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성령의 역사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6. 9. 15:15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6-8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신 시대가 있었고, 성자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신 시대가 있었고, 성령 하나님의 주도적으로 역사해 오시는 시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인 오늘날은 삼위 일체 하나님 중 어느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시대입니까? 오늘 이 시대를 성령 시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은 성령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행하셨던 역사 즉 행하시고 계시는 역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이 교회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실 것을 사도행전 1: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며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어떻게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게 되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고,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번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갈릴리 지방으로 도망가서 다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이후에는 그 삶이 획기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후에 아주 담대해졌습니다. 이들은 약속하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180도 확 달라져서, 예수님이 사도행전 1:8절에서 약속하신 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당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또 요한복음 14: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임하면)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말씀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또 이들에게 임하심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통해 어떤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첫째,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 곁에 앉아 구걸하고 있던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고쳐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무엇을 얻을까 하여 주목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이때는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잘 알려져 있었을 때입니다.

이런 당시 상황 속에서 이해할 때 그러면 이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고자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겠습니까? 은과 금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나타났던 성령의 능력과 역사였겠습니까? 은과 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본 것은 당시 이들을 통해 나타났던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였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이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네가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이 사람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마치 자신의 마음의 소원을 알고 있는 것 같이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 한번도 일어나서 걸어본 일이 없지만, 일어나려고 하자 다리에 힘이 주어져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걸어도 보고 뛰어도 보니 걸어지고 뛰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기뻐서 베드로와 요한을 뒤따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으로 들어갔고, 성전 안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자기를 낮게 해 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 성전에서 구걸하던 사람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고침을 받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한 순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행한 베드로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이 우리의 경건이나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맡겨주신 위임된 권세라고 했습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는 예수님이 위임해 주신 권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행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믿고 명령한대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도 종종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우리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하듯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이런 권세와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가 믿은 믿음대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그 믿음에 따르는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믿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중한 병이 든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길 원합니다. 또 다른 성도들의 삶을 위해 기도할 때 이런 믿음 이런 믿음의 역사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는 이런 권세를 훨씬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주신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런 믿음을 가진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땅에서 매고 풀 수 있는 권세’, 즉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할 수 있는 그런 권세까지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9절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아멘.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전에 이런 권세와 능력을 주신바 있으십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시기 까지는 아직 그런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그들 위에 강림하신 이후에 비로써 예수님이 주신 그 권세를 사용하여 기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대당국자들은 주목하고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서 예수님을 대적하고 박해했던 당국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 제자들은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합심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한 내용이 사도행전 4:29-30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은 당국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길 원했습니다.

제자들이 하고자 한 일은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이름과 권세로 병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일이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맡기신 일임을 알고 있었고, 복음을 전하는 일과 병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고쳐주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가 끝나자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합니까?

사도행전 4:31절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은 곳이 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고, 또 성령이 주시는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일은 사람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기도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능력과 힘으로 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직분을 주셨든지, 우리가 받은 직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기도하면서 해야 하고 또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해야 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32-34절을 보면, 베드로가 룻다라는 곳에 갔는데 거기서 애니아라는 중풍에 걸린 여자 신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애니아는 베드로가 하는 그 말을 믿고 즉시 일어나 그 중풍 병을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은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해 졌고 애니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9:36절을 보면, 베드로가 욥바로 갔는데 거기서 가난한 성도들을 많이 구제해 주던 다비다라는 젊은 여성도가 죽은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다비다가 어떻게 자신들을 도왔는지 베드로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비다의 헌신에 감동을 받은 베드로는 하나님께 기도한 후 죽은 다비다를 살려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병든 사람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예루살렘 공동체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의 강림을 경험한 초대예루살렘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영적가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 안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44절 말씀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물건을 통용하며 함께 먹고 마셨고, 또 그 자신의 소유재산을 팔아서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시도된 유무상통하는 이 일을 예루살렘교회가 좋게 보고 한 사람 두 사람 이 일에 참여함으로 나중에는 교회를 통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갔습니다. 4:3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 속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그리고 이 일이 당시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었든지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직 이런 믿음에 이르지 못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까지 이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그 소유 재산을 정리하여 팔고 보니 그 액수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절반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남겨 놓고 그 절반만 가지고 가서 이것이 저의 전 재산입니다.’ 라고 하며 바쳤습니다.

