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성령충만의 열매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6. 16. 08:49



성령충만의 열매

에베소서 5:15-21

 

1. 성공의 세 가지 요소

 

사람은 누구나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지식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인 오늘날은 정보가 바로 경쟁력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얼마나 빨리 먼저 정보를 소유했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술입니다. 이것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석권하고 있는 삼성과 SK하이닉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 기업은 다른 기업보다 한 발 앞선 기술 개발로 세계 메로리 반도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식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가진 지식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또 무엇을 가지고 있으면 성공할 수 있습니까?

셋째는 좋은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비록 가진 지식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을지라도 좋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삶의 태도는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늘 긍정적인 생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늘 밝은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늘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세상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주어지는 복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2. 성령이 주시는 변화

 

우리가 이렇게 좋은 생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좋은 생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등한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성도가 1,000만 명이나 된다고 하면서도 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미미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한국교회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 충만을 해석할 때 너무 은사위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방언을 말하고, 기도를 하면서 진동을 하고, 또 예언과 병 고침의 역사가 나타나는 등등의 은사와 역사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차원 높은 삶은 등한시해 왔습니다.

 

물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현상과 역사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그런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신구약 성경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이런 현상들은 성령을 인하여 나타나는 단지 외적인 현상이요 표징일 뿐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될 때 따라오는 것은 이런 외적인 현상과 표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이루지는 우리 개인의 내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그 삶 속에서 맺게 되는 경건한 삶의 열매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삶 속에 변화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 충만이 우리의 삶에 주는 변화는 어떤 변화입니까?

 

첫째, 성령 충만은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에베소서 5: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을 보면 술을 먹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술을 먹고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함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술에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술을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주체가 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게 되지만,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먹다가 보면 나중에는 이제 술이 술을 먹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게 되는 사람들은, 결국 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술을 먹으면 용기를 내어서 이 말 저 말하기도 하지만 술이 깨면 곧 바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꽁생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술에 찌들어서 살아가다가 보면 결국에는 술 때문에 그 몸이 병들고, 그 마음이 병들고, 심하면 알콜 중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술에 취해 있고, 눈은 충혈 되어 있고, 코는 딸기코와 같이 불그스레한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서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고 하면 먼저 술과 단절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술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술을 먹고 취해 살아가는 방탕한 사람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에 찌들고 술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과 성령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보면 술을 금하고 술을 절제하여서 술에 취해 살지 않습니다.

 

또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까?

둘째, 성령 충만은 늘 찬송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에베소서 5:19절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그 마음속에 늘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아니 거의 무의식적으로,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가 큰 부흥을 이룬 나라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부흥하지 못했는데, 우리 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중국에서는 기독교가 오히려 쇠퇴하여 왔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기독교가 부흥을 하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라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따라오는 변화 중 하나는, 전에는 세상 유행가를 흥얼흥얼 거리며 다녔는데, 예수 믿은 이후에는 찬송가가 부르며 다니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쁠 때도 찬송하고, 슬플 때도 찬송하고,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아도 찬송을 하고, 감사해도 찬송 하고, 무슨 낭패한 어떤 일을 당해도 늘 찬송을 부르며 산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오시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는 늘 노래가 있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도 찬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도 알지 못하는 찬양을 내 영이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저도 모르게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그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 때 불렀던 찬송이 아마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를 처음 나간 제가 어디서 이 노래를 배웠겠습니까? 저는 전혀 이 노래를 배우지 않았지만 제 마음 속에서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다.’ 라는 찬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음악적인 재능이 전무한 사람들도 작곡가가 되고 작시가가 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우리의 영을 감동하셔서 새 노래 즉 우리의 마음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에베소서 5:19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마음으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찬양하게 하며,” 또 우리가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양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찬양생활이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셋째, 성령 충만은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에베소서 5:21절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우리가 어떤 때에 복종할 수 있습니까?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두면 우리는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내 위에 둘 때만 우리는 복종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에베소서 5:2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내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아내에게 충만하게 임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아내로 하여금 주께 복종하여 살게하듯이 그렇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하십니까?

그것은 아내 안에 충만하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자기보다 더 높게 보게 함으로,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하면서 그 남편에게 복종하지 못하는 아내는 어떤 아내입니까?

