그것을 다 들추어내면 나라가 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알아도 들추어내지 말고, 그대로 덮어주자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점점 더 타락해 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 따로 생활 따로인 신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는 그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과 축복, 병 고침과 각종 은사 받음을 많이 강조해 왔습니다. 그에 비해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의 삶은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이후에나 별반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성경은 언제나 먼저는 믿음에 대해 말씀한 후에, 그다음에는 반드시 믿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는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고,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유대인들에게서 이방교회로 넘어갔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으며, 12장에서 16장까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아주 소상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로마서 6장은, 믿음을 말씀하고 있는 부분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도 함께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성도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까?
첫째, 칭의를 믿는 믿음이 거룩한 삶의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칭의가 거룩한 삶의 출발점임을 로마서 6장에서는 대표성과 연대성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대표성의 원리에 의해, 우리의 대표자인 아담이 범죄 하여 죄인이 되자,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표성의 원리에 의해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연대성의 원리에 의해 받게 된다고 합니다. 연대성의 원리에 의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대 됨으로 구원을 받게 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담과 연대 되어 있어서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 나의 죄를 지시고,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신 예수님이, 나를 의롭다 해 주시기 위하여 3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시고, 의롭다 인정해 주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의 생명, 부활의 생명을 덧입고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그 존재가 바뀌고 신분이 바뀐 사람이 됩니다.
전에는 죄의 종으로 죄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의의 종으로 예수님을 따라 의의 열매, 거룩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아직도 범죄한 아담과 연대하고 있어서, 죄를 범하며 살 수는 있으나 선을 행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도 선을 행하며 살려고 시도는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아직도 아담 안에서 죄의 종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며 살아갈 자유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삶을 보고 존경했던 성철 스님은 누구 안에 있었습니까?
구원의 길을 찾아보려고 구도자의 길을 걸었던 석가모니는 누구 안에 있었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으로서 바른 삶인가를 고민하며 살았던 공자는 누구 안에 있었습니까?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그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의를 이루고 선을 이루는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라도 아담과 연대 되어, 죄인으로 살고 있는 한, 죄의 열매만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선을 행할 수 있고,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죄의 종이 된 사람이, 그래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선을 행하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맺으며 사는 그 모든 열매는 선이 아니라 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인으로 죄의 열매만 맺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수해 의연금 낼 때를 보십시오.
수해를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냥 수해 의연금을 보내주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집에서 그 먼 방송국까지 나가서,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내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합니까? 이것은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죄성 때문에 이렇게 합니다.
우리가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고 하는 부모의 사랑도 보십시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 사랑과 희생이 얼마나 숭고한지, 사람들은 이 부모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라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의 사랑도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는 제한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합니다.
사람들의 선행을 관찰해보면, 선을 행하는 그 행동 속에도 악한 동기가 숨겨져 있고, 이기심과 명예욕, 성취욕과 자기 자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신앙 안으로 이루어졌던 바리새인들의 행위에서도 성경은 위선의 죄를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종교적인 신앙심, 종교적인 열심에까지 죄가 역사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선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 들만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힘입어 성령의 능력으로 살기 때문에 선을 행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칭의가 바로 거룩한 삶 즉 성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까?
둘째, 자신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칭해 주셨는데도, 여전히 ‘나는 죄인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 주심으로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확신이 꼭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죄를 범하게 되어도 믿음을 떠나지 않고, 그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이런 성도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찬송가가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찬송입니다.
1절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 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2절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 죽을 죄인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 한없네.
3절 나 예수 의지함으로 큰 권능 받아서 주님께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후렴)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 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그 지은 죄를 회개하고 죄로부터 구원을 갈망하는 은혜도 있고, 또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과 죄와 마귀를 이기고 살아가게 해 주는 은혜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은혜는 누리며 살게 됩니까?
우리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가 되었음을 믿게 될 때입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바로 10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찌어다."
“여기다”라는 이 단어가 4:5절에서는 “의로 여기다”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에 의해 의로 여김을 받았듯이, 다윗이 그 믿음으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여김을 받았듯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셨다고 하면서, 너희 자신도 ‘이제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라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 100살이었고, 그 아내 사라는 90살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라는 경수가 끊어 진지 아주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식을 주신다.’라고 하신 약속을 믿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칭해 주셨다고 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까?
다윗은 밧세바 사건으로 범죄 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라고 그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회개 하게 했습니까? 다윗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주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이 부족한 점이 많았던 사람이고, 다윗도 우리와 같이 실수하고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이, ‘죄인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다윗과같이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이, 믿음 안에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까?