 

당시 성령으로 충만하였던 베드로는 이 부부가 거짓말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희 말대로 이것이 너희가 판 전 재산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그것이 전 재산이 아니면서도 마치 전 재산인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성령을 속인 죄로 저주를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5:11절을 말씀을 보면 이 일이 교회에 알려 졌고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이 주신 권세는 단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정도의 권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어떤 사람을 축복을 하면 그 사람이 복을 받았고, 제자들이 어떤 사람을 저주하면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런 권세가 제자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빌립의 사역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

 

또 사도행전 8:6-7절 말씀을 보면,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는 스데반의 일로 인해 시작된 박해를 피해서 성도들이 흩어진 시기입니다.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지면서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빌립집사는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전도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서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아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빌립 집사는 예수님이 임명하신 사도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교회가 선거를 해서 세운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집사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아 내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빌립 집사를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빌립 집사의 인기는 사마리아 성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날로 높아져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성에는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시몬이라는 점쟁이가 있었습니다.

이 시몬이 빌립 집사를 통해 나타나는 능력을 탐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그 능력을 사고자 했습니다. 빌립은 이런 시몬을 저주하며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라고 선언하자 이 시몬은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고 용서를 부탁했다는 기록이 8:18-24에 나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는 빌립 집사를 통해 이렇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정오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내리 비취는 가운데 그를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눈이 멀게 되었고, 일행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도착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기도를 하게 됩니다. 3일 후 하나님이 보내신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안수함으로 다시 눈을 떠서 보게 됩니다.

 

이 아나니아가 누구입니까?

이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가 세웠던 집사도 아니고 다메섹에서 예수를 믿기 시작한 평신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안수해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나니아가 가졌던 이 능력도 바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신 권세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에는 한계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초대교회에서 나타났던 이런 능력은 그들이 가진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이들에게 주셨던 능력이었습니다.

 

12제자 중 한 명이었던 베드로는 이 성령이 주신 능력을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세움을 받았던 빌립 집사도 성령이 이 능력을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살았던 무명의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나니아도 성령이 주시는 이 권세와 능력을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도 이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사용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런 성령의 능력의 역사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주셔서 사용하실 때 사람을 가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도이거나 집사이거나 무명의 평신도 이거나 가리지 않고 필요시 필요한 사람에게 능력을 주셔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이런 권세와 능력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너희가 받지 못함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성령 받기를 구해야 하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권능 받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구하고 성령의 은사와 능력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고 또 그런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 사도바울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

 

베드로 이후 사도행전의 중심은 사도바울에게로 옮겨집니다.

사도행전 13:10절 이하에 보면, 사도바울의 그의 전도를 가로막는 점쟁이 엘루마를 성령이 충만하여 저주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의 저주 앞에 엘루마는 즉시로 소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참 놀라운 능력이 아닙니까?

 

사도행전 14:8-10절을 보면 이번에는 바울이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고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루스드라에 있는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하면서 소를 잡아다가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가 깜짝 놀라서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서 말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각 장마다 기적이 넘쳐납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 있는데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전도하러 갔다가 귀신들려서 점쟁이가 된 여자를 고쳐주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고소를 당하여 체포되고 심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깊은 밤 감옥 속에서 자신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며 찬송하다가 옥토가 흔들리는 기적이 일어나서 간수와 그 가족을 구원하게 됩니다. 이것도 성령을 통해 나타난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19:11-12절에는 심지어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사도바울을 통해 일어났던 이런 능력의 역사는 한 번 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능력의 역사는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났고 이 능력의 역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이방 땅에 세워나가는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은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서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기도하다가 약 40세쯤에 이 소아마비가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들도 이런 하나님의 기적을 받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많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사모하기에 지금도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9-11절을 보면 밤중에 2층의 창문에 걸터앉아서 졸면서 바울의 설교를 듣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게 됩니다. 바울은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가서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청년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는 두 가지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로 가던 바울 일행이 태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다가 로마에 가까운 멜리데라는 섬에 닿아서 겨우 살아났는데 차가운 바다를 헤엄쳐 오면서 젖은 옷도 말리고 또 추운 몸도 녹이려고 불을 지피다가 바울은 그 나뭇단에서 나온 독사에게 물리게 됩니다.

