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의 복
마태복음 5:10-12
우리 마음속에는 본래 범죄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옛사람의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 팔복의 마음을 은혜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들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옛사람의 마음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주신 팔복의 마음을 함께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팔복의 마음을 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또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셔서,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 화평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우리들이 하나님께 받은 직분이 바로 ‘화목의 직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화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살 수 있는 이 차원 높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본 말씀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팔복의 마지막 마음인 ‘의를 위해서라면 박해받는 것까지 기쁘게 감내하는 마음’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세속적인 학문과 우리 신앙과의 비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을 우리 신앙과 세속적인 학문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전에는 이 세상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을 거의 종교인이 해 왔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이후에 교회에서는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뿐 아니라,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터부 시 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또 종말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상한 사람 대하듯이 해왔습니다. 이런 영적인 분위기를 이어받은 현대교회는 종말에 관한 말씀을 거의 전하지 않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이르러 있다는 말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전공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세상 종말이 가까웠음을 이야기해 오고 있습니다.
기상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상 기온 현상이 결국 지구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구의 자기장의 변화를 통해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천문학적 전문 지식을 가지고 지구 종말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자본주의 경제가 결국 이 세상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렇게 이 세상의 종말과 지구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말해오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이런 세속적인 학문을 연구할 시간도 없고 연구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구해 놓은 연구 실적들을 종합하고,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지만 세속적인 학문의 열매들을 우리 신앙의 유익한 도구로 이용하며 살아갑니다. 지구 종말이 암박하였다는 객관적인 자료를 우리도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세속적인 학문과 팔복의 말씀과의 비교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산상 설교에서 주신 이 팔복의 말씀과 심리학자 마슬로우가 정리한 동기부여 이론을 비교해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심리학자 마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생리적 욕구의 단계’라고 합니다. 이 단계는 먹고 사는 것에 매여 있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 두 번째가 ‘안전의 욕구의 단계’라고 합니다. 이 단계는 정신과 마음의 안정을 추구하며 살게 되는 단계입니다. 그 세 번째가 ‘소속과 애정의 욕구의 단계’라고 합니다. 이 단계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사회 속으로 특정 단체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단계입니다. 그 네 번째가 ‘자아 욕구의 단계’라고 합니다. 이 단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단계,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 다섯 번째가 ‘자기실현의 욕구의 단계’라고 합니다. 이 단계는 그 자신이 하늘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보람을 느껴보려고 하는 단계입니다.
‘마슬로우’는 이 인간 욕구의 다섯 단계는 ‘동시’에 실현될 수도 있고, 또 ‘순차적’으로 실현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실현될 때는 언제나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높은 단계로 순차적으로 실현되어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마슬로우’는 인간 욕구의 최고의 단계를 ‘자아실현의 단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팔복의 말씀을 보면 이 ‘자기실현의 욕구’를 넘어서는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10절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말씀에서는 올바른 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 삶을 위해서라면, ‘박해’와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는 ‘자기희생적인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여덟 번째 단계에 이른 마음,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핍박과 박해까지도 감수하고자 하는 이 마음은, 이기적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었습니까? 성경의 기록을 보면 전에 우리 주 예수님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죄인 된 인간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신성을 버리시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육신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성을 취하신 이후에는, 인간이 당하며 사는 그 모든 고난을 몸소 당하며 사셨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원인이 되었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죄를 그 한 몸에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주시는 것까지 불사하셨습니다. 이런 자기 부인의 삶, 자기희생적인 삶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자기 부인의 삶, 자기희생적인 삶은, 마슬로우가 말하고 있는 자아실현의 삶을 훨씬 넘어서는 삶입니다. 이 삶은 이기적인 인간은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이타적인 삶이며, 인간 본성을 넘어서는 아주 차원 높은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팔복의 일곱 번째 복된 마음이 무엇이었습니까?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차원 높은 삶이었는지, 하나님은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일컫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팔복의 이 여덟 번째 복된 마음은 팔복의 일곱 번째 복된 마음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삶입니다. ‘의’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도 ‘박해’도 기꺼이 받으려고 하는 이 마음, 심지어 박해를 받아 죽게 되는 ‘그 죽음’까지라도 기꺼이 감내해 내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은 누구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삶은 ‘자기중심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은 도저히 살 수 없는 삶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여덟 번째 복된 마음의 단계에까지 이른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순교’까지도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5-38절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감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영화 ‘쿼바디스’를 보면 로마에서 극심한 종교적인 박해가 시작되어서 사도 바울도 죽고, 기독교 지도자들도 하나 둘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 자들이 많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로마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에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사도님이라도 이 박해 중에 살아남아서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주는 증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님까지 순교하시면 훗날 누가 이 사명을 감당합니까? 그러니 사도님은 잠시 박해를 피해 시골에 가서 숨어 지내다가, 박해가 좀 가라앉으면 돌아오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로마교회 성도들이 권하는 이 말을 좋게 여겨서 은밀히 로마를 빠져나와 시골로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도망하는 길에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가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예수님 왜 다시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들어가십니까? 거기에는 심각한 박해가 있는 곳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버려두고 떠나온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나는 네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너 대신 지기 위해서 로마로 가고 있다.’라고 하시면서 로마로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순교 당할 위험 속에서도 그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는데, 로마교회 지도자라는 자신은 지금 순교를 피하기 위해서 시골로 도망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창피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다가, 결국 당국자들에게 붙잡혀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회개하고 돌이킨 베드로의 삶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핍박도 순교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는 마음’ 즉 예수님이 산상 설교에서 여덟 번째 말씀하고 있는 복 있는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렇게 차원 높은 삶을 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니엘서 6장을 보면,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의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넣으라는 왕의 엄한 명령을 알고서도,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의 성전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둔 금 신상을 섬기며 절하지 아니하면,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한 용광로 속에 던져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며 사는 그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는 왕의 부름이 없는데도 왕 앞에 나아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국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 하만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위해서,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순교신앙을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출애굽기 32:7-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하시고, 모세 너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일으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모세는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버리셔도 좋으니,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교회사를 읽어보면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살았던 삶이 바로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순교’까지 각오한 신앙이 아니었습니까?
