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하나님 사랑, 교회사랑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10. 6. 15:11

하나님 사랑, 교회사랑

고린도후서 11:22-31

 

오늘 이 시대는 자녀를 많이 낳지 않습니다.

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습니까? 자녀를 낳게 되면 양육하고 공부시키는데 시간과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거나, 결혼은 하였지만 자녀는 갖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 사회 풍조 때문에 우리나라 신생아 출산율0.72명까지 떨어졌습니다.

OECD 평균 출산율인 1.58명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저출산으로 지방 소멸이 시작되었고, 결국에는 국가 소멸까지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정부는 출산 가정에 주는 혜택들을 하나둘 내어놓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혜택을 줄 것이니 자녀를 많이 낳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출산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정부가 약속하고 있는 혜택들이 자녀 양육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보다 더 체계적이고 지금 보다 더 확실한 대책이 나와야 될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출산을 기피 한다고, 성도들까지 자녀 출산을 꺼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최대의 복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라고 하는 출산과 번성의 복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의 출산율이 낮아질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출산율이 높아지면 우리나라는 미래가 있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까지 이런 시대 흐름에 편승하여 자녀 출산을 기피 하게 되면, 한국 사회는 물론 한국교회의 미래도 암울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 총회에서는 출산 사명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홍보 동영상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 놓았습니다. 시간 되실 때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는 개인과 기업을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 자녀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주기 위하여, 조기교육을 시키며 공부에 올인 하기도 하고, 조기 유학을 보내어서 기러기 가족이 되기도 합니다.

 

부모들은 많은 돈을 들이고 삶을 희생하며 어린 자녀들을 외국에 보냅니까?

그냥 평범하게 자라서는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서 부모들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그 자녀들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부모의 지원 없이 자수성가하기 어려운 시대라고 합니다.

시대가 어려우면 자녀들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긴박한 상황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철든 자녀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회자 부모는 그 자녀가 스스로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켜 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풍조와는 달리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면 눈물겨운 희생과 헌신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라남도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 이야기도 그 하나일 것입니다. 금산교회는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하던 최의덕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김제 최고의 갑부 조덕삼에 의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조덕삼의 집에 경상남도 마산 출신인 이자익이라는 17세의 청년이 먹을 것을 구하러 왔다가 머슴살이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조덕삼의 선처로 이자익은 결혼도 하고, 금산교회에서 신앙생활도 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금산교회는 상당한 규모로 규모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장로를 뽑게 되었는데 장로 후보에 조덕삼과 그 집 머슴인 이자익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투표 결과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 지역주의 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투표 결과는 주인과 머슴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섰고,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지역의 벽을 넘어서는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술렁거렸습니다.

자칫하면 교회가 둘로 나누어질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조덕삼 영수가 일어나서 나는 우리 집 머슴으로 있는 이자익을 장로로 인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자익 장로에게 순종하며 섬기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로가 된 이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학자금과 일체의 생활비를 다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자, 목사가 된 이자익을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평생동안 잘 받들어 섬겼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사를 읽어보면 이렇게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성경 속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여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던 몇 사람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왜 이런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한편으로는 지금도 이렇게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았던 그 놀라운 삶을 우리들도 살았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약성경 속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살펴볼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그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상을 만들어서 팔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사도행전 7:2-4절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데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게 됩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명의로 된 땅 한 평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소와 양을 치는 목축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목축업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주된 가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순종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신앙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신앙에 대한 말씀이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요구를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이 요구는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보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들은 그 아들 이삭에게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드리게 되면 이제까지 주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 즉 공수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는 돌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올려놓고, 그 아들이삭을 끈으로 묶어서 번제 단 위에 눕힌 후, 칼을 들어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지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자를 보내어 아브라함을 제재하셨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5:8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믿음도 순종하는 믿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런 말씀들을 보면 참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까?