아내가 남편을 볼 때 남편을 자기보다 아래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아내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네 남편에게 복종해라 하고 하여도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아내가 자신을 그 남편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고 있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자기 요구를 하는 삶은 살 수 있어도, 자기 보다 아래에 있는 그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여러 번 문제 가정을 상담하고 진단해 본 경험에 의하면, 문제가 있는 그 모든 가정들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자신을 그 남편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은 하나님이 직접 찾아가셔서 고쳐보려고 하셔도 고쳐지지 않는 가정들입니다.

 

그러면 믿음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가정들은 어떤 가정들일까요?

아내가 남편을 우러러보고 존경하고 자신보다 더 위에 두고 섬기는 그런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은 화목한 가정이 되고 이런 가정의 자녀들은 바른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이혼을 하는 가정들을 보면 대부분의 가정들이 바로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는 가정들이었습니다. 어떤 가정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여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또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남편을 아래로 보고 무시하는 가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성령이 아내에게 임하면 아내 안에 임한 성령께서는 그 아내로 하여금,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섬기듯이, 그렇게 그 가정의 머리가 되는 남편을 위에 두고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아내들의 마음속에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은 아내들의 마음속에서 남편들을 자신보다 우위에 두게 하셔서,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런 높은 차원의 삶은 성령으로 충만해 졌을 때 가능하게 되는 삶입니다.

 

계속해서 에베소서에서는 이런 현상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동일하고, 종과 상전 사이에서도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이런 말씀들을 보면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도, 종이 그 상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바로, 성령 충만함 안에서 부모를 자기보다 우위에 두고, 상전을 자기보다 우위에 둘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거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겸손한 사람들은 적고, 오히려 거역하고 대적하고 불순종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들의 마음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늘 다투고 분쟁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되고, 성령 충만한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고, 성령 충만한 종들은 그 상전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삶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성령 충만은 또 어떤 변화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넷째, 성령 충만은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20절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삶에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감사와 성령 충만한 삶은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는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무가 맺고 있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람들이 그 삶을 통해 맺고 있는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성령이 충만하지 않는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 삶 속에서 어떤 감사의 열매를 맺고 삽니까?

첫째, 성령 충만한 사람은 범사를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감사는 성도의 아주 중요한 표식입니다.

하나님께 전혀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입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서 1: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하늘을 보면서 저 하늘은 누가 지은 것인가? 저 우주는 누가 저렇게 조성해 놓은 것인가? 구름은 누가 저렇게 시간마다 다른 모양으로 흘러가도록 명하셨는가?’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던 때입니다. 그런데도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스님이 수행에 열중하면서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파 놓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스님이 아이쿠 부처님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 스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아이쿠 하나님 이라고 했다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도 하고, 또 신학자들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하나님을 섬기지는 아니하고 또 그 하나님께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런가하면 성도들은 다릅니다.

성도들이 불신자들과 가장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도들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아주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들의 믿음의 크기를 가늠해 볼 때 가장 확실한 기준은 바로 감사하는 삶을 보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늘 감사하며 사는 성도는 믿음이 큰 성도이고 별로 감사하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는 믿음이 작은 성도라고 평가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어른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몰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겸손하고 가식이 없는 등 아주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감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모 된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하루 종일 힘들게 어린 아기를 업어주고 안아주고 먹여주고 놀아주는 등 수고하고 애를 쓰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잠깐 그 아기를 땅에 내려놓으면 그 아기는 어떻게 합니까? 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를 돌보시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좀 놓아두고 좀 쉬시지요.’ 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이런 아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린 아기들은 전혀 그 부모의 수고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힘과 정성을 다해 봐준 것은 다 잊어버리고, 지금 나를 땅에 내려놓는 그것이 너무 싫어해서 죽을힘을 다해서 때를 쓰고 악을 쓰고 우는 것입니다.

 

아기들은 왜 이렇게 합니까?

아기들은 왜 나를 계속 업어주지 않고 땅에 내려놓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행동이 불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행동을 자신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기들이 조금씩 자라게 되면서 부모는 그 아이들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가르칩니다.

