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5-34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는 걱정과 염려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걱정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그 나름대로의 걱정 근심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 신문을 보니, 검찰의 인사에서 정권관련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검사들을 다 물갈이 하고, 친 정부 성향의 인사들이 검찰의 중요한 요직에 발령 났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제주의 원희룡 지사는 문대통령에게 ‘감옥 갈까 겁나서 그렇게 했냐?’라고 비꼬았습니다. 아직 임기가 많이 남아 있는 현직 대통령도 자신이 감옥 갈까 염려하여 검찰 인사를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도 이런 염려 걱정이 있다면,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는 얼마나 염려와 걱정이 많이 있겠습니까?
루마니아의 순교자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감옥에 있으면서,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늘 불안과 염려에 시달리며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보려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성경에는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365번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이 목사님은 ‘아! 하나님께서 365일 염려하지 말고 살라고,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365번이나 기록 해 두셨구나!’라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고, 이 깨달음을 가진 이후로는 날마다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혹시 내가 처해 있는 현재의 입장과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며 걱정하고 염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범브란트 목사님과 같이 믿음으로 그 상황과 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산상설교의 말씀’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라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키’는 우리의 ‘키’가 아니라 우리의 ‘나이’ ‘수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수명을 한 자라도 더 연장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염려들은 어디서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염려는 그 시선을 세상에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오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세상적인 일로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지 않고, 염려 걱정 근심거리가 산적해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염려는 불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염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환경을 더 크게 생각할 때 오는 것입니다. 그 살아가야 할 삶의 환경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멘.
가령 대 그룹의 총수를 아버지로 둔 아들은 그 집 쌀독에 쌀이 떨어져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면 수십 트럭의 쌀도 금방 보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대 그룹 총수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쌀독의 쌀이 떨어진 현실을 보고 염려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장 쌀 수십 트럭이라도 가져다주실 수 있으신 아버지에게 쌀이 떨어졌다고 전화 하겠습니까?
그런데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쌀이 떨어지자 곧 바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또 광야에서 3일 동안 마실 물을 찾지 못하게 되자 어떻게 했습니까? 곧 바로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겠다고 하며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서 고기가 먹고 싶어 질 때에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이제는 애굽에서 처럼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울며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고 계신데도, 자신들과 함께 하고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 삶에 조금만 어려움만 오면 곧 바로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불신앙을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시내 광야 길을 거쳐 ‘홍해 앞’에 이르렀습니다.
홍해 바다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멈칫 하고 있는데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었던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가 볼 때 지금은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펼쳐 주시지 않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시려면, 지금 당장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셔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애굽기 14:13-14절에서 이렇게 믿음의 선포를 하였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삶의 위기를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모세는 위기를 믿음의 눈으로 보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를 불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믿음의 눈이 뜨여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래서 위기 속에서도 믿음으로 선포하며 그 선포한 믿음의 결과를 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하였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믿고 기대하였던 그 믿음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고 구원해 주시는 역사를 보고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입니다. 똑 같은 상황을 두고 하나님을 불신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염려하고 걱정하고 불평 했지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였던 모세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들과 믿음 없는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군’을 보냈을 때도 같았습니다.
12명의 족장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서로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10명의 정탐 군들은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높은 성벽을 쌓아 놓고, 철병거로 무장한, 강한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서면 우리는 메뚜기 때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보고를 했습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그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들과 함께 하시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그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면서 애굽에서 꺼내 주시고, 홍해를 갈라주신 것 같이, 약속의 땅 가나안도 자신들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유무가 그 살아가는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을 보여주는 ‘척도’나 ‘바로미터’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그 삶을 믿음으로 사느냐? 염려하며 사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염려 걱정 근심하며 삽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삽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기초적인 살핌을 바탕으로 이제부터는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아 말씀 속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너희는 하나님께 중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목숨과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몸과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좀 낯설면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녀의 목숨과 그 자녀가 먹는 음식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그 자녀의 몸과 자녀가 입고 있는 옷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이렇게 물으면 그 의미가 명확해 지지요.