그중 하나가 바로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그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포기했던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죄인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사람들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아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그 신앙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신앙은 어떤 신앙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즉 그 행위를 통해 증명된 믿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 즉 행위를 통해 증명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제게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저에 대해 악담과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제가 나서서 잘잘못을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하여 늘 하던 대로 저녁 시간에 교회 기도실 뒤쪽에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한 기도는 다른 날 해온 기도와 달랐습니다. 누군가가 내 기도에 함께 하면서 기도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중에 주님 제 입장과 처지를 잘 아시지요.’라고 기도하자, ‘나도 너와 같은 일을 많이 당하였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마음에 들려 왔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을 나도 당하였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날 저는 마치 예수님의 품 안에 안긴 것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속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감격적인 기도를 끝내고 일어설 때는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를 비방하는 사람을 내가 대적하지 않고, 그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맡기며 기도하다가, 저와 같이 일을 당하신 예수님, 사람들의 비방과 비난을 참고 인내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날 깨달은 것이 바로 오늘 이 말씀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포기하는 아픔 속에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셨던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저는 그날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의롭지도 않고 비록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따라 살아야겠다.’ ‘예수님처럼 나도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대적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마음의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를 예수님처럼 비방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기도해 주는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다짐하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오해나 갈등이 생기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오해하고 판단하고 자기주장을 하고 정죄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저에게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은혜 주시고 계신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은혜의 마음이 있는가 하면,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게는 알 수 없는 눌림과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믿고 결심한 대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왔었지만, 목회자로 살아왔던 저희 가정에서는 달랐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목회자는 이렇게 해야 하고, 목회자의 가정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사모에게, 아이들에게 강요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모와는 큰소리치며 다투기도 하고, 아이들은 자주 모아 놓고 꾸중하고 강요하고 억압해 왔습니다.

 

그래서 본래 의도와는 달리 사모와 아이들에게 반발심을 심어준 아빠가 되었습니다.

반발심을 가진 사모와 아이들에게 아빠가 하는 설교가 들렸겠습니까? 만약 아직까지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설교가 들리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간 잘못 살아온 삶이 너무나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될 수 있으면 꾸중을 하지 않고, 참아주고, 이해해 주고, 도와주고, 기다려 주고 격려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모에게도 될 수 있으면 그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도와주는 삶을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다고 전에 받은 상처가 치유되겠습니까?

아무리 잘해 주어도 그 상처의 흔적은 마음에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라도 믿음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면서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사모와 아이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의 이 엄격한 생활 태도를 아주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생들에게 아주 엄한 오빠였었습니다. 그래서 동생들도 나를 인하여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내 성격은 어디서 온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아마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시던 부모님으로부터, 어린 제 마음이 상처받고 억압받으면서 가지게 된 성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를 되돌아보면 저는 언제나 어머니 편에 서 있었고, 아버지에게는 반항심과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제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을 하게 됩니다.

 

제가 나중에 결혼을 하고 아이들의 아빠가 되면서, 연로하신 부모님의 모습을 안스러워하면서 될 수 있으면 섬기고 도와드리며 살려고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제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아서, 그 피해를 동생들이 보고, 사모와 우리 아이들이 보게 한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슬퍼집니다.

 

