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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4. 27. 17:02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7-27

 

. 기독교의 부활신앙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종교는 어떤 종교이든지 다 같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면 어떻고 불교면 어떠냐?’라고 말합니다. 다 좋은 말을 하고, 다 잘 살라고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어떤 종교를 믿든지 다 자기 수양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다 사람에 의해 시작된 종교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다 사람의 노력과 수고를 강조한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 사이에는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바로 부활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면 다른 종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기독교 이외의 그 어떤 종교에서도 그 창시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불교를 보십시오.

석가모니의 무덤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잘 꾸며져서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습니다.

유교를 보십시오. 공자의 무덤은 공산주의 국가 안에서도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회교를 보십시오. 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무덤은 신령한 성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빈 무덤만 남아 있습니다. 그 빈 무덤이 덩그러니 남아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1. 부활신앙의 증인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기독교 신앙을 한 마디로 말해 달라고 하면 어떤 말을 해 주시겠습니까?

시간을 다투며 죽어가고 있는 환자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여러분이 전해주고 싶은 단 한 마디 말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부활신앙을 전해 줄 것입니다. 사망을 앞에 놓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망을 이기고 살아나신 부활의 소식을 전해줄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뼈대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힘과 능력은 바로 부활신앙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죽을 똥 살 똥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이 아닙니까? 죽을 각오로 덤벼드는 사람들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힘과 능력은 이런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을 믿고 있기 때문에 죽음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신앙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2. 부활을 부정하는 견해들

 

이런 다양한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계속 있어왔습니다. 그러면 부활을 부정하는 어떤 견해가 있어 왔습니까?

 

그 첫 번째 견해가 도적설입니다. 마태복음 27:62-66, 28:11-15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 즉 내가 죽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3일 동안 무덤을 굳게 지켜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 간 후에 예수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다시 살아났다고 하고 다니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보다 더 큰 혼란이 오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굳게 인봉되었고 무장한 군병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염려와 로마 군병들의 지킴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염려와 달리 진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목격한 군병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러면 이때라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라도 그 잘못을 회개하고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토론을 거쳐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자신들이 잘 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군병들은 많은 돈을 받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이 소문이 진짜인 것처럼 두루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군병들과 그 소식을 전해들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이 꾸며낸 거짓말로 진리를 가려 보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마치 손을 눈앞에 대고 하늘이 없다. 하늘이 없다.’라고 소리치는 사람들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이 하늘은 없다.’ 라고 한다고 하늘이 없어지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라지는 것입니까? 이렇게 해서 도적설이 널리 유포되게 되었습니다.

 

그 두 번째 견해가 무덤 오인설입니다.

무덤 오인 설은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다가 다른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주장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아닌 다른 빈 무덤을 보고 울고 있다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무덤 지기를 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오인했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6:2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던 때는 이미 해 돋은 후였다고 합니다. 이것도 잘못된 억측에 불과합니다.

 

그 세 번째 견해가 기절설입니다.

기절 설은 이렇습니다. 기력이 쇠잔할 대로 쇠잔해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하고 계셨기 때문에 많은 출혈로 빈혈이 발생해서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줄 알고 장래를 치루었으나 예수님은 서늘한 무덤 속에서 또 장래를 위해 발라 놓은 향냄새를 맡으면서 몇 시간 쉬신 후에 다시 기운에 솟아나서 깨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9:33-34절을 보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렇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확인한 후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 네 번째 견해가 꾸며낸 이야기나 전설이라는 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나 전설이라는 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 기사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어떻게 꾸며낸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12명의 제자 중에 사도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목숨까지 버리며 순교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들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해 한 사람도 아니고 거의 모든 사람이 순교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설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 다섯 번째 견해가 환상설입니다.

