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행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 2:1-14
기생 라합의 구원 사건
여호수아서 1장을 보면 모세가 죽고 모세의 중책을 이어 받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강하고 담대 하라.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니라.’ 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약속의 말씀을 받고 여호수아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탐 군을 보내 여리고 성을 정탐해 오라고 합니다.
당시 상황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리고 성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두 명의 정탐 군은, 은밀히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 기생 라합의 집에 짐을 풀게 됩니다. 이를 본 여리고 성 사람들이 왕을 찾아가서 기생 라합의 집에 수상한 사람이 와 있다고 신고하였고 왕은 군대를 보내 그 두 사람을 잡아 오라고 명령 합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안 기생 라합은 급히 정탐 군을 깨워 지붕 위에 벌려 놓은 삼대 아래 숨겨 줍니다. 그리고는 군인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두 낮선 사람이 자기 집에 왔었으나 해가 져서 성문이 닫히기 직전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병들이 도망친 정탐 군을 잡으려고 성 밖으로 나간 후에 라합은 지붕에 올라가서 두 사람을 은밀히 만나 2:9-12절에 나와 있는 요청을 합니다.
9절에서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라합은 어떻게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것을 알았을까요?
10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➀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이것은 40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➁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 이것은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지요.
이 라합의 말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❶ 하나님이 40년 전에 홍해에서 베푸신 역사에 대한 소문이 근동지방에 짝 퍼져 있었으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살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그들이 목적삼고 있는 최종 목적지가 바로 가나안 땅이라는 것입니다. ❷ 그리고 최근에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을 가로 막았던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완전히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건너편까지 와서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는 가나안 사람들의 반응이 9절과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심히 두려워하였고,’ ‘간담이 녹았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할 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합의 마음에 믿음을 주시자 그녀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 동족 여리고 사람들과 같이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다 다스리시고 계시는 참 신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1절) 이런 반응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기로 택하고 예정하신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두 부류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 역사하심을 보게 될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대할 때 두려워하고 공포감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정탐꾼들에게 믿음의 고백을 한 라합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 두 사람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려고 자기 집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 왕은 그 두 사람을 잡아가려고 군인들을 보냈습니다. 이 급박한 순간에 라합의 고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의 동족 여리고 백성들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온 이 정탐 군의 편에 설 것인지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라합은 누구의 편에 섰습니까?
자신의 집을 찾아온 두 정탐 군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군인들의 손에서 건져 준 후 한 밤중에 지붕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를 선대한 것 같이 너희도 나와 나의 아비의 집을 선대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이 기생 라합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징벌하시고 멸망시키라고 하신 그 가나안 땅에 라합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선교역사를 보면, 선교 초기에 중국과 조선을 넘나들면서 한약재를 팔던 ‘이응찬’이라는 의주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약재를 잔뜩 싫고 압록강을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서 약재는 다 잃고 겨우 자기 목숨만 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알거지가 되어 만주 땅을 떠돌던 이응찬은 당시 만주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던 ‘로스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응찬은 로스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또 로스 선교사가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 할 때 한국 청년 여러 명 데리고 와서 함께 성경번역을 돕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이응찬과 청년들이 이 일을 돕다가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을 가지게 된 이 청년들은 자기들 손으로 번역한 성경을 조선 땅 의주와 서울 등지를 다니며 나누어 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말로 하면 성경 반포를 통한 전도를 한 것이지요.
이 청년들 중에 ‘김청송’이라는 사람은 복음에 대한 열정에 사로 잡혀서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집안현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또 ‘이성하’ ‘백홍준’이라는 청년은 그 고향인 의주로 돌아가서 ‘의주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또 의주 사람이었던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나중에 황해도 송천으로 가서 ‘소래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이런 교회들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조선인에 의해 세워진 자생교회들입니다.
그리고 이후 한국교회 발전사를 보면, 외국인 선교사들은 문화와 언어의 장벽 때문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들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배운 한국인 사역자들에 의해 한국교회는 세워져 왔고 성장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전했다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 이전까지 몇 명이나 믿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이 기생 라합이 그 가족과 그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그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 인근에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게 됩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우리가 먼데 나가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도 있겠지만,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나와 연관성을 맺고 살아가는 가족이나 형제 혹은 이웃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친근한 인간관계가 복음의 수용성을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도행전 1:8절 말씀에서,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도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수고와 노력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주 주보에 광고를 내었듯이 우리 교회는 앞으로 예배 후에 점심 식사를 맛있게 하고, 온 교회가 함께 나가서 한 두 시간 정도 전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상계동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는 기생 라합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2.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여호와이래)
두 명의 정탐꾼들은 정탐을 마치고 돌아가서 여호수아에게 그 실상을 보고 합니다.
