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비
예레미야 애가 3:22-26
‘자비’라는 말은 사실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고 자비가 불교에만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믿고 섬기며 사는 하나님께서도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비’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전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얽어매고 있는 죄의 문제를 그 아들의 복음 안에서 깨끗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 죄가 인간의 마음에 미친 그 죄의 상처까지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예수 믿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여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자비는, 인간의 메마른 영혼, 갈급한 영혼을 치료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치료는 그 치료되는 한 순간만 기쁨을 누리고 마는 일회적인 치료가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셔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회복을 이루어 주시는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은혜를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78:38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자비의 주님이시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2:17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 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도 자비의 영이시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22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이렇게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도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우리 주 예수님도 자비의 주님이시고, 성령 하나님도 자비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 삼위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마태복음 1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우리 삶 속에 자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큰 증거입니다.
반대로 우리 삶 속에 자비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신 것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라면 우리 마음 안에도 자비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죄인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가혹합니다.
그래서 실수로 한 번 죄를 지은 사람은 전과자가 되어서 영원히 죄인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전에 노무현 대통령 때 이명박 대통령의 BBK 사건을 얼마나 열심히 파해쳤습니까? 그러더니 상황이 바뀌자 이명박 대통령이 도리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를 파해 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제 또 상황이 바뀌자 문제인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의 비리를 파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첫째,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1: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사람들은 죄지은 사람, 범죄한 사람들을 보면 쉽게 그 사람을 정죄하려고 합니다.
이 때 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지은 죄와 그 사람을 함께 정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은 사람도 정죄하고 그 지은 죄도 정죄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그 범한 죄와 그 죄를 지은 사람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는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죄와 죄인을 동일하게 보시지 않고 구분하여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는 철저한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지만, 죄를 지은 인간은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지은 죄를 묵과하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심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정죄하고 심판하심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인간은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죄인과 죄를 구분해 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사람들을 볼 때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죄와 그 죄를 지은 사람을 같이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볼 때, 죄에 빠진 사람, 죄의 노예가 된 사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귀신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귀신들린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귀신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귀신이 들려서 고통 하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마귀의 유혹을 받아 범죄 함으로 죄의 노예가 되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죄의 피해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빠진 인간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을 잘 알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가시덤불을 헤치고, 험한 길을 지나고, 바위산을 넘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어린 양을 찾아 헤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과 열심을 가지시고 우리 죄인들을 찾고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에 대해 이사야서 54:8절 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진노하시는 것은 잠시 잠깐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지은 죄를 회개하고 나가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자비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인 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죄인된 우리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지 않습니까?
존이라는 사람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예선 그레이하운드 호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도덕을 비웃고 종교를 조롱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탄 배가 어느 날 밤에 엄청난 파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가 잠을 깨어 보니 선실에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배의 한쪽 옆이 파손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선원들과 함께 밤새도록 펌프로 물을 퍼내며,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만 가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신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여서 그와 선원들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폭풍이 몰아치던 그 날 밤 대서양 바다 가운데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자비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자비 앞에 회심하게 되었고, 나중에 영국으로 돌아가 많은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 시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우리의 영원한 찬양은 바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비는 죄인을 용서해 주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여 지상에서 사실 때, 죄인 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심을 가지시고 평생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사람들이 왔을 때,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서 저항합니다. 그래서 그 무리 중 한 사람의 귀를 쳐서 떨어뜨리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 낮게 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이것까지 참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채 고통을 당하고 이제 임종을 앞두고 계시면서 하나님께 한 가지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죽이고 모욕하고 저주하는 그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저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럽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에서도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자비하심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은 일이 있습니다. ‘주님 사람의 죄를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꼭 일흔 번씩 일곱 번 까지만 용서해 주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제한으로 용서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자비하심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렇게 전혀 제한이 없이 무제한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빌 때마다 모두 용서해 주십니다. 그 사람이 뒤돌아서면 곧 바로 다시 죄를 지으실 줄 다 아시면서도 회개하고 나오면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증거들을 사사기를 통해 잘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들을 들어서 징계하시고, 하나님의 징계하심으로 고통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예레미야는 그 애가 3: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기서 인자는 바로 자비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범죄하고 또 범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그 잘못을 반성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아들이 진심으로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고 나올 때, 아버지는 그가 이전에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해 단 한마디의 책망의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아들의 잘못을 철저히 용서해 준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추궁하고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줌으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또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배설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그러면 죄인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몸소 지시고, 죄인의 위해 대신 죽어주신 십자가 희생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자랑거리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꺼리 끼는 것이요 헬라 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를 자랑거리로 알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비는 죄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정죄를 받고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리와 목자들과 중병에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리 마태를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셨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밖에 있는 사람, 매국노라고 배척을 받고 있었던 마태의 마음의 상처까지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태와 동일한 세리였던 세리 장 삭개오를 돌 무화과나무 밭에서 부르셔서 구원해 주시고 또 그 마음의 상처를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렇게 구원의 은혜와 함께 그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 상처를 드러내고 그 드러난 상처를 찌르고 찔러서 더 큰 상처를 입도록 합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고, 그 약점을 이용하여 그 사람을 비난합니다. 또 그 사람들의 숨은 죄를 찾아내어서 정죄하고 그래서 그 마음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살아가는 것 같이 느껴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죄와 악으로 인해 상처 받은 마음을 그 크신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셔서, 죄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의 회복까지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감화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복음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어떻게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 영국의 청교도 작가였던 ‘스테판 차르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십자가 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겸손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권한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랑이 없으면 그 자비를 활용할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누리면서, 자신도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비로운 행동은 사랑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지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신실함이 없으면 그 자비를 풍성하게 할 명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비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신실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꽃피우는 것은 신실함이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자비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려운 사람, 고통 하는 사람,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자비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덮어주고 싸매 주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에게 자비가 없는 것입니다. 자비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또 죄인의 죄를 용서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까지 치료해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자비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자비를 더 깊이 알아가고 체험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나는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를 입고 사는 나도, 이제 하나님을 따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주고, 마음의 상처를 싸매주는 자비의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인 자비를 소유하게 되고, 그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새 사람으로 변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높은 차원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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