이 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는 환상을 보았다는 설입니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예수님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지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 설입니다. 이 설은 부활을 부정하는 설들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두 사람도 아니고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500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동일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설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역사상 많이 있어왔지만 그것들은 사실도 아닐뿐더러 또한 설득력도 없는 내용들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을 지지하는 증거들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는 확실한 증거는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 1: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40일 동안” “저희즉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여주신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 빈 무덤입니다. (24:1-3)

죽어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둘째, 천사들이 증거입니다. (28:5-6)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갔는데 갑자기 지진이 나고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그 돌 위에 앉아서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 누우셨던 것을 보라라고 하면서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거 해 주었습니다.

 

셋째,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입니다. (고전 15:3-8)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게바” “12제자” “500여 형제가 보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바울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500여 형제 중에 절반은 죽고 아직 절반은 살아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다수의 여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넷째, 사도들의 증거입니다. (2:32, 3:15, 4:20)

사도들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들은 자신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들었다고 증거하며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사도들이 변화된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생애를 바쳐 따랐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힘없이 무력하게 죽으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두려움과 슬픔에 잠겨(20:19) 낙심하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약하던 제자들이 갑자기 변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 부활의 도를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믿고 또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변화는 예수님이 이들에게 부활의 영이신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여섯째, 오늘까지 지켜오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지키는 주일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 대신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날짜 적으로는 오늘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이지만 우리는 사실 매 주일 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킴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고 또 우리가 가진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부활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바로 부활의 증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위에 서 있습니다. 이 부활신앙은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신앙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다른 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지만 기독교는 참 생명의 종교라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부활신앙을 파괴하려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악한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부활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부활신앙을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빈 무덤이 그렇습니다. 수많은 목격자들이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를 만나고 삶이 완전히 변화된 사도들이 그 증거입니다. 또 예수님을 만난 우리들의 변화도 부활신앙이 참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더 이상 죽음이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부활신앙 안에서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생을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 이 부활절을 맞아 다시한번 확실한 부활신앙에 굳게 서서 죽음 이후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확인하며 죽음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미혹하는 마귀를 이기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부활이요, 자신이 바로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동사는 헬라어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 다른 말로 하면 영원한 현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부활이요, 나는 언제나 생명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나 부활이요. 언제나 생명이라는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영적인 존재인 천사의 생명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의 생명도 저 들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예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말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은 생명을 잃게 된 그 사람에게 범죄한 것이기 이전에 그 사람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범죄한 중대 범죄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자살도 성경은 동일하게 살인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명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낙태’ ‘안락사문제가 있습니다.

낙태는 헌법재판소가 지난 11일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습니다. 안락사는 낙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찬성을 하고 있습니다. 안락사는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의 생명을 연장해 주기 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고통 없게 되는 것이 더 났다고 생각하여 고통 없게 죽도록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안락사도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범죄 하는 일종의 살인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자녀의 생명은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가 낳았으니 우리의 것입니까? 우리 자녀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은 그 동생 아벨에게 악을 행하는 살인죄를 범하였을 뿐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도 범죄 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에게 주신 생명에 해를 가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범죄는 바로 이방종교에서 아들을 제물로 삼아 그 신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신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에서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드린 모리아 산제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삭을 하나님이 지시하는 한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만약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이 이방종교에서와 같이 그 신에게 아들의 생명을 바치는 희생으로 생각했다면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못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아들이삭을 바칠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과 그 아들이삭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 그 아들의 생명을 바치라고 하니 바쳤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생명을 바치라고 하여도 바쳤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그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이 행동을 통해 인간의 생사여탈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이 자신과 그 아들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종교와 아브라함의 신앙의 다른 점입니다.

이방종교에서 아들을 드리는 종교 의식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범죄 하는 행위였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드린 것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믿습니까?

