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마음
마태복음 5:7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설교를 기록하고 있는 팔복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팔복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선행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선행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산상에서 말씀하신 이 ‘팔복의 마음’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없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팔복의 마음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선행적인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까?
그러면 어떤 오류에 빠지게 될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팔복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팔복의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살라고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요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말씀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유대인들이 ‘제사장 국가’로 부름을 받고서도 왜 그 받은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은 그 백성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며 살아가야 할 율법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을 가지고 이방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유대인들은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기들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도 모르고 사는 이방 사람들을 하등한 인간 즉 개나 돼지 같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유대인들은 독선적인 신앙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사명 즉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세상을 믿음으로 인도해 내기 위한 말씀들도 있지만, 그 대부분의 말씀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이 팔복의 말씀도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팔복에 나오는 이 마음들이 복된 마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가난한 마음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부유하고 비전이 있고 용기가 있고 자긍심이 강한 그런 마음을 좋아합니다.
오직 성도들만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마음들이 정말 복된 마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팔복의 말씀으로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기초적인 이해 위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살펴봅니다.
첫 번째 살펴보려는 내용은, 팔복의 말씀들의 상호관계입니다.
팔복에는 여덟 가지 복된 마음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먼저 나오는 네 가지 마음 즉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내면적 성품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네 가지 마음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 청결한 마음, 화평케 하는 마음, 의를 위하여 박해까지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통해 드러나는 외면적인 성품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부류의 마음들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성품은, 반드시 외면적인 성품으로 드러나고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내면에 가진 ‘가난 한 마음’은 언제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드러나게 되고, ‘죄를 애통해 하는 마음’은 언제나 ‘청결한 마음’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내면에 가진 ‘온유한 마음’은 언제나 ‘화평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드러나게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박해는 물론,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마음’으로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성도들이 가진 ‘가난한 마음’에서 나오는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살펴보려고 하면 먼저 가난한 마음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
그러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우리는 그 호주머니가 텅텅 비어 있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에게는 자랑하고 내어 놓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그래서 마치 텅 비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살아온 마음은 본래 아담 안에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악 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으로 불러 주시고, 그 불러주신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해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여덟 가지 마음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죄악 된 마음도 가지고 있고, 또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통해 부어주신 팔복의 마음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들은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성도들이 가진 가난한 마음은 그 삶 속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사람들이 성도들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성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에서 긍휼히 여기는 삶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이해심 있고 배려심이 있는 그런 마음과는 다른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해력과 배려 심과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지목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실패하고 고난을 많이 당하여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일지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 믿음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며,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팔복의 마음을 주신 사람들에게만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주시는 여덟 가지 복된 마음을 받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이 마음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사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이 가지고 사는 믿음의 유무를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창세기 9장입니다.
창세기 9장은 홍수 이후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노아는 포도 농사를 지어서 그 수확한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서 벌거벗은 몸으로 천막 안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노아의 손자 가나안이 ‘얼레리 꼴레리(알나리 깔나리) 할아버지가 술이 취해서 벌거벗고 잠자고 있다네.’ ‘할아버지가 술 취해서 홀랑 벗고 잠자고 있다네.’라고 소리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전해들은 노아의 아들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보자기를 들고 뒷걸음질 치며 노아의 장막에 들어가서, 그 아버지의 벗은 몸을 가려주었습니다.
나중에 술에서 깨어난 노아가 이 일들을 전해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하였고, 그 아들 샘과 야벳은 축복했습니다.
창세기 9:24-27절입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그 할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들춰내었던 가나안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 아버지의 허물을 가려 주었던 셈과 야벳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삶을 통해 가장 먼저 드러나야 하는 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부요한 마음을 가진 믿음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에게 긍휼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긍휼이 있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보고, 긍휼이 없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보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이 교회는 다니는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없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살 수 있는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믿음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먼저 그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먼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주시는 여덟 가지 복된 마음을 가진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거듭난 성도들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긍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교인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성도들이 살아가야 하는 경건한 삶, 거룩한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멘.
두 번째 살펴보려는 내용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역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모든 사역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강도만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생각에는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보다, 같은 유대인들이 강도만한 사람을 더 긍휼히 여겨 줄 것 같아 보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었던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더 긍휼히 여겨 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제사장과 레위 인이 아니었습니다. 장사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가고 있었던 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의 결말에 예수님은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에게 왜 복음을 전합니까?
그 이유는 복음을 알지 못하여서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전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도 전도에 열심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의 성도가 늘어나면 그만큼 헌금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이런 목적을 가지고 전도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그 교회에서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직분자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에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마치 세상 사람들이 자기 사업을 하듯이 사업가적인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보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전도자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1:15절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 말씀을 보면 빌립보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전도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부류는 경쟁심을 가지고 투기와 분쟁과 겉치레로 전도했고, 다른 한 부류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으로 착한 마음으로 전도했다고 합니다.
