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설교

온유한 자의 복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2. 4. 13:45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5

 

들어가는 말

 

오늘날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 예수 믿는 분들이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존칭어를 써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무식하게 예수 믿는 것들이라고 막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막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한 존경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비록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박해를 받아 이방 세계로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얕잡아 보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흩어졌던 성도들이 세웠던 첫 번째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보고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성도들을 경멸하여서 한 말이기도 하였지만,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당시 죄악 속에 살고 있었던 세상 사람들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확연하게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의 기록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882년 간행된 그리피스의 저서 은둔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자를 보면,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의 가슴 속에 기독교가 스며들게 되자, 그 사람들은 민족을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과 이웃의 복리증진을 시도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99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서는 이런 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는 생활을 하게 되자, 신임 관리들이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는 고을에 부임하기를 꺼리는 일까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은 곳에서는 부정한 청탁이나 부정한 뇌물을 받아 치부할 수 없기 때문에, 신임 관리들이 그런 고을들에 부임하는 것을 꺼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13그리스도 회보에서는 이런 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인의 마음 가운데 충만한 이 기독교 정신이, 하나님에 대한 성결과 회개와 신앙으로 나타났고, 사회에 대한 감사와 이웃 사람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생활로 드러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 속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놀라운 삶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글을 보면 구한 말에는 사회 악습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것을 고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교인 밖에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의 구습을 고쳐 나가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성도들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사회적 책임이 아주 막중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기에,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 인구를 약 800만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교회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성도의 숫자를 600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600 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들이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기독교를 비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강조해 왔으나, 믿음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성도들의 인격적인 변화와 삶의 변화는 등한시해 왔습니다. 예수 믿으면 받게 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과 성공은 강조하여 왔으나, 예수를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인격과 삶의 변화는 외면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처럼 높았던 성도들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이 이제는 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거의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시대 환경과 시대 상황을 극복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려고 할 때 꼭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일 것입니다. 이 산상설교 말씀은 우리의 바른 믿음, 믿음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에 대한 말씀을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 있는 마음

 

우리가 팔복의 말씀을 대하면서 가장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마음은 우리에게 있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이 마음을 은혜로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마음 안에는 두 가지 마음 즉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악 된 마음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신 이 팔복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팔복의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어떻게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팔복의 마음은 씨의 형태로 주어져 있습니다. 생명의 씨가 자라나서 싹을 내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맺어가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전에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이런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뿌려 주신 팔복의 마음도 같습니다. 팔복의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서 풍성하게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팔복의 마음은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을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팔복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실 때 완성된 형태로 주신 것이 아니고 생명을 가진 씨의 형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의 마음이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이 팔복의 마음 중에는 비우는 마음과 채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마음은 비우는 마음이라면, 그 나머지 일곱 가지 마음은 이렇게 비운 마음에 채워나가는 마음 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팔복의 마음들은 순차 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차적이라는 말은,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애통하게 되고, 애통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온유하게 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도 않은데 애통할 수는 없고, 애통하지도 않은데 온유할 수는 없고, 온유하지도 않은데 의에 주리고 목말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주신 팔복의 마음 중에는 내면적인 성품이 있는가 하면 외면적인 성품도 있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마음 중에 심령이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은 우리 마음 안에 가지게 되는 내면적인 성품이라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 청결한 마음, 화평케 하는 마음, 의를 위해서라면 핍박까지 감수하려는 이런 마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나타나는 외면적인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주신 이 팔복의 마음은 병행적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병행은 앞의 네 가지 마음과 뒤의 네 가지 마음이 병행을 이루고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병행을 이루고 짝을 이루고 있습니까? 첫 번째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은 다섯 번째 나오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병행을 이루고 짝을 이루고 있고, 두 번째 나오는 애통하는 마음은 여섯 번째 나오는 청결한 마음과 병행을 이루고 짝을 이루고 있고, 세 번째 나오는 온유한 마음은 일곱 번째 나오는 화평케 하는 마음과 병행을 이루고 짝을 이루고 있고, 네 번째 나오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은 여덟 번째 나오는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핍박까지도 감수하려는 마음과 병행을 이루고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팔복의 말씀을 살펴보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온유한 마음은 우리 심령 안에 가지게 되는 내면적인 성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온유한 마음의 특이한 점은, 온유한 마음은 우리의 내면적인 성품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나 그 살아가는 삶의 태도 속에서 나타나고 드러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본 심령이 가난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은 다릅니다.

