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31:48-50절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가 그 삶 속에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의 어려운 처지를 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려움과 고통 좌절과 힘듬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냐는 질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알고 계신다면 나를 그냥 내 버려두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까지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서 왜 나를 고난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냐는 질문입니다.
1.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볼 내용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즉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우리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하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에서와 야곱의 선택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한 후 20년 만에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쌍둥이는 리브가의 뱃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리브가는 그 두 아이가 평생을 그렇게 싸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응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그들이 왜 서로 다른 민족이 될 것인지를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없었던 형 에서는 불신앙적인 사람이 되고 믿음으로 살았던 야곱은 신앙의 사람이 될 것을 다 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것까지 다 아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뿐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움직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은밀한 생각과 계획, 우리 행동 배우에 숨겨져 있는 동기들까지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또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이 세상의 현재 상태만 아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와 이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나온 과거는 알고 있어도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내일 내가 어떤 학교에 갈지,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될지, 또 누구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될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 세상역사가 끝나는 그 날까지의 모든 일들을 다 아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며 사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둘째, 야곱의 생애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야곱은 7년 동안 외삼촌의 가축을 돌보아 주는 조건으로 라헬과의 결혼을 허락 받았습니다.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과 결혼할 것을 기대하면서 7년을 하루 같이 일했습니다. 그리고 7년이 차자 혼인예식을 치루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혼 첫날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신혼 첫날밤을 지낸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그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달려가서 ‘외삼촌이 이렇게 나를 속일 수 있느냐’라고 따졌습니다. 그 때 외삼촌 라반은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의 풍습이 아니라”라고 하면서 “신혼 기간인 7일을 채우고 나면 그 동생 라헬도 너에게 줄 것이니 다시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라헬을 너무 사랑했던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하여 다시 외삼촌을 위해 7년 동안 일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이 외삼촌을 섬기는 14년 동안 라반은 야곱 때문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복을 이어갈 야곱을 보고 그 외삼촌의 집에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복 있는 여자가 그 집에 새 식구로 들어와서 집이 잘 되고 형통케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라반도 그랬습니다. 라반은 전에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집에 온 이후에 라반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라반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고 자기 집을 축복해 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4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야곱을 그 집에 더 잡아 두기 위하여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지난 14년 동안은 두 아내를 얻기 위해 일했으나 이제부터는 너의 소유를 장만하기 위하여 일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 일한 품삯을 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재산을 모아 떳떳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 말을 좋게 여겨서 라반과 구체적인 품삯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가축들 중에서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 태어나면 야곱의 것이 되고, 그 나머지 것은 다 라반의 것이 된다.”는 계약이었습니다. 이 계약을 맺고 난 후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튼튼한 가축들이 물을 먹으러 모이는 곳에 세워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낳게 되는 새끼들이 다 점 있는 것이나 아롱진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한 가축이 물을 먹으러 모일 때에는 그 가지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약한 가축은 다 라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소유가 된 ‘점 있는 것이나 아롱진 것’을 따로 분리해서 라반의 가축들과 섞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43절입니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이렇게 해서 야곱이 큰 부자가 되어 가자 이런 야곱을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라반은 계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야곱과 맺은 계약조건을 바꾸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에는 검은 가축만 야곱의 것이 되고 그 나머지는 다 자기 가축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자 실한 가축은 다 검은 것이 되고 나머지 약한 가축은 라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계약을 바꾸었습니다. 