원주민들은 그 뱀이 얼마나 무서운 독사인지 잘 아는지라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은 정말 공의로우시구나. 저 사람이 바다의 파도에서는 살아났지만 뱀을 시켜서 죽이시는구나.” 생각하면서 바울이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바울은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바울을 신이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 섬의 추장이 바울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서 열병과 이질에 걸려 있는 그 부친을 구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바울이 가서 기도하고 안수해 주자 열병이 나았습니다.

 

이렇게 당시 전도자들은 어디를 가나 일상적으로 기적을 행했습니다.

전도자들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권세들이 어디서 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역사해 주신 권세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능력, 즉 제자들과 집사들과 평신도들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능력은 세 가지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근거는 위임된 권세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하라 명하시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이 권세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 위임된 권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근거는 동행하시며 주시는 권세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서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통해 나타난 이 능력은 그들과 함께 동행 하시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근거는 약속을 믿고 행할 때 따라오는 권세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18절에서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그대로 행하였고, 예수님은 그 믿고 행한 대로 기적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위임된 권세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해 주시면서 베풀어주시는 권세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하신 약속을 믿고 행할 때 따라오는 권세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도를 명하시면서 그 사역에 필요한 권세와 능력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의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는 예수님에 의해 위임된 권세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행동할 때 마다 성령을 통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났고 불신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위임해 주신 권세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이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면서 베풀어주시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능력과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만 이런 권세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운 집사에게도 이런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 의해 세움을 받지 않았던 무명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행할 때 이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 믿음에 따르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명령과 위임된 권세를 믿고 시인하느냐 불신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을 전도하는 일과 믿음으로 병을 고치는 일은 일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해야 하고 전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전도를 위해 이런 권능을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제자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이런 능력을 위임하셨다는 것을 알고 그 권세를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베드로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라고 했던 믿음을 우리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도 믿고 기도하면 믿음으로 명령하고 선언하면 죽은 사람도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약속하고 계신 권세를 능력을 우리 모두 사용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꼭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주 약속하신 성령을 살필 때 성령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이 모든 능력과 은사는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이것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령의 역사에서는 반드시 누가 들어나야 된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드러나고 예수님이 높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은 사람을 고친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를 집중할 때 베드로는 이 일은 그 이름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때 빌립이 전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아나니아도 성령이 보내심을 받아 사울에게 안수하며 한 말도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시작된 성령 운동은 방언운동, 은사운동, 빈야드 운동을 거쳐 오늘날은 4 세대 성령 운동인 신사도운동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 신사도운동에서는 영적 체험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또 일곱 산 운동, 부의 이동운동 등 권력과 재물이라는 인간 욕구충족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거룩한 삶은 등한시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이신 하나님과, 진리이신 예수님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는 이 성령운동은 그 근원이 어디라는 것입니까? 신사도운동이 교회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고 있는 이유가 예수님 없는 성령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13절 말씀을 보면 종말 시대 사단은 그 대리자인 짐승 즉 적그리스도에게 권능을 주어서 큰 이적을 많이 행하게 하되 심지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치 엘리야와 같이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게도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짐승에게 근원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는 이 이적을 하나님의 역사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초로 하고 보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그 주신 말씀에서 벗어나는 사역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없이 행해지는 성령운동 신사도운동의 배후에는 누가 있다는 것입니까?

 

이 설교를 듣는 우리 모두는 앞으로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그 가운데 예수님이 계신가?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가?’ 라는 것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잘못된 기초위에 신앙을 세우지 않고 우리 믿음의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 위에 우리 신앙을 굳게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과 예수님 위에 세운 이 복된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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