이렇게 물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자녀가 더 중요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25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라는 것을 염려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먹을 음식보다 너희를 더 염려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입을 의복보다 너희 몸을 더 염려하신다는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이르렀을 때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떨어진 것을 염려 하며 그렇게 되도록 방치해 둔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은 무엇을 염려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양식보다 100배 1,000배 10,000배나 더 중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도록 이미 만나라는 음식을 준비해 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그 떨어진 양식보다 자신들을 더 중요시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양식이 떨어진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것이 무엇인지 물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해 너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만나라는 양식을 미리 준비 해 두셨음을 알려 주시고는, 그 만나를 거두어서 일용할 양식을 삼으라고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도 똑 같습니다. 저희는 이 대림상가에 참빛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임대계약을 맺고, 교회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가진 돈은 5,00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그 중에 500만원을 십일조로 드리고, 계약하는 과정 속에 되돌려 받지 못한 500만원을 빼고 나니 남은 돈은 4,00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이 돈으로 교회도 얻고 살 집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남긴 돈으로 생활도 하고 교회 운영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4,000만원으로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어 보입니까?
이렇게 교회를 시작한 후 매월 교회임대료와 관리비와 기타 경비로 약 70만원씩 들었습니다. 당시 저희 가족은 4식구였는데 정말 살 수 없어 보이는 최저 생활비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평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림을 꾸려준 사모에게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교회 차로 봉고 15인승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차량 운영 유지비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성도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우유도 마음대로 사 먹이지 못하고, 아이들을 어린이 집에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경비를 줄이고 줄여 생활했습니다.
계산해 보니 이렇게 절약하며 생활해도 교회가 10개월 버티기가 어려워보였습니다.
당시 저는 늘 교회에서 살았고, 사모도 두 아들을 데리고 매일 교회로 와서 기도하는 일 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하나님을 위해 나는 기꺼이 빈 털털이가 되겠다는 각오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한 중요한 기도제목은 ‘교회 임대료 밀리지 않게 해 주세요.’ 라는 기도였습니다.
여기에는 교회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도는 ‘아이들 굶기지 않게 해 주세요.’ 라는 기도였습니다.
아이들을 굶기는 것은 부모된 사람으로서 할 일이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제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이 말씀을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더라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목회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이런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염려 근심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요즘 돌이켜 지내 놓고 생각해 보니 그 때 쓸데없는 염려와 걱정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무엇이라고 까지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바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시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가 이 믿음 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런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염려 걱정 하면서 목회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달 두 달 목회를 지속해 가면서 교회 운영을 위해 우리 가정이 지출해야 하는 돈은 줄어들고 있었고, 그 줄어드는 지출만큼 성도들이 하는 헌금의 액수는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척한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교회 수입과 지출이 비슷해져 갔습니다. 할렐루야!
그 때 저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교회 개척사역을 외면하시지 아니하시고, 은혜로 함께 해 주시고 계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소소한 생활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홍해와 같은 장애물이 우리 앞을 가로 막을지라도, 모세가 가졌던 그 믿음을 우리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시마다 때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경험하며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우리들의 삶을 도우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25절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또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둘째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하실 일은 마태복음 6: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주의 새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새들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그 창조하신 새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시고, 또 먹을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1:22절에서는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고, 창세기 1:30절에서는 ‘새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공중의 새들은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양식을 위해 곡식을 심지도 않고, 내일을 염려해서 창고에 곡식을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친히 먹여 주시고 길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덜 귀한 새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존귀한 존재인 너희를 하나님이 얼마나 더 귀하게 여기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주시지 않으시겠느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염려하지 않듯이, 너희도 염려 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아멘.
두 번째 하나님이 하실 일은 마태복음 6: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은 좀 애매한 번역입니다.
다시 직역해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나이를 (혹은 그 수명을)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라는 구절이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수명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너희가 아무리 염려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되지도 않는 것을 염려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수명의 문제를 가지고 염려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 수명의 문제뿐이겠습니까?