지금 제 솔직한 마음은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내가 다시 교회를 개척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 살았던 엄격한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닙니까? 앞으로만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삶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살아가는 삶은 지난날 잘못 살아온 삶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강요하고 억압하고 상처 주는 삶은 살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갖게해 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성격적인 약점, 이해의 부족함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 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등 전인격에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하나님 자녀로 변화된 새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베풀어 주셔서, 지금보다 좀 더 성화된 상태로 거룩한 상태로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무슨 꿈, 무슨 희망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서 살았겠습니까? 장차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세워주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결국에는 그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하나님 소유의 나라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이 은둔의 땅 한국을 찾아왔던 많은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이 선교사들도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꿈을 꾸며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이 땅에 왔습니다. 이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세워져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흘린 눈물과 희생이 한국교회의 기초석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한국교회의 파송을 받은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역자들이,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 세계 열국에 있는 선교지로 파송 받아 나가고 있습니다. 그 가는 나라들도 다양하여서 이제는 우리나라 선교사가 가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한국은 이제 미국을 이어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3 세계에서 서구 선교사들은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3 세계는 거의 다 과거 제국주의의 지배와 약탈을 당했던 나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교사들은 회교권과 북한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배척을 받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21세기 세계 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도 별로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복을 누리며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다. 북한이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으로 위협하는데도 이렇게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나라에는 주의 일에 앞장서 일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의 섬김과 헌신을 받으시고 우리나라에 복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줄지라도, 우리들만이라도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 수고와 헌신을 이해해 주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도와야겠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더 귀하게 보고 그 사역을 지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보고, 우리나라와 한국교회에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두 번째 살펴볼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평생 성전 건축을 준비했던 다윗입니다.

 

역대 상 29:1-9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힘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성전 건축을 위해 즐거이 자원하여 헌신하였습니다.

 

다윗은 왜 성전 건축을 위해 이렇게 힘써 준비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목동은 아주 천한 직업이었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새가 여러 아들 중에서 다윗에게 이 목동 일을 시켰다는 것은, 다윗을 귀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다윗에게 목동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르게 보셨습니다.

천한 대접을 받고 있던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기름 부으신 이 선택을 통해 다윗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다윗이 전쟁을 하면 언제나 이겼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그 신분이 목동에서 왕의 사위로 격상되었습니다.

 

나중에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그 왕위를 다윗에게 물려주시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후에 사울 왕은 평생 그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다윗을 죽여야 그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사울 왕이 죽은 이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도 감격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시더니, 결국 그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방 나라와 전쟁을 하기만 하면 다 이기게 해 주셔서, 그 사방에 있는 적들을 다 물리치고,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가를 세우게 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이 보니, 자신은 왕궁을 짓고 편안히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천막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위하여 멋진 성전을 건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 귀한 것을 보기만 하면 그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재료로 모았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성전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나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는 전쟁을 하면서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기 때문에, 평화의 상징인 나의 성전을 건축하는 자로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다윗의 당시 마음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윗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 세우기를 원하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으신다면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섭섭해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거절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 차원 높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자기는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기 아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 부족함이 없도록하기 위하여, 이후에도 힘을 다하여 성전 건축을 준비하며 살게 됩니다.

 

다윗은 왜 이렇게 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받은 은혜와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답하려는 심정으로 성전 건축에 쓰일 재료들을 준비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바로 구약의 교회인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다가올 천국을 세상에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모형이며 하늘나라의 대사관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아는 성도들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세워주신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받은 사람들의 삶의 특징입니다.

다윗은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서 세운 교회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게 됩니다. 다윗은 그 삶을 통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살펴볼 사람은,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룻입니다.

 

룻은 모압 지방에서 태어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사 온 엘리멜렉의 아들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먼저 시아버지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나고, 그 후에 남편까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룻의 가정에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동서인 오르바와 룻만 남게 되었습니다. 룻의 가정은 세 과부(寡婦)만 남아 있는 과수댁(寡守宅)이 된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은 나오미는 그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모압 사람인 두 며느리가 마음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를 불러서 나는 이제 내 고향 땅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집이 있는 이곳에 남아서 다른 사람과 재혼하여 다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거라.’라고 하게 됩니다.

 

나오미가 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나오미가 돌아가려고 하는 베들레헴은, 나오미에게는 정든 고향이고 반겨줄 친척과 이웃이 있는 땅이었지만, 과부가 된 그 두 자부에게는 타향이요, 또 이방인이라고 배척받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얼마나 폐쇄적인 민족인지 잘 알고 있었던 나오미는, 그 자부들의 장래를 진심으로 염려해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룻의 동서 오르바는 그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고향에 남게 됩니다.