가난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은 우리 내면적인 성품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 대화하고 사귀게 되더라도, 우리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죄를 애통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온유한 마음은 우리 내면적인 성품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나타나는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온유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온유한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온유한 마음이 있고, 또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은혜로 주신 온유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 타고난 성품이 온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온유함은 예수님이 주신 온유함과 다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온유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어서면 끝이 나는 온유함입니다.

 

그 성품이 온유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잘 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의 온유는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결국 폭발하고 마는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온유함은 다릅니다.

이 온유는 한계가 없는 온유입니다. 요한복음 13:1절 말씀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는 사랑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유에서도 같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랑도 능력도 다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가진 모든 것들이 다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을 해도 영원한 사랑을 하시고, 참으셔도 영원히 참으시고, 온유하심도 영원하십니다.

 

한계가 없으신 이 예수님의 온유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이 원수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악한 동기로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이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죄인들을 향해 온유함을 보여주시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가장 크게 놀라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한결같으시고, 전혀 변함이 없으신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온유하심 등등이 아닙니까?

 

요한복음 8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날 이 여인이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인인 자신에게까지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 주시는 예수님이 아니었습니까?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가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보라 네가 낳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사람도 중병을 앓고 있는 자신을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 주신 예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침상에 누운 채 예수님 앞에 나왔다가 중풍 병을 고침받은 환자가 경험한 것도 죄인인 자신을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 주셨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가라.’

 

마태복음 11:29 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이 온유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 비로써 그 마음이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배우다라는 말은 헬라어 만다노입니다.

이 말은 발견하고’ ‘익숙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발견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온유한 마음을 주셨음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신 온유한 마음이 내 마음인 것처럼 아주 익숙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배운다는 말씀의 참 의미입니다.

 

농사짓는 농부들이 수확하는 열매는 긴긴 시간의 수고와 땀에 대한 보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온유한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신 팔복의 마음 온유한 마음, 우리 마음 안에서 싹을 내고, 잎을 내고, 가지를 내면서 자라나서, 열매를 맺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배워나가는 과정이 우리 삶속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온유를 성령의 열매라고 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그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므로 그 결과로 우리가 맺어 나가는 열매가 온유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의 열매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그 결실을 바라보고 수고하고 땀을 흘리듯이, 그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맺혀지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다 성령을 주셨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종말의 때 우리에게 보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행한 기적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룬 세상적인 성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보길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맺으며 살아가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열매 맺어가는 것 보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이 온유한 마음은 이 세상에는 없는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도덕적이고 교양이 있고, 윤리적이고 온유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화를 참고 분을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화를 참고 분을 참고 살아가게 되면, 그 참고 산 화와 분노가 스트레스 요인이 되어서, 그 마음이 상처를 입고 병들게 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리고, 신경쇠약정신병에 걸리는 이유가 모두 다 이렇게 화와 분을 참다가 생긴 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삶 속에 받는 스트레스가 정신과 육체에 큰 타격을 주고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화된 지식입니다. 스트레스를 참고 참다가 보면 그것이 결국 심장병으로 나타나고, 으로 나타나고, 이유도 없이 몸을 쇠약하게 하고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의사들이 하늘 말 중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신경성이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의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다 온유한 마음도 없으면서 무조건 참다가 생기게 된 병들인 것입니다.

 

이런 요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게임이 두더지 게임입니다.