그러면 정탐꾼들이 확인하고 보고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셔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앞서가서 준비하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에서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사람인 기생라합을 이미 준비해 두셨을 뿐 아니라, 믿음 없는 여리고 사람들은 심판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게 하셨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이 여리고 성은 자신들의 힘으로 점령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신 하나님이 앞서 가셔서 점령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정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의지해야 할 하나님도 바로 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 모두 기도하고 전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어떻게 행하시는 지를 보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의 왕 ‘다윗’도 가졌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면서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라고 했습니다.(삼상17장)
이런 믿음을 ‘여호사밧 왕’도 가졌었습니다.
자기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여호사밧 왕은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군인들을 앞세우고 나간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 앞에서 대신 싸워주실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를 앞세우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믿고 찬양한대로 이스라엘 앞에서 싸워주셔서, 뒤 따르던 이스라엘 군인들은 칼 한 번 빼지 않고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 신앙이 바로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 속에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행하시면서 우리의 삶에 승리를 주시고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이미 전에 ‘모세’가 가졌던 신앙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홍해라는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 따라오는 애굽 군대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공포심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런 위기상황 속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이끌어내라는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를 허락하지 않는 ‘애굽 왕’이라는 복병을 만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네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두신 10가지 재앙으로 애굽 왕 바로를 굴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모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애굽 왕에게 전해 주는 심부름만 했습니다.
모세는 지금 다시 ‘홍해’라는 복병을 만났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길로 인도하셨다면 홍해라는 위기 상황에 대해서도 이미 그 해결방책을 다 준비해 두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그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라는 믿음의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문제를 만났을 때 해야 할 믿음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우리 가만히 서서 오늘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 이 믿음의 고백을 하며 살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모세가 그 이후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의 경우에서도 동일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는 양식이 떨어지고, 르비딤 광야에서는 물이 없는 목마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들 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던 모세에게는 이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시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대안들을 미리 다 준비해 두고 계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 동일한 믿음을 가졌던 ‘여호수아’가 첫 번째 만난 문제가 무엇입니까?
강둑까지 넘치면서 흐르는 요단 강물이었습니다. 당시는 모맥 거두는 시기라서 요단 강물이 강둑까지 흘러넘치는 때였다고 합니다. 당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요간 강을 건너가는 일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3:7-8절입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13절입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싸여 서리라.’
그래서 여호수아는 법궤를 맨 제사장에게 그렇게 요단강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합니다.
법궤를 맨 제사장은 여호수아의 말을 믿고 요단강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제사장의 발이 요단 강물에 잠겨 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그 상류 쪽에서 물이 흘러내려오지 못하도록 물 벽을 쌓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뒤를 따라 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다 건너갈 그 때까지 강물은 흘러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째 만난 문제는 견고한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아주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이 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령하려면 성안의 양식이 떨어져서 항복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군사들이 6일 동안은 성을 1 바퀴씩 돌고, 제 7일에는 성을 7바퀴 돈 후에,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거든 그 성을 향해 일제히 무너지라 라고 소리치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 믿고 그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여리고 성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면 누가 요단강이 끊어지게 하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한 것입니까?