이번에는 흰 것은 야곱의 것이 되고 나머지는 다 자기의 것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 실한 것은 다 흰 가축이 되고 나머지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라반은 6년 동안 무려 10번이나 야곱에게 주는 품삯을 변경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야곱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14년 외삼촌의 양 때를 위하여 6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10번이나 바꾸셨으며” 그러면서 야곱은 42절에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 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20년 동안의 자신의 수고와 억울함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외삼촌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해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야곱의 말을 통해서 또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섬겼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억울함을 다 아시고 신원해 주셨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또 어디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셋째, 라반의 고백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밧단 아람에서 살고 있던 라반은 그를 찾아와 함께 생활하였던 야곱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섬기는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것을 다 아실뿐 아니라 야곱과 함께 하시면서 은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야곱에게 이렇게 해 주셨습니까?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았던 이유는 그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 받은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에게로 이어졌고 또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은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믿는 우리들을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받고 있는 자” 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이 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주신 복인 것입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았습니까? 라반이 전에 그 소유의 가축을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나누어 맡겼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맡긴 가축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막 불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에게 맡긴 가축은 세월이 지나가도 별로 그 숫자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야곱 때문에 그 집에 복을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야곱을 더 붙잡아 두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야곱에서 품삯을 쳐 줄 터이니 더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곱의 의도와 라반의 의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더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의 소유재산을 마련해 가지고 고향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객지생활 20년을 하고 빈손으로 고향에 가는 것 보다 자기 소유를 마련해 가지고 가는 것이 더 좋아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달랐습니다. 라반은 말로는 ‘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 보다 너의 소유재산을 마련해서 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라고 하였지만 실재로는 야곱이 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기 위해서 이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주시는 복을 더 누리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야곱의 가축의 숫자는 많아지고 있는데 라반의 가축의 숫자는 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라반이 본래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시는 것을 막아 보려고 6년 동안 10번이나 계약조건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야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의 소유가 라반의 소유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고 야곱은 소와 양과 나귀와 낙타의 큰 때를 가진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라반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말씀에서 야곱과 언약을 세우면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신 하나님을 그 언약의 증인으로 세웁니다. 50절입니다.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라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야곱의 모든 억울한 일들을 다 아시고 신원해 주신 것 같이 앞으로는 야곱이 자기 딸들을 박대하는지 박대하지 않는지를 지켜보실 증인으로 불러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야곱 사이의 증인이 되셔서 공평하게 판단해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과 함께 살면서 알게 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그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 누구를 통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넷째, 라헬의 생애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은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야곱이 20년 고난의 세월을 보낼 때 야곱에게 큰 힘이 되어준 아내였습니다. 만약 라헬이 없었다면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의 20년 고난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이 있었기에 고난도 기쁘게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갈 때 라헬은 아버지가 가정의 수호신으로 섬겨오던 ‘드라빔’을 몰래 훔쳐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라헬은 왜 그 ‘드라빔’을 가지고 갔을까요? 라헬이 생각하기를 이 ‘드라빔’이 아버지 집을 지켜 주었던 것처럼 자기와 그 가정도 지켜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져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라헬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라헬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었던 야곱의 가장 사랑 받는 아내였지만 정작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은 야곱의 신앙과 달랐습니다. ‘드리빔’을 훔친 사건은 라헬의 신앙이 야곱의 신앙과 달랐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당시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라반이 볼 때에는 야곱은 자기 때문에 가정도 이루었고 또 부자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도 모르는 사람처럼 야밤도주를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도망가는 야곱을 따라 잡기 바로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이 일은 내가 시킨 것이니 너는 선. 악간에 문제를 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의 행위를 문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문제 삼은 것은 그 가정의 수호신인 ‘드라빔’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빔’을 훔친 라헬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겼습니까?
라헬은 그 훔친 ‘드라빔’을 낙타 안장 밑에 넣고 그 안장을 깔고 앉아서 마침 경수가 났다는 거짓말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은 곧 들통 날 거짓말입니다.