오늘날에도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진 믿음은 기적을 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병 고침을 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명예와 부와 권세를 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까지라도 기쁘게 바칠 수 있는 그런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핍박과 박해도 기꺼이 감수하려는 이런 마음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마음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말세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고난의 날, 환난의 날을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의를 위해 박해까지 감수하는 성도들이 받게 되는 복입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박해받는 것까지 감수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듯이, 자신들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 삶을 위해서라면, 박해받는 것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 11절에서는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차원 높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으로부터는 욕을 먹고, 비난을 받고,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성도들도 따라 살기 힘든 차원 높은 공동체, 거룩하고 구별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루살렘교회를 향한 세상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박해였습니다.
그러면 왜 세상이 이런 고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고 박해합니까?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은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런 삶을 흉내 내거나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마귀 또한 이렇게 차원 높은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격동하여서 박해하고 핍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약 2,000년 전에 세상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였던 마귀는, 이 차원 높은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대적하고 박해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마귀는 지금도 여전히 신실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적하고 박해하고 위해를 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박해는 신약 시대 성도들만 당하였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12절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구약 시대 살았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런 박해를 받게 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의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면서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은,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너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 아주 놀라운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 말씀에서는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을 그 목적으로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들만이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이런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온 팔복의 말씀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즉 천국 백성이 된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삶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그 주신 성령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그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이런 삶은 이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고차원적인 삶입니다. 예수님은 예수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살기 원하시는 이런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살면 그런 너희를 위해서 하늘에 큰 상급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살펴볼 것은,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 앞에는 환난의 날 즉 7년 대환난의 날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날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재앙들 즉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들이 쏟아지는 날입니다.
이때는 적 그리스도가 마치 평화의 사도인 것처럼 위장하고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환난의 중반쯤 되면 마귀는 그 본색을 드러내어서, 인류 역사 속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환난의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 환난의 때는 적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때는 순교를 각오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만 그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가 오기 전에 유대인들은 산으로 도망가야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고, 이방인들은 광야로 도망가야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좋은 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장소 즉 예비 처에 가서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성도들 즉 이날이 왔음에도 예비 처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 속에 남아 있는 성도들은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며 살다가 순교하여 천국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3년 반의 극한 환난의 기간 동안 신앙을 버리고 배도 하여 잠시 세상의 낙을 누리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에 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런 시대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 오게 될 때,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올바른 신앙의 결단을 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으로 그 신앙을 지킨 성도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천년 왕국이나 천국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팔복의 말씀은 ‘천국’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팔복을 보면 그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게 되는 복이 바로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팔복의 가장 마지막 복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에게 주시는 복도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팔복의 말씀은 천국에 대한 약속으로 시작하여 천국에 대한 약속으로 끝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팔복의 구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천국은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마음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팔복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천국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이후에는 영원히 천국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팔복의 말씀은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팔복의 말씀이 우리와 관련이 없는 말씀이라고, 우리는 도저히 지켜 행하며 살아갈 수 없는 이상적인 삶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며 외면해 왔습니다. 마치 신약의 교회가 율법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말씀이라고 하며 버렸듯이, 팔복의 말씀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 취급을 해 왔습니다.
이렇게 팔복의 말씀을 버린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믿음 안에서 자신들도 변화하지 않고, 믿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세상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생명을 잃은 종교로 전락하여 왔습니다.
팔복은 우리에게 이런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팔복은 하나님이 천국 시민이 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임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살아갈 때,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숙한 성도의 삶, 차원 높은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로써 우리는 팔복의 말씀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이 팔복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마음들은 우리에게 없었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마음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이 팔복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될 때까지,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요구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가는 그날까지, 나를 새롭게 하고,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성화시켜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는 것은 업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팔복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제 조금 남아 있는 2024년도 하반기의 삶을,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된 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팔복의 말씀을 통해 약속하고 계신 그 모든 은혜와 복들을 다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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