이런 두 부류의 서로 다른 사람들을 보며 바울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무엇으로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도하든지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도하는지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부분이라고 합니까?
바울은 전도하는 사람보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도의 동기나 목적보다, 전도를 받아서 믿음을 가지게 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전도를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될 사람들을 생각하니, 어떤 동기로, 어떤 목적으로 전도하든지, 전도하는 것 그 자체를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얼마나 복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든지 ‘나는 그것을 기뻐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마음에 누구를 두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복음 전도자를 그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될 그 사람들을 그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바울이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겼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 뿐 아닙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왜 설교를 합니까? 내가 배운 학력을 자랑하고, 내가 가진 실력을 자랑하고, 내가 가진 뛰어난 지적 능력과 통찰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설교합니까? 아닙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들은 지적으로 뛰어난 설교를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설교도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믿음이 없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잠자고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목마른 영혼들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고, 단비를 내려 주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설교자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는 깊은 영적 교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목회자는 성도들의 마음속까지 영향을 미치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설교자들은, 내 지혜, 내 능력을 드러내려고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런 설교자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그 삶의 현장에서 겪고 있고 고민들과 영적 갈등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준비하여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성도들의 신앙을 일깨워주고, 견고하게 해주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모든 사역의 동기는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그 모든 일에서도 같습니다. 이것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에서도 같습니다. 또 이것은 목회자를 위해, 교회를 위해,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과 사역의 기초입니다. 아멘.
세 번째 살펴보려는 내용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도 긍휼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2:4-5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어서 멸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대신 내어주실 정도로 긍휼이 크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풍성하신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9:13절에서 호세아서를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믿음으로 정성을 다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드리는 재물들보다,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사는 것을 더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의인들을 예뻐해 주시고 우선적으로 불러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사역하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일을 우리에게 해 줄 때 우리는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을 다해 해주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우리는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부모님들이 연세가 많이 드시면 몸이 쇠약해져서 스스로 일하여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의 손길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때 돈을 잘 버는 자녀는 부모에게 많은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도 고마운 일이지요. 그러나 생활이 넉넉지 않은 자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죄송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부모님을 대하게 됩니다.
이 때 부모의 마음은 누구에게 더 많이 가겠습니까?
많은 생활비를 대어주는 자녀에게는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어려워하며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활이 넉넉지 못하여서 도움을 주시는 못하지만, 늘 죄송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자녀에게 오히려 애정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뭐 하나라도 도와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죄에 속하여 멸망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늘에 있는 보좌를 버려두시고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그 많은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으심을 죽어주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으로 중심으로 회개하며 나아오는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구원해 주시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긍휼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집을 나갔다가 가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불쌍히 여겨 맞아주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셨던 그 사건 속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구원을 목말라하던 수가 성 여인을 찾아가셔서 구원해 주신 사건 속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이방 거라사인 지방에서 군대 귀신 들려 고통당하던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 속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와 같은 비유의 말씀들 속에서도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사건은 바로 십자가에서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아 죽이고 있는 사람들까지 긍휼히 여기셔서, 그 사람들의 죄의 용서를 구하시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보면 긍휼의 마음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긍휼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신 긍휼은 어떻게 다릅니까?
타고난 긍휼의 마음을 우리는 ‘측은지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타고난 긍휼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 안타깝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긍휼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긍휼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심지어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들까지 긍휼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거지 나사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거지 나사로는 병들고 가난하여서 부자 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살았으면서도, 오히려 믿음이 없는 부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긍휼의 마음은 나보다 더 많이 배우고, 나보다 더 부자인 사람들까지 불쌍히 여기게 합니다. 이 긍휼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를 해하는 원수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고, 권력의 힘으로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기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이런 긍휼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이 긍휼을 한자어로 보면 ‘긍(矜)’자는 ‘창 모(矛)’자에 ‘지금 금(今)’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긍’자는 창을 들고 지금이라도 찌르려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휼(恤)’자는 ‘마음 심(心)’변에 ‘피 혈(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손에 창을 들고 찌르려는 순간이지만, 그 창으로 남을 찔러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창으로 먼저 내 자신을 찔러 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자어로 본 긍휼의 의미입니다.
또 탈무드를 보면,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켜서 이웃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낫을 빌리려 간 아들에게 그 이웃 집 사람이 ‘낫을 빌려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상활이 바뀌어서 그 이웃집 사람이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저 사람들은 우리에게 낫을 빌려 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주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낫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낫을 빌려 줄 수 없다는 것은 복수이다.
저 집에서는 낫을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 같지 않다’는 마음으로 낫을 빌려주면 이건 증오이다.
그렇지만 저 집에서 거절당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니까 빌려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은 긍휼이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긍휼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긍휼은 마음의 