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당신은 작정과 예정을 믿는가?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8. 7. 26. 19:16




당신은 작정과 예정을 믿는가?

에베소서 1:3-6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시고 그 계획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을 신학적으로 작정 혹은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만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보면 지구는 둥근 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구의 중간 부분인 적도지방과 남쪽과 북쪽 끝에 있는 극지방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가 서로 다릅니다. 태양으로부터의 이 거리의 차이가, 태양에서 나오는 열을 서로 다르게 받게 하여서, 적도지방은 사시사철 더워서 힘들고, 남북극 지방은 얼음 왕국이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지구를 지금보다 태양 쪽으로 조금 더 가깝게 해놓으셨다면, 지구는 너무 뜨거워서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되고, 만약 지구를 지금보다 태양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게 해 놓으셨더라면, 아마 지구는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행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아주 이상적인 거리에 두셨기 때문에, 지구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행성이 된 것입니다.

 

여기 겨울이면 날씨가 추워져서 전기스토브를 켜 두는데, 이 스토브에 우리 얼굴을 너무 가까이 갖다 대면 그 열 때문에 곧 화상을 입게 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따뜻한 기운이 오지 않아서 추위를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 또 지구를 보면 그냥 머물러 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 한 바퀴씩 자전을 합니다.

그것도 지구를 23.5도 기울게 해서 돌게 함으로, 전 지구가 태양 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설계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 그리고 이 지구가 태양 주변을 1년에 한 번씩 돌도록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달이 지구를 한 달에 한 번씩 돌도록 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 과학자들은 만약 지구를 도는 달이 없었다면, 지구가 23.5도라는 일정한 기울기를 유지하며 자전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태양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돌 수 없게 되어서, 결국 지구는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구에 달을 붙여 주셔서, 달이 지구가 안정적으로 태양을 돌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 또 과학자들은 태양계의 행성들, 즉 수성, 화성, 목성, 토성, 명왕성과 같은 행성들은, 일정한 자기 궤도를 유지하고 돌고 있지만, 이 태양계와 우주 안에는 불규칙한 상태로 떠돌아다니는 유성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성들은 우주를 떠돌아다니다가 행성들의 인력에 이끌리어 떨어지는 일이 허다한데, 하나님께서는 지구 바로 바깥쪽에 거대한 목성이 자리 잡고 있도록 해 주셔서, 이 목성이 강한 인력으로 지구로 떨어지려고 하는 유성들을 막아주는 방패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구가 지금까지 유성들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달도 지구가까이 있으면서 이런 역할을 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달 표면의 사진을 보면, 달에 얼마나 많은 유성들이 떨어졌는지 알 수 있는 흔적들을 볼 수 있지요.

 

이 뿐 아닙니다.

성경은 이 광대한 우주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 터럭 하나까지, 머리카락이 희고 검게 되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며, 심지어 우리 하나님은 들에 피어난 이름 없는 작은 들풀이나, 공중을 날아다니는 참 새 한 마리가 사냥꾼의 총을 맞아 떨어지는 것까지도 다 주관하고 계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님의 일반 계획과 하나님의 특별계획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일반계획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온 그런 정하심 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향한 작정들을 하나님의 일반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특별계획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특별계획은 이성적인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구원과 관계되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예정을 살피기 전에 살펴보아야 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정의할 때,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의 구원과 관계되는 하나님의 특별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정에 대한 정의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예정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살필 때에는 반드시 이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은 설명할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반영하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성경말씀은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25절을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사물들 합친 것 보다 더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저 끝을 볼 수 없는 광대한 우주보다, 이 지구라는 작은 위성에 살고 있는 한 인간을 더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하신 이 세상 전부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신 그 한 사람을 더 가치 있는 존재, 존귀한 존재로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돈 좀 많이 가졌다고 자랑할까요?

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갑부가 누구예요. 빌게이츠이든지, 워렌버핏이든지 하겠지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할까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빌게이츠워렌버핏이나, 그 가진 소유를 부러워할까요?

 

제가 제일 한심하게 보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지요?

자랑거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나, 그 다니는 직장이나 지위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세요. 그가 예수 믿기 전에 자랑거리였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예수 믿고 난 후에는 마치 배설물 즉 똥과 같이 여겼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고백이 거짓말이었을까요?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지요?