그런데 룻은 하나님께 맹세까지 하면서, 내가 죽는 것 외에 그 시어머니를 떠나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려 주시라.’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 시어머니가 가시는 곳이 어디든지 따라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룻은 왜 이런 결심을 하고 나오미를 따라가려고 했습니까?

그녀는 전에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기며 살았던 여인이었지만, 나오미의 집에 시집와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룻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니, 하나님 밖에서 살고 있는 그 고향도 그 아비 집도 다 버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 남편은 죽고 없지만, 하나님을 믿게 된 그 신앙은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그의 조국 모압과 모압의 신 그모스보다, 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런 룻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것은 다 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또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모습을 서로 서로에게서 보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성도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도 교회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생활도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싶어 합니다. 그 삶에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교회 성도들과 함께 나누려고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교회를 중심에 두고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직장을 구해도 교회 잘 나갈 수 있는 직장을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이나,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다윗이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이후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또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을 중심으로 살려고 했던 룻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런 사람들을 볼 때 기쁨을 느끼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이런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다윗을 사랑하시고, 룻을 사랑하셨으면,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야가 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 다윗의 자손으로, 룻의 자손으로 오시게 하셨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각 중심에는 무엇이 차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위해 그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땅 위에 세워주신 교회가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고, 다윗과 같은 사람이고, 과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아브라함과 같이, 다윗과 같이, 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신앙을 가지고 이런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엔 신약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네 번째 살펴볼 사람은,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어부로 살게 됩니다.

 

어부로 살고 있던 이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베드로는 배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가족도 잠시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베드로에게 이 결단이 쉬웠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고기를 잡아 부양해야 했던 아내와 장모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베드로의 신앙이, 또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베드로가 이런 결단을 하고, 헌신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으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사랑하사 네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많이 가지고 있는 그 재물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먼저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다가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죽은 아버지를 장사하고 난 후에 따르게 해 달라고 하다가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알량한 지식과 명예를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버리셨습니까? 또 무엇까지 버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되면 손해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일이 있어도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한때 예수님을 따르는 데서 실패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여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일을 회개하고 난 후에 평생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어가는 순교까지 감내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하고 희생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값진 것으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한 헌신들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드린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도 헛되지 않습니다. 이 헌금이 하늘의 은행에 저축해 두는 보화가 되어, 장차 하늘나라에서 살아갈 우리들의 재산으로 천국에 쌓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천국에 가게 되면 이것이 사실인지 꼭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천국에 가게 되거든 가장 먼저 베드로를 찾아서, 그 희생과 헌신에 대해 어떤 상을 보상으로 받았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는 분명히 그 누구보다 더 값진 상급을 받았음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베드로와 같이 하늘나라에서 값진 상급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번째 살펴볼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교회를 사랑한 바울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 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선봉장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삶이 180도 변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원수로 살았던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그 아들까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예수님과 그 몸 된 교회를 위해 남은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가 아시아와 유럽 곳곳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개척한 교회를 사랑으로 계속 돌보면서, 그 교회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그 편지들이 성령으로 영감 된 편지,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기록한 편지로 인정을 받아, 오늘날 우리가 애독하는 신약성경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복음 전도사역에는 많은 고난이 따랐습니다. 바울이 당했던 고난의 삶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23-29절 말씀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창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여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여러분은 이런 삶을 살면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외에도 바울은 여러 번 옥에 갇히는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하 감옥에서 습기추위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난의 와중에서도 그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들과 성도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바울의 이 고백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평안할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삶이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참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주례하는 주례사를 들어보면 이런 말을 꼭 합니다. 주례자는 신랑 신부에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하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왜 이것을 꼭 물을까요? 한결같은 사랑이 참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쁠 때 좋을 때만 사랑하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동일한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보람이 있을 때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힘들고,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도 같은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다윗, , 베드로, 바울 이 다섯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했고, 교회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살핌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고 준비했던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살고자 했던 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교회를 사랑했던 바울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과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우리가 가진 신앙과 우리가 가진 사랑을 보여주고 살아가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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