사람들이 방망이를 들고 두더지가 고개를 내밀 때마다 그 두더지를 미운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막 때리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골방에 들어가서 벽을 향해 막 욕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샤워하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사람에게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이 온유한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온유한 마음은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온유의 첫 번째 양상은, 자기 자신을 향한 온유함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마음은 우리 마음에 평강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평안한 세상이 아닙니다. 눈만 뜨면 사건 사고가 기다리고 있는 요동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을 살면서도 평안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주신 온유한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주신 이 온유는 태풍의 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은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이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우리 마음이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유한 마음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외부의 충격이 오면 그 충격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성도들은 그 외부 충격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평정을 찾아 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 안에는 성령으로 심어주신 온유한 마음이 있어서, 그 온유한 마음이 우리를 꽉 붙잡아 주고 우리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안정된 마음, 평화로운 마음,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내게 주신 온유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온유의 두 번째 양상은, 하나님을 향한 온유함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유한 마음을 우유부단함이나 나약함 무기력한 마음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함은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온유함은,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절대적이고 유순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5:5절에 사용되고 있는 온유함에는, 헬라어 프라위스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아주 다양한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사물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온화한으로 사용되고, 동물과 관련되어 쓰일 때에는 길들임으로 사용되고, 사람에 관련되어 쓰일 때에는 친절한으로 사용되고, 우리의 행동이나 감정과 관련되어 쓰일 때에는 관대한으로 사용되고, 하나님과 관련해서 쓰일 때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는 순종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을 나타내 보이는 이 온유는 세 가지로 구분되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적인 온유입니다.

지적인 온유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이 지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무조건 믿고 따르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하여 갈 때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그 갈 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한 채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지적인 온유입니다.

 

또 노아를 보십시오. 보통 배는 어디서 만듭니까?

배를 물에 띄우기 쉽게 물가에서 만듭니다. 그런데 노아는 배를 어디에서 만들었다고 합니까? 산 정상에서 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만들 때 왜 배를 산 정상에서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만들었겠습니까? 노아는 지식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산 정상에 배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첫 번째 온유는 지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을 따르는 지식적인 온유입니다.

 

둘째는 정적인 온유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적인 온유는 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보십시오.

우리 삶에는 항상 기뻐하는 일만 있고 범사에 감사하는 일만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보다 더 크시고 더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유순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적인 온유함입니다.

 

셋째는 의지적인 온유입니다.

의지적 온유란?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라고 말씀하시니, 우리는 의지적으로 순종하여 그 무엇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보다 하나님과 그 나라가 더 중요하다.’라고 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 중요시하는 믿음을 가지고 묵묵히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지적인 온유입니다.

 

온유의 세 번째 양상은, 사람들을 향한 온유함으로 나타납니다.

 

팔복의 말씀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순서에서 볼 때 온유한 마음은 가난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 다음에 오는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먼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 죄를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애통하였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온유함은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는 긍휼의 마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온유한 마음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짝을 이루고 있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3-4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온유한 사람들은 먼저 불의와 죄를 경계합니다. 불의와 죄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온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내 형제가 죄를 범하면 내가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는 말에 담겨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히 은혜를 베풀고 영원히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를 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의 말씀을 보면,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라고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주신 온유는, 이 세상의 온유와 같이 한계가 있는 온유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주신 온유이기 때문에 천대까지 영원이 계속되는 온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온유함으로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되, 마치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심과 같이 영원히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유한 마음은 이렇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5절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데 어떤 복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땅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느 날 노아에게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너는 산 위에다 배를 만들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 안에 들어갔던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홍수 후 온 세상의 땅을 그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아멘.

 

우리 생각에는 힘 있고 포악하고 강퍅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힘 있고 포악하고 강퍅하여온 땅을 차지한 것 같았던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들과의 전쟁에서 지고 전쟁포로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뿐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장차 도래하게 될 천년 왕국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장차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을 차지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천년왕국과 천국은 온유한 사람들에게 기업으로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온유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땅 천년왕국천국을 기업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자기 자신을 대할 때에는 평안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유순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용서하고 용납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성격이 까칠한 사람들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온유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믿음은 없지만 온유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타고난 온유예수님이 가지신 온유,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신 온유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타고난 온유는 한계가 있는 온유이고, 언젠가는 끝장이 나는 온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온유,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주신 온유는 끝이 없으신 온유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한 십자가상의 강도를 받아주실 정도로 온유하셨으며, 심지어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고 자기를 은 30에 팔았던 가룟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셨을 정도로 온유하셨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이 온유한 마음이 자라나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이 온유한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풍성한 열매로 맺혀질 수 있도록 경건 생활에 애쓰고 힘쓰며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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