이 사람들은 인간의 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보다 돈을 더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가진 돈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은 사람보다 돈을 더 가치 있게 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사람보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금은보화와, 명예, 지위 이런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유를 보고 사람들을 차별대우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귀하게 보시는 것을 존귀하게 보고, 하나님이 가치 있게 보시는 것을 가치 있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 가진 재물을 허비하기도 하고, 예수 믿지 않는 한 영혼이라도 구원을 받게 하려고 교회를 세우고 또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셨으면, 그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시고, 또 그렇게 인간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지요.

 

우리가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예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얼마나 귀하게 보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그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이 비로써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의 예정이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알려고 하면 또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합니까?

둘째,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을 다 창조하시고 난 후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존재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저 끝을 알 수 없는 이 우주를 누구를 위해서 창조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실 그 인간을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하신 세계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셔서, 아담과 하와는 마치 자기가 이 세상의 소유주인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하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무를 동산 중앙 아주 잘 보이는 곳에 두셨습니까? 그래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이 나무를 볼 때마다, 자신들이 이 세상을 창조한 주인이 아니고 피조물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누리며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다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뱀을 통해 유혹하는 사단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의 율법을 어긴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은혜로 주신 것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금하신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과일과 채소들은 아담과 하와가 마음대로 취하여도 전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선악과는 다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취하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를 훔친 절도가 되고,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악과를 취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그 가진 돈 중에서 일부를 한 달 용돈으로 자녀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자녀는 그 돈을 알아서 써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 그런데 용돈이 떨어진 자녀가 돈이 필요하다고 부모의 지갑에 있는 돈을 마음대로 꺼내 가면, 이것은 부모의 허락 없이 가져간 돈, 부모 몰래 훔쳐간 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이와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모든 것들은 마음대로 먹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이 정도 살펴보았으면 이제 우리는,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의 구원과 관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인 예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함을 받은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서, 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법으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죄인이 됨으로 구원이 필요하게 된 인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2. 이제부터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정의할 때, 예정이란?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의 구원과 관계되는 하나님의 특별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이 정의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예정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필요로 하였던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예정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중보자의 예정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하신 인간을, 자신의 분신과 같이 생각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게 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존귀하게 여기시던 아담과 하와가 그 주신 율법을 어기고 범죄 하였을 때 우리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마치 어느 날 의사로부터 그 자녀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진단을 받고 눈앞이 캄캄해진 그 부모의 심정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니면 어느 날 자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괴한에게 납치되어 갔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하게 된 그 부모의 심정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때 부모가 느끼게 되는 당혹감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때 부모라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허비하고서라도, 그 병든 자녀를 고치려 하고, 그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부모는 그 자신의 생명을 그 자녀의 생명과 대신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자청하여서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대신 납치 되어 가고 그 자녀를 풀어 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자청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우리 하나님께서 그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서 죄인이 되고, 그 지은 죄로 인하여 그 영혼이 죽고, 결국에는 지옥에서 영원히 그 죄의 형벌을 받고 살아야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대신 그 죄를 지고, 고난과 고통과 형벌을 다 당하시게 되더라도, 죄와 죄의 형벌에서 아담과 하와를 구원해 내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죄를 대속해 주시는 중보자의 예정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보자의 예정에 대한 첫 약속이 창세기 3:15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인류의 구세주를 보내 주셔서,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을, 그 지은 죄와 죄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그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그 죄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내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해 주신 이 메시야의 약속을 들으면서 우리 마음 안에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 못하실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께서, 왜 그냥 아담과 하와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고, 이렇게 중보자를 보내셔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의문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이 너무 좋으면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금의 불의함도 없으시고 완전히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아무 근거도 없이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향해 너는 너를 천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해 주노라.’ ‘이제부터 너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신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판사가 실수로 죄를 범하고 자기에게 재판을 받게 된 그 아들을 재판하면서, 너는 내가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이고, 또 나는 내 마음대로 판결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판사이니, 내가 딱 한번만 너의 죄를 없었던 것으로 사해주노라.’ 라고 무죄 판결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판사는 공정한 재판관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판사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관이 되고, 자기아들을 위하여 자기의 지위를 남용한 불의한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의로운 판사라면, 그에게 재판을 받는 사람이 비록 사랑하는 아들일지라도, 그 지은 죄에 대한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정한 재판관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비록 전능하신 하나님, 못하실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의롭고 공의로운 재판장이 되시려면, 반드시 아담과 하와에게 죄에 대한 형벌을 치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고 죄인이 된 아담과 하와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 계획이 바로 아담과 하와를 그 죄에서 구원해 내시려고 정하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구원 예정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정이라고 하면 딱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정을 무미건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져 있습니다. 영이 아버지가 그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하신 아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서 작정하신 것이 바로 예정입니다. 여기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희생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또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공자나 석가모니, 마호메트가 인류의 구주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만이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중보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는 동해보상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 동해보상의 원칙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손해를 끼치면, 그 끼친 손해만큼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동해보상의 원칙에 의하면 누가 아담과 하와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있습니까?