당시 라헬은 출산을 앞둔 만삭이 된 여인이었습니다. 라헬은 이제 몇 일후에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라헬에게 경수가 터졌다는 말은 누가 봐도 거짓말임을 금방 알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라반과 그 아들들이 이 거짓말을 모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런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소돔 땅에 살고 있던 롯과 그 가족을 불쌍히 여겨 구해 주셨던 일이 있습니다. 저는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제 20년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을 생각하사 ‘드라빔’을 훔친 라헬이 그 아버지의 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라반과 그 아들들의 눈과 귀를 가려 주셔서 라헬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야곱의 입장을 다 아시고 야곱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라헬의 범죄가 드러나서 그 아버지의 진노를 받게 된다면 이것은 야곱이나 그 자녀에게 회복할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이것은 또 조금 있으면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향해 오고 있는 에서를 맞이할 수 있는 용기를 다 빼앗아갈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야곱과 함께 하시면서 라헬을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야곱은 그를 해치려고 군대를 끌고 오는 형 에서의 손에서 자신과 가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얍복강 가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라헬이 지은 죄까지 다 눈감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후 라헬은 베냐민 출산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면 라헬은 왜 죽었겠습니까? 죽은 자의 특징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라헬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후 문맥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한 라헬이 분노한 라반의 눈을 피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생각하사 라반과 그 아들들에게는 발각되지 않도록 해 주셨지만 그 지은 죄까지 다 눈감아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할 때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다윗이 회개할 때 바로 그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 죄에 대한 형벌까지 면제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범죄 한 이후 그 죄에 대한 형벌로 수 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며 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죄를 짓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면 그 지은 죄는 용서해 주시나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받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은혜로 역사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해 볼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은혜로 역사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이 그 외삼촌 집이 있는 밧단 아람에 가서 살았던 20년의 삶을 통해 또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를 믿는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은혜로 역사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늘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뿐 아니라 그 삶속에 함께 하시면서 은혜와 능력으로 직접 역사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오래하였어도 하나님께서 그 삶에 함께 하시면서 도우시는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경험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로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누리고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살펴보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우리 입장과 처지를 아시고 은혜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어주시는 하나님이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햇빛을 내려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은혜,’ 또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보편적인 은혜 때문에 범죄한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루만 태양을 거두어가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즉시 인류의 멸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구의 축이 23.5도 정도 기울어서 자전하고 있는데 만약 하나님께서 지구의 축을 조금만 변화를 주셔도 지구기후와 환경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증거에 의하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달이 없으면 지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려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의 상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상태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사람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일반적인 은총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에는 이런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구분해서 주시는 ‘개별적인 하나님의 은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도 있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은혜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서 고통하고 아파하고 있고 또 그 가족들도 모두 염려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냥 그렇게 아파하면서 집에 가만히 있는 그 사람의 집에 찾아가서 은혜로 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특별한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보면 혈루 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 받은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 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 즉시 그 병에서 놓여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 동안 수많은 의원에게 갔으나 그 병을 고치지 못하고 또 그 있는 돈까지 다 탕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될 때 그 마음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병을 고쳐주시는 은혜를 믿고 예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마음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또 친구들이 들것에 뉘어 예수님께 나아왔던 중풍병자도 같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그 친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들것에 눕혀서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믿는 마음을 보시고 그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다 그 병을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은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갔다가 은혜로 병 고침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누워 있는데 하나님이 그 병을 고쳐 주셨으면 그 병 고침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셨는지 전혀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믿음으로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라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드리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면 왜 그냥 역사해 주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믿음을 보고, 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마음의 소원도 믿음도 없고 기도하지도 않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임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임을 알게 하시려고 믿음을 요구하고 기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임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이 예비하실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누리며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소원이 있든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마음이 있든지,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하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가족이 믿음으로 구원 받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면 우리 마음에 우리 가족이 예수 믿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소원에 응답해 주셔서 우리의 가족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장차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살려고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대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그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은혜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입을 넓게 열어 기도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해 주셔야 그 응답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역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믿음으로 기도하고 작정하고 기도하고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그 일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뮬러를 보십시오. 그는 고아를 굶기지 않고 먹이는 삶을 살기로 하고 그 일을 위해 기도에 헌신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헌신을 보고 5만 번이나 응답해 주셔서 한 번도 고아들을 굶긴 일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시간을 더 늘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회 사역을 위해, 재가복지센터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더 기도하고, 재림의 주로 오실 주님께 더 민감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 더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도 어떤 결단이 있어지길 바랍니다.
야곱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물을 먹으러 모이는 양들 앞에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과 우리 교회와 재가복지센터 등등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또 구체적인 삶의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역사들을 누리고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믿음과 기도와 헌신하는 삶을 살아서 이렇게 믿음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야곱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도 날마다의 삶 속에 경험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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