 

사람들이 주일을 못 지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주일을 못 지킨 것을 동일하게 보시고 판단하십니까? 아닙니다. 왜 주일을 못 지키게 되었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은 다르게 판단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 주일을 못 지키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자기 입장과 자기 유익을 위하여 주일을 못 지키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짓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 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유익을 위해 거짓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거짓말을 똑 같이 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기생 라합을 통해서 이것을 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악한 마음으로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자살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노인들의 자살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자살을 우리 기독교에서는 죄로 여깁니다. 자살은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끊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언제나 부활이요. 나는 언제나 생명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의 생명을 취하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생명 그자체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왜 나는 언제나 부활이요. 나는 언제나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은 인류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을 취하신 분이심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죽음의 분리는 언제 일어났습니까? 인간이 죄를 범하여 죄인이 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망의 어둠 속에 있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런 자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5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복음서(4:16)에서도 이렇게 증거 합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이런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사망의 그늘진 이 세상을 비취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생명의 빛을 비취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친히 사망을 이기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구주가 되심을 세상에 드러내 주셨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한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외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부활신앙을 가졌던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 1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빛이 만방을 비취고 열방이 그 빛으로 나아오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0:3입니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 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취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부활이요. 언제나 생명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의 생명을 취하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실 뿐 아니라 죽은 우리 생명을 다시 재창조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고린도 전서 15:4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은 죽은 영혼들을 살려주는 영으로서 아담 안에서 죽어 있던 우리의 영적 생명을 다시 재창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하고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생명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전에 아담 안에 있을 때에는 사망이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또 다른 길인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누리며 살 수도 있고 사망의 길을 택하여 여전히 죽음 가운데 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때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당시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상황이 완전히 끝났습니다. 나사로의 몸이 썩어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사망 권세가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선포하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현재형으로 나는 언제나 부활이요, 나는 언제나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부활주일에 어떤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부활신앙은 미래적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현재적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를 믿게 될 때 우리는 이미 부활의 생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미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신앙은 달랐습니다. 32절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런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심한 분노를 느꼈음을 뜻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심한 분노를 느끼셨습니까? 그 이유는 언제나 부활이요 언제나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슬피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아이와 아빠가 길을 가다가 그 아이가 평소에 갖고 싶은 인형을 보았습니다. 아빠는 그 아이에게 인형을 사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 아이는 나는 저 인형 갖고 싶은 데 나는 저 인형 좋아하는데 나는 돈이 없네.’라고 하면서 대성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아빠가 그렇게 우는 아이에게 내게 그 인형을 사 줄 돈 있다고 해도 아이도 계속 울고 있고 또 옆에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함께 슬피 우는 것입니다. 이 때 그 아빠가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시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로 사망권세를 멸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생명을 주실 분으로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앞에 두고 죽음 앞에 절망하며 울고 있는 마리아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실 때 그 심정이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9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이 말씀은 아빠가 아이에게 저 인형 사러 가자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것은 내가 언제나 부활이고, 언제나 생명이신 것을 보여주시겠다.’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조금 전에 이 마르다는 예수님의 현재적 부활과 현재적 생명을 믿는 다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마르다의 고백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을 보면, 첫째,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부활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부활을 이론적으로는 믿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 부활을 이론적으로도 믿고 실제적으로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재적으로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참 신앙이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비록 현실 속에서는 오빠의 육신이 썩어 냄새가 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을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후에 마리아와 함께 돌을 옮겨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려면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은 큰 돌이기 때문에 이 돌을 옮기는데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두 자매가 있는 힘을 다해 밀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돌을 밀기 전에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마음속에 있는 불신앙의 돌을 밀어내었습니다. 그러자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고 순종하자 그 믿음의 결과를 보았습니다. 죽은지 나흘이 되어 그 몸이 썩어 가든 오라버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들이 믿음으로 순종한 것이 기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게 되려면 먼저 마음 안에 있는 불신앙의 돌을 먼저 옮겨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자식을 주신다고 할 때 어떻게 믿었습니까? 그 마음 안에 있는 불신앙의 돌을 먼저 옮겨 놓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부활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불신앙의 돌을 밀어낸 후에 부활 생명을 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의 생명을 주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이론적으로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지식적으로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부활이고 언제나 생명이신 것을 실재로 믿어야 합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우리가 비록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비록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이 부활주일에 우리가 가지고 고백하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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