여호수아가 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도 아닙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앞서 가셔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비록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은 말씀이어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요단 강물을 끊어주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이렇게 볼 때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 분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들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실 때 그는 밤새 고기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시고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전 내내 말씀을 전하신 후에, 한 정오쯤 되었을 때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 했으나 허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약 1년 전에 가나 혼인 잔치에서 이미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을 때, 그 물이 최고급 포도주로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 보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그 잡은 고기가 두 배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배의 어부들이 그 날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약 3년 후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 일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로 돌아가서 다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새벽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가 고기를 잡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러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더니 큰 물고기가 153마리 잡았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지라,’ 라고 하시고,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라고 명령하실 때, 그냥 ‘깊은 곳에 던져 보아라. 혹시 고기가 많이 잡힐지 아느냐?’ ‘배 오른 편에 던져 보아라. 혹시 고기가 많이 잡힐지 알 수 없지 않느냐?‘ 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할 때를 대비해서 이미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면 잡히게 할 고기를 다 준비해 놓으시고 명령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에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어떤 말씀을 하실 때에는, 우리가 그 주신 말씀 믿고 순종할 경우를 대비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명령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하는 믿음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되게 하는 신앙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신앙을 보면 ❶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❷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내 기도 듣고 응답하신다는 것 믿습니다. ❸ 그러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내가 순종할 때 주실 것을 이미 다 준비해 두시고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특히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볼 때 이것을 넘어서는 믿음 즉 내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할 때 그런 나에게 주실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두고 계신 하나님도 믿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 말씀에 순종하면 주실 것을 이미 다 준비해 놓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종하는 그 즉시 하나님은 준비해 놓으신 그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❶ 이 믿음이 바로 모세가 가졌던 믿음이고, ❷ 여호수아가 가졌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 믿음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을 통해 이루어진 사마리아 전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예루살렘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 주시고 예루살렘 교회를 강제적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흩으셨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사람 중에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이라는 사람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 잘 받아드려서 복음은 급속도로 확장 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그 딸들과 함께 정말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빌립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주의 사자가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 길로 갔습니다. 당시 빌립이 가졌던 믿음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이라도 하실 때에는 이미 상황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그 일을 하려고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이 빌립이 막 광야 길로 접어드는데 마침 에디오피아 고급 관리 한 사람이 마차를 타고 오고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빌립에게 ‘이 마차 가까이로 가라’라고 하셔서 가까이 가 보았더니 그 사람은 마차 위에서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 사람에게 ‘읽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며 빌립에게 가는 길이 같으면 마차에 동석하여 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면서 그 이사야서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범죄한 인류를 위해 보내 주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인데, 그 메시야의 대속적인 구속사역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는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에디오피아 고급 관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 관리를 통해 복음이 에디오피아에도 전해졌습니다.
빌립이 한 일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종합적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빌립에게는 ‘광야 가사 길로 가라’고 명령하셨고, 에디오피아 고급 관리에게는 그 시간에 그 길로 오게 하심으로 빌립과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때 이사야서 53장을 읽게 하시고, 빌립의 질문을 듣고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 주시고, 빌립이 복음을 전해줄 때 마음을 열고 복음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게 하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면서 종합적으로 완벽하게 준비하시고 인도하신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단 1초의 어긋남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완벽하게 앞서 준비해 두시고 명령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이렇게 완벽하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셔도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만 하나님이 앞서 준비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우리는 비로써 산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경험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역동적인 믿음을 갖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도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삶 속에 행해주시는 역사들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신앙이 미지근한 신앙이 됩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는 우리 하나님은, 그 약속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기 이전에 이미 앞서 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주신 약속과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4,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상한 명령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어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그 아들이삭이 이상해서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에 쓸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의 이 질문을 듣고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참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 아들이 한 어려운 질문을 이렇게 재치 있게 대답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 말은 대답하기 어려워서 둘러댄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 말 속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믿고 있었던 하나님은 아브라함 앞서 행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런 믿음을 우리는 어디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창세기 15:6절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겨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가진 어떤 믿음을 보고 의로 여겨 주셨다는 것입니까?
당시 아브라함은 늙었고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 사라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자기 믿음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한 신실한 종 ‘엘리에셀’이 그의 상속자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겨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었지만 아브라함 보다 앞서 행해 가시는 하나님께서 장차 그 약속하신 자식을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하신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 주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모세의 믿음이나, 여호수아의 믿음은 모두가 다 같은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자신들 앞서 행하시면서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로마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❶ 아직 이삭이 없을 때 믿음에 대해서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 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❷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 믿음에 대해서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3일 길을 행한 후에 모리아 산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려 놓고 그 아들이삭을 묶어서 올려놓고 칼을 들어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려고 합니다. 자신이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의 아들이삭을 번제로 드려도 하나님은 그 하신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믿음으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은 급히 그 사자를 보내셔서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시며 아브라함의 앞을 가로 막습니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최종적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바로 그 때 아브라함의 등 뒤에서 수양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수양으로 이삭대신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고 난 후에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래’ 라 불렀습니다. 그 뜻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시기 위해 아브라함 앞서 행하시면서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전에는 아브라함이 이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 기근은 가나안 땅에 막 도착한 아브라함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민 고민하다가 물이 풍부하다고 소문난 애굽에 잠시 가서 살기로 결정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애굽 왕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큰 낭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 하셨으면 아브라함이 기근에도 견딜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믿음을 가지고 어떤 일이 생겨도 절대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다음 주부터 상계역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과정 속에서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행하시면서 은혜 주심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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