셋째,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주의 능력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칭해 주실 때, 우리에게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 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 칭해 주실 때,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주 희귀한 시대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해서일까요? 기도를 적게 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가 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적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온 세상에 선포되고 있지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아주 적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역사,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 펼쳐보세요. 어디에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해 주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기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다리를 놓았습니까? 배를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법궤를 멘 제사장이 그 발을 요단강물에 담 그었을 때 강물은 끊어졌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번째 만난 여리고 성은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여리고 성을 발굴해 보니 여리고 성은 이중의 견고 한 성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성을 무너뜨리려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과 희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을 어떻게 점령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6일 동안은 그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 돌고 난 후 그 성을 향해 ‘성벽아 무너져라.’라고 소리치자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외치는 소리를 듣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일어납니다.
믿음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이나, 상식이나, 사회적인 통념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믿음의 역사를 바로 알고 믿는 것이 참 복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세례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는 죽고,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하나님에 대하여는 다시 살아난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는 첫째, 사망 증명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 꽝꽝꽝. 이렇게 도장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계속 죄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만약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면 아직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아닙니다.
둘째, 세례는 예수님의 은혜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받는 세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로마서 6: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아멘.
바울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 인정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는 것을 ‘믿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게 됩니다.
말씀을 많이 듣는 것은 좋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어진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시간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또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맺으며 살게 되는 의의 열매, 거룩의 열매를 많이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까?
넷째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6:17절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는 본래 아담 안에서 죄의 종이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됨으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에서 해방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무엇이든지 그 마음의 원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희는 무조건 내 말을 들으라.’라고 강압하시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서 얼마 큰 사랑을 보여주었냐?’라고 하시면서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과 같이 대우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봇은 프로그램을 입력하면 입력한 프로그램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스스로 선택하여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자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한 삶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이 져야 합니다.
이것을 잘 알았던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으로 넘치는 기쁨을 속에서, 마음으로 자원하여 주를 섬길 수 있도록 제게 ‘자원하는 심령을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참믿음은 자원하여 섬기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섬기는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억지로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들이 보기 좋습니까? 감사하며 기쁘게 자원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보기 좋습니까? 학생들이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강요를 받고 억지로 마지못해 공부하는 것이 보기 좋습니까? 아니면 공부하라고 하지 않는대도 알아서 즐겁게 자원하여 공부하는 것이 보기 좋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같으십니다.
우리가 이왕 하나님을 섬길 바에는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귀히 보십니다.
우리가 참빛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 참빛교회에 가서 예배드려라.’라고 강요해서 오신 분 있습니까? 없으시지요? 우리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개척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저희가 교회를 개척한 후 어떤 분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저희 집에 들리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성도님은 왜 그렇게 자주 저희 집을 찾아왔겠습니까? 저희가 그 성도님에게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저희 집에 오라고 강요해서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담임 목사 집에 한 번씩 들러서, 계란도 사 오고, 과일도 사 오고, 어떤 때는 주일 날 설교할 때 쓰라고 넥타이도 사 오고, 잠옷도 사오셨습니다. 개척교회 목사를 섬기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이런 일을 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왜 하나님을 섬기며 삽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매를 맞거나 불이익당할 것을 염려해서 섬기고 있습니까?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원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자원하여 섬기는 곳에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나는 싫은데 하나님께서 자꾸 강압적으로 나에게 이것저것을 맡기신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필요로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정도로 나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강압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볼 때 거의 강압적으로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 같아보이는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수 믿는 신자들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 자신이 믿고 살아온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그 인생의 방향을 180도 수정하게 됩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동족 유대인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로마서 9: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그의 골육 친척인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하는 바라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보십시오.
로마 교회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로마 교회를 위해 쉬지 않고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로마 교회를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이 일의 증인이라고 까지 합니다.
또 그가 개척한 교회를 향한 사랑을 보십시오.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하면서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고 애타 하는 자신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누가 이렇게 하라고 강요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빚으로 여기고, 그 빚을 갚아나가기 위해 평생 자원해서 사역했습니다. 바울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자원하여 순종한 사람들의 삶에 거룩함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들이 맺혀집니까?
그것은 아마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심으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칭의는 일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거룩함에 이르게 되는 성화는 계속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한 비유가 바로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합니다. 가지는 언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까?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의의 열매, 거룩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열매는 맺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단번에 예수님과 같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다른 점은, 이 세상 사람들은 아예 죄의 종으로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성도들은 혹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계속 죄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같이 처음에는 온전하지 않지만, 한 걸음 두 걸음씩 선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된 의의 종들입니다. 성령이 강권함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거룩함을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매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성령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까?
거룩한 삶을 출발점은 칭의입니다. 이 칭의를 통해 내가 의인이 되었다는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롭다.’ 칭함 받는 나에게 하나님이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믿고, 마음으로, 자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이런 사람들에게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의 말씀을 마치면서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예수를 믿는 우리 신자들의 삶에서는 죄의 권세가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거절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더 있습니다.
우리의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듯이, 성화도, 영화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이기고 살아가는 거룩한 삶을 통해,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하나님과 동료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서,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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