- 할머니 할아버지가 용돈을 줄 때도 감사하다는 것을 표현하도록 가르치고,

- 누가 선물을 줄 때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도록 가르치고,

- 누가 작은 친절을 베풀어 줄때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도록 가르칩니다.

부모가 이렇게 계속 가르치다가 보면, 아이는 점점 자라서 이제 자기 스스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할 줄 알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는 철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어릴 때에는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때는 아직도 감사한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어린 성도들은 목회자가 기도해 주는 것이 왜 감사한일인지 모릅니다. 목회자가 심방을 가서 왜 주의 이름으로 예배 드려주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이렇게 하면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도들이라도 나중에 신앙이 자라고 신앙이 성장해 가면서, 내가 다닐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주의 이름으로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성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목회자가 주의 이름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입으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감사는 신앙이 성장한 성도들이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추사감사절을 영어로 ‘thanksgiving’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thanks’‘giving’이 합쳐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주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이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런 영어 단어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 구두쇠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사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 받을 줄만 알았지 줄줄 모르는 사람들은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볼까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 베풀어 주고 사는 사람,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맺게 되는 삶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도 나누어 주려고 하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도 나누어 주려고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물질도 나누어 주려고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와 재능도 나누어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런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세상 만민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세상으로 복을 받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넘치는 감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감사는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 놓기도 하고,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고,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안타까움이 있으신 분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말씀을 믿고 먼저 범사에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좋은 일을 만나도 감사합니다. 괴로운 일이 있어도 감사합니다. 라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고백하는 그 감사의 말이 어두움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경험하고, 또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도리어 복이 되게 하는 변화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삶 속에 왜 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그것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니 행위를 옳게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의 삶 속에 인생의 구름을 걷어가 주시고 찬란한 햇빛을 비춰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선교사인 헨리 프로스트(Henry Frost)는 중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역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눈에 선교본부의 벽에 걸려 있는 감사를 시도해 보라 라는 한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그 시각부터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감사 기도하는 그 마음속에 있던 어두움이 즉시 사라지고 기쁨과 빛이 그의 영혼에 임하여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기도가 모든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 삶 속에서 어떤 감사의 열매를 맺고 삽니까?

둘째,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20절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씀은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야 할 대상이 누구라고 합니까?

우리가 감사해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과 희망과 삶의 모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해변 가에서 아침에 해가 뜨는 장면을 구경했습니다.

그 때 해가 장엄하게 수평선상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떠오르는 해의 빛을 받아서 바다도 아름답고 하늘도 아름답고 섬들도 아름답고 구름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이 여행객은 아 참 아름답고 아 참 감사하다.’ 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여행객에게 당신은 누구에게 감사한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객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감사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감사의 대상은 성부 하나님 즉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야고보서 1:16-17절 말씀을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모든 복 모든 혜택은 다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되 늘 이 모든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잘못된 존재에게 감사합니다.

-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부처가 복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부처에게 감사합니다.

- 회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알라가 복을 주었다 생각하고 알라에게 감사합니다.

- 미신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은 귀신과 삼신 할매가 복을 주었다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에 대해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대상에게 감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감사할 때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감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아담 안에서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가 드리는 감사조차도 하나님께 열 납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화목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범사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예수 안에서 범사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 때때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 때로는 사업이 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 때로는 자녀들이 말썽을 피우기도 합니다.

- 때로는 가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 때로는 갑자기 질병이 엄습해 오기도 합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당하게 되는 이런 일들까지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일을 당하게 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보다 크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범사를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에는 언제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가 고침 받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사례하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복을 받게 되었을 때에 감사를 표시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늘 마음으로 감사를 표시하시고, 물질로 감사를 표하고, 삶으로 생활로 감사를 표하고, 입술의 열매로 감사를 표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렇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첫째, 성령 충만은 우리들로 하여금 방탕한 삶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둘째, 성령 충만은 우리들로 하여금 늘 찬송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셋째, 성령 충만은 우리들로 하여금 복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넷째, 성령 충만은 우리들로 하여금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모두 이 한 주간의 삶을 살 때,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맺으며 살아가는 이런 삶의 열매들을 우리 모두도 맺으면서 살아가는 복된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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