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의 복
마태복음 5:3-10
1. 은혜로 선물로 주신 마음
우리는 지난주에 팔 복의 말씀 중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팔 복의 말씀 중의 두 번째 마음인 애통하는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팔 복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 우리들이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팔 복에 나오고 있는 마음들은, 우리에게는 없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인데, 예수님은 이 마음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두 마음을 함께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이 주신 마음과 그 본래 소유하고 있는 마음을 함께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1. 가난한 마음을 / 가지고 계시지만 1. 욕심과 탐욕의 마음 / 을 가지고 있고
2. 죄를 애통하는 마음 2. 죄를 사모하는 마음
3. 온유한 마음 3. 교만한 마음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4. 자기 의를 내 세우는 마음(나요. 나요)
5. 긍휼히 여기는 마음 5.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
6. 청결한 마음 6. 추악한 마음
7. 화평케 하는 마음 7. 투기하고 불화하는 마음
8.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박해도 감내하는 마음
8.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마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두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두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성도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팔 복의 마음을 주셨다고 해서, 그 즉시 우리 심령이 예수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팔 복의 마음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셔서, 성도들은 그 마음 안에 그 본래 가지고 있었던 죄악 된 마음과 하나님이 주신 팔 복의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두 마음을 함께 가진 채로 살고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팔 복의 마음을 주셨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이 팔 복의 마음 주신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됩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마음의 변화는 우리의 지성이나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난 변화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 심령 안에서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변화를 의식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성도들이 팔 복의 마음을 주신 것을 모른다고 해서, 그 삶에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람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또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감각을 통해 우리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우리에게 팔 복의 마음을 주셨어도 그 주신 마음을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팔 복의 마음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영적인 변화,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 들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팔 복의 마음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팔 복의 마음이 가져다주는 변화
그래서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팔 복의 마음이 가져다주는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이 팔 복의 마음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첫째는 우리 마음 안에 갈등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팔 복의 마음을 받지 못한 자연인은 전혀 갈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팔 복의 마음을 주심으로, 우리 안에 있던 죄악된 마음과 예수님이 주신 팔복의 마음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갈등을 통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서로 다른 두 마음의 갈등이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더욱 깊게 깨닫게 됩니다. 만약 이런 갈등이 없었으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두 마음의 갈등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는 나의 옛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때 나의 옛사람 안에서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어도, 그 깨닫게 된 죄를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처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됩니다. 이 절망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게 되는 절망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죄를 깨닫고 어떻게 절망하였습니까?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사도 바울은 누가 자신을 그 절망적인 죄에서 건져 내 주랴?라고 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절망 속에 깨닫는 것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입니다.
이때 우리는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알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우리 옛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팔 복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팔 복의 마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영적인 은혜와 은사들을 맛보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맛본 은혜의 경험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게 하며, 거룩함에 이르고자 열망하는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고 찾듯이 그렇게 은혜를 갈급해하며,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을 것을 찾고 찾아다니듯이 그렇게 은혜를 찾아 다닙니다. 이런 갈급함과 사모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그 마음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목마름은 그 목마름이 해소되지 않으면 결코 그치지 않는 그런 목마름입니다. 이 영적인 목마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악 된 옛사람을 내려놓게 합니다. 그래서 죄악된 자기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비워진 마음 안에 예수님이 주시는 팔 복의 마음으로 채우게 해 줍니다. 이렇게 해서 천국의 신령한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 안에 천국이 채워져 나가는 것입니다.
3절이 바로 거기에 대한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세상일이 아무리 잘 되어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또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아무리 세상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열등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이 땅의 일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지고 교만하거나, 세상에서 가지지 못한 것을 인하여 자기 비하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이 그 마음에 채워질 때까지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다가 때때로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떨어뜨려 주시는 은혜의 작은 물방울이 자기에게 떨어질 때, 마치 이 세상을 다 얻은 사람들처럼 그 작은 은혜 안에서도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속에 이런 간절함과 갈급함이 있다면 우리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마음은 예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실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3. 가난한 마음과 다른 마음의 관계
우리는 지난주에 이 가난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팔복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먼저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죄악 된 마음을 비우고 나를 내려놓게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마음을 받기 위하여 먼저 나를 내려놓고 나를 비우는 것이 가난한 마음이라면, 이후에 나오는 애통하는 마음이나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등은, 이미 비어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마음으로 채워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워진 /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등등 |
그래서 이 팔복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오른쪽에는 가난한 마음 즉 나를 비우는 마음이 있고, 왼쪽에는 가난하게 비워진 마음 안에 복된 마음으로 채워 나가는 대조적인 모양이 될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비워지는 그만큼만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다고 해도, 우리 마음이 비어 있지 않으면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게 되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초가 되는 마음은 바로 가난한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가난하게 된 사람들만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마음들로 그 마음을 채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워진 마음을 채워나가는 것은 순차적으로 됩니다.