첫째, 반드시 아담과 하와와 동일한 사람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대신 보상해 주여야 합니다. 둘째,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죄를 대신 보상해 줄 사람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도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담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에게 속하여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후손으로 태어난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는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성자 하나님을, 성령을 통해 마리아의 몸에 잉태하게 하셔서, 죄가 전혀 없으신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 즉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리해 주신 이 죄에서의 구원을 믿는 사람들이 그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은 복음, 우리가 믿고 세상에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렇게 범죄 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을 사랑하사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예정하신 하나님께서는 또 무엇을 예정하였습니까? 둘째, 인간의 선택과 유기를 예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은 선택과 유기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해 주시기로 만세 전에 택하여 주심을 말하며, 유기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 죄 가운데 그양 내버려 두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도록 택하셨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유기해 두셨습니다.

 

- 우리가 이렇게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인 선택과 유기를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운명론이나 숙명론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또 어떤 사람들은 선택과 유기가 정해져 있다고 하면 그러면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전도를 하지 않아도 구원받기로 선택된 사람들은 때가 되면 믿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 또 다른 사람들은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예정을 거역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믿지 않는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합니다.

- 또 어떤 사람들은 선택과 유기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면 하나님은 불공정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을 차별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견해들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인간의 자유의지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립적으로 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시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 하나님의 예정이 무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 둘은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말할 때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선택과 유기를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100%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죄 가운데 멸망당하도록 그대로 유기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선택과 유기를 사람의 편에서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을 선택하고, 믿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100% 자기의 의지로 결단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면, 그 선택을 받은 그 사람은 또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를 믿는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는 것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예정이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유기하시기로 예정하셨다면, 그 유기하기로 예정된 그 사람은 자신도 예수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유기와 그 사람의 믿지 않기로 한 결단이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정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은 서로 다른 양면이 합쳐져서 하나의 동전이 되듯이,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결단이 하나가 되어서 선택과 유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예정론은 100% 하나님의 선택과 100%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예정을 오해해서, 인간의 운명은 50%의 하나님의 선택과 50%의 인간의 자유의지적인 결단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신인 협력설이 나왔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비록 그 사람을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해 놓으셨을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예정에 반응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분되지 않으며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성경에 나오는 한 인물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라는 키가 작은 유대인으로서, 부자였고 또 세리 장으로 여리고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삭개오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보았던 세리 장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회당예배에도 성전예배에도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동족에게 배척을 받고 있었던 삭개오는 유대인이면서도 마치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가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달리 세리와 죄인들도 용납하시고,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정죄하고 배척하였던 각종 병자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시고, 심지어 가버나움 세관에서는 세리의 업무를 보고 있던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 삼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런 소문을 듣고 삭개오의 마음속에는 나도 그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여리고를 향하여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을 때 삭개오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그 마음속에 있어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유대인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그는 모든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생각해 낸 것이 뽕나무가 많이 심겨 있는 언덕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그 길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미리 뽕나무 밭으로 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시는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런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하루를 유숙하시게 됩니다. 이 때 삭개오가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이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삭개오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삭개오는 자신도 자유의지적인 결단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원주시기로 예정하신 것과, 개인이 나아와서 믿게 되는 의지적 결단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 삶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삭개오와 달리 예수님께 나아와 불치의 병을 고침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곳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했습니까? 처음에는 그 불치의 병을 고침 받은 것 때문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 그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11:20,23) 이 사람들은 비록 예수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유기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바른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께서 100% 예정하신 가운데, 우리도 또 100% 신앙적인 결단을 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나는 평생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신앙적인 결단을 하고 믿고 있으며, 이런 우리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삭개오와 은혜로 병 고침을 받고도 버림받은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삶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대로 반드시 될 뿐 아니라, 또 우리가 자유로운 의지로 결단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정을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100%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편에서 보면, 100% 인간의 결단과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 둘이 합쳐져서 하나인 것입니다.

 

이 말을 달리 설명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있고, 또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하고 있다면, 이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신 사람이라는 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삶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확인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을 굳게 잡고, 우리 앞에 그 어떤 고난과 그 어떤 어려움이 다가올지라도, 장차 예수님을 만나게 될 그 날까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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