우리 삶 속에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다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참 지혜로운 삶은 더 이상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세 번째 하나님이 하실 일은 마태복음 6:28-30절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 왕과 사람들의 대표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혜가 남달랐습니다. 그 누리며 산 부요함이 남달랐습니다. 또 그가 모은 재물과 각종 보석과 그가 건축한 백향목 궁전과 솔로몬 성전 등등은 솔로몬이 누리며 살았던 영화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솔로몬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었던 아름다운 옷들 보다, 들에 핀 백합화가 훨씬 더 났다고 하셨습니다. 왜요. 솔로몬이 입었던 옷은 한낱 생명 없는 옷감에 불과했지만, 들에 핀 백합화는 하나님께서 그 지혜와 능력으로 아름답게 창조하신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옷감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체는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운 백합화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들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들풀도 아름답게 입히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한 사람들, 만물의 영장으로 특별하게 창조한 사람들을 얼마나 더 잘 보살피시고 돌보아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염려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6: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들이 세상 염려 걱정에 굴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너희가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삶을 살아서 되겠느냐?’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믿음이 적어 염려하며 사는 성도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작은 믿음을 가지게 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말씀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작은 믿음을 가지게 되고 또 염려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작은 믿음으로는 환경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작은 믿음으로는 오히려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환경을 이기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염려는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이 하며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은 그 삶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그 삶의 어려움에서 자신들을 건져 내어 줄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주시는 구원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세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며, 오직 현세의 삶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주된 관심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즐기며 살까?’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살아가는 삶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문제만 바라보고 염려하지 않고, 세상만사를 주권적인 섭리하심으로 주관하시고 계신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소개할 때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런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 살아가는 삶 속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방인들은 절망하거나 분노하거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안심하며,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염려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선순위에 관한 것이며 또 하나는 염려하는 것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째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선적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먼저"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첫 번째로, 최우선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 삶의 최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순위라는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고 하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들도 중요하고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앞서 구해야할 것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먼저 ‘그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와 ‘그 의’ 즉 ‘예수님의 의’를 구하고 갈망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예수님이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살려고 갈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들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들을 갈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떠하심 같이 자신이 그런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 되고자 하고, 예수님이 살았던 것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둘째는 삶의 염려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라.’ 이 말씀은 우리가 먼저 구하며 살아야 하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더해 주신다.’는 이 말씀을 사람들이 오해하여서, ‘내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돈도 더하여 주시고, 부귀영화도 더하여 주신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충만하게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더해 주신다.’는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목적에 맞게 필요한 것은 갖다 놓아 주시고, 불필요한 것은 제거해 주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이 33절의 말씀을 다시 해석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하나님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의 즉 예수님의 삶을 연구하고 깨달아 예수님이 사셨던 것과 같은 그런 삶을 살면, 나는 너희의 삶의 문제를 가장 적당하도록 알아서 해 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의 본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우리의 욕심을 우리의 기대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풍족함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런 바람은 오늘날과 같이 성공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세속에 물들고 찌든 우리의 헛된 바람일 뿐입니다.
참 믿음은 자족할 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믿음으로 가난함과 부요함을 극복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빈부귀천으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데서 출발합니다. 이런 균형 잡힌 이해 위에 우리 믿음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속을 극복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 된 모습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S 존즈’ 라는 심리학자가 사람들의 염려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의 약 40% 정도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산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아파트가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떻게 하지 등등의 염려입니다. 또 약 30% 정도는 과거에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불안해하고 걱정한다고 합니다. 또 약 12% 정도는 다른 사람이 나를 비방하고 비난하지 않을까 염려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 10% 정도는 건강에 대해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약 92% 정도의 사람들이 쓸데없는 염려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티테디오스'라고 불렸습니다.
이 말은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염려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부를 때에도 '티테디오스 베드로', '티테디오스 요한'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편했다거나 그 삶에 염려가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들은 믿음 때문에 혹독한 박해와 핍박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염려로부터 자유하고,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이 되길 기원하고 그렇게 서로를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고 배워서, 약속의 말씀으로 그 마음을 채우고, 그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코로나 19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선지 여러날이 되었고 거리두기 4단계가 발령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비대면예배를강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사라지면 염려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마음을 채우면 염려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세상 염려로부터 해방되고, 세상 염려에서 자유케 된 성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티테디오스’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산상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통하는 자의 복 (1) | 2023.12.17 |
---|---|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1) | 2023.12.10 |
율법의 기능 (0) | 2022.06.05 |
긍휼히 여기는 마음 (0) | 2020.12.15 |
산상설교 서론 (0) | 2019.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