비워진 가난해진 마음을 채우게 될 때, 가장 먼저는 애통하는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애통하는 마음 이후에 온유한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온유한 마음 이후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팔복의 순서를 무시하고 채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온유한 마음이나 혹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채워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가난한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채워주시고, 애통하는 마음이 채워진 사람에게 온유한 마음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4. 애통하는 마음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가난한 마음,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채워주시는 마음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에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마음이 애통하는 마음이라는 말은, 곧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애통하는 사람 즉 ‘눈물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왜 눈물의 사람이 됩니까?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내 안에 좋지 않은 것들, 죄악 된 것들이 가득 차 있음을 깨닫고, 그 좋지 않은 것들과 죄악 된 것들을 내어 버리고자 하는 간절함과 열망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열망을 갖게 되었다고 죄악 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악을 버리고 거룩함에 이르려는 강한 열망은 가지고 있지만, 그 죄악된 마음들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기 때문에 절망감에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파하고, 자기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고, 통곡하며 울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부어 주시는 마음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바로 눈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악 된 마음들을 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통곡하게 됩니다. 아픔을 가져다주고 절망을 가져다 주는 자기 안에 있는 죄 때문에 통곡하게 됩니다. 죄악들이 자신을 넘어뜨리려고 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통곡하게 됩니다. 그 죄악들을 그대로 두면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을 지옥 불로 끌고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통곡하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인하여 아파하고, 죄 때문에 울부짖게 되는 마음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전에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실 죄악들이 달콤했었습니다.
그때는 이런 죄악들이 오히려 즐겼으며, 죄와 악을 은밀히 즐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심지어는 죄가 가져다주는 감각적인 쾌감을 즐기고, 죄가 가져다준 쾌락을 사모하기까지 해 왔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팔 복의 두 번째 마음인 죄를 아파하고 죄를 애통히 여기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안에서는 죄를 즐기려는 마음과 죄를 아파하는 마음이 싸우게 된 것입니다.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는 이 두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한 편에는 죄를 즐기려는 마음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죄를 격멸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죄를 원하다가 또 어떤 때는 ‘내가 왜 죄를 좋아하고 있지’라고 하며 자기 안에서 두 마음이 싸우는 것입니다.
이때는 정말 괴로운 시기입니다.
사람들이 전도하는 것을 보면 예수 믿으면 병이 낫고, 소원 성취를 하고, 무슨 일이든지 잘 되며, 행복해질 것이라고 전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때 깨닫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겪게 되는 것은 이 두 마음의 갈등이며, 자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이때는 누가 무슨 말로 위로를 해도 위로가 되지 않는 시기입니다.
이때는 누가 옆에서 만약 당신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죄악 된 마음만 있기 때문에 아무런 마음의 갈등도 없겠지만, 지금 당신은 아담 안에 있는 죄악 된 마음과 예수님이 주신 팔 복의 마음이 함께 있어서, 그 두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에 갈등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당신의 마음 안에서 선과 악 두 마음의 싸움이 있는 것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신 사람이 분명하다고, 그러니 믿음에 확신을 가지라고 아무리 위로해 주어도, 이런 위로의 말이 갈등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다투고 싸우는 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 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죄의 종으로, 죄에 매여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럴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갈등이 있을까요?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이런 갈등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 죄가 드러나지 않으면 은밀히 그 죄를 즐기며 삽니다. 그러다가 그 죄가 드러나고 발각되면 그때에서야 그 지은 죄를 후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행하며 살면서 그 죄가 가져다주는 희열을 느끼며 삽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지으며 살아가는 죄를 죄로 알기만 해도 이 세상이 이렇게 악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뉴스 시간에 상상하기에도 끔찍한 그런 뉴스를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죄를 죄로 인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죄를 대적하고 또 죄와 싸우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죄를 즐기며 사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는 이런 마음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은혜로 선물로 주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를 애통해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팔 복의 마음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또 이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아멘.
이렇게 해서 우리 마음 안에는 두 마음이 있게 되는데, 이때 죄의 마음이 이깁니까? 은혜의 마음이 이깁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그때에는 죄를 은근히 즐기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은혜의 마음과 죄의 마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사는 것이 성도들의 삶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신앙의 사람 다윗을 보면, 이 다윗이 죄를 지을 사람 같아 보입니까? 죄를 짓지 않을 사람 같이 보입니까? 다윗은 전혀 죄를 짓지 않을 위대한 믿음의 용사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이런 다윗을 보고 ‘저는 나와 마음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로 다윗은 훌륭한 인격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어떤 죄를 저지릅니까?
다윗이 왕궁의 성벽 위를 거닐며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그 성벽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그날 저녁에 목욕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오도록 하고, 결국에는 죄를 범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지은 죄를 가려 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다가, 결국에는 그 부하를 시켜 살인까지 사주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이 그 지은 죄를 회개하고 나오도록 근 1년 동안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돌아오지 않자,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 죄를 백일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이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이 역사하여서, 다윗은 그 즉시 지은 죄를 자백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다윗의 회개가 진실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회개하는 마음을 받으시고 즉시 그 죄를 사해 주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다윗도 시편에서 ‘나는 밤마다 눈물로 회개하며 내 침상을 띄운다.’라고 한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은 다윗이 얼마나 그 지은 죄를 애통해하며 살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를 애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4절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죄를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왜 그렇게 애통해하며 우는지 잘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야지, ‘왜 저렇게 밤낮 울고 짜고 있는가?’ 라고 하면서, 애통해하며 우는 성도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때 성도들의 울게 되는 울음은 죄를 토해내는 애통의 울음입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면 죄를 아파하는 애통을 넘어서서, 내가 하나님을 슬프게 한 애통, 내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까지 더해지게 됩니다.
만약 죄가 우리를 이기면 우리는 애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이기면 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애통하게 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를 싫어하는 이런 마음은 본래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 안에 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죄를 애통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애통은 내 죄와 악 때문에만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죄를 넘어서서 가족들이 범하는 죄를 인해서도 애통해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가족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심대로 죄를 짓고 살아갈 때에 그런 가족들을 보면서 애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각 가정들에서 가장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그 가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죄와 악을 인해서도 애통하게 됩니다.
또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이 지은 죄를 가지고도 애통하게 됩니다. 독일 사람들을 보십시오. 독일 사람들은 자기 선조들이 범한 죄와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하고 보상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다릅니다. 전혀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를 외곡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독일은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각종 우상들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이 신앙의 차이가 서로 다른 모습의 국가로, 서로 다른 국가의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정들이 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애통해하고, 철없는 청소년들이 죄악으로 빠져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애통해하고, 이기적인 탐욕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보면서도 애통해하고, 세상 부귀영화 때문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미래를 내다보면서도 애통해합니다.
오늘날은 말세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죄와 악과 범죄가 아주 일상이 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백성들의 불신앙과 범죄를 보며 눈물로 사역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성도라면 우리 눈에서 눈물이 말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악을 보고, 세상의 범죄와 타락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심령이 그만큼 강퍅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죄악으로 완악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면 가장 먼저 눈물이 마릅니다.
복 있는 마음은 애통하는 마음, 우는 마음입니다. 오늘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회개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죄와 악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내일이 있습니다. 죄를 아파하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귀한 선물을 주시는데, 그 선물은 바로 하늘의 위로로 그 애통하는 마음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복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우리 모두 받아 소유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키운 자녀는 망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울고, 우리 자녀를 위해서 울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 울고, 우리나라와 민족과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도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령이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아파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죄를 애통해 하는 마음 주옵소서.’ ‘죄를 사모하는 마음은 버리게 하시고, 죄를 죄로 깨닫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 주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 애통하며 울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왜요. 이렇게 애통하는 마음, 우는 마음에 하나님이 하늘의 위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충만한 위로를 받아 누리며 살 뿐 아니라, 그 받아 누리며 사는 하늘의 위로로, 가족을 위로하고, 자녀들을 위로하고, 이웃을 위로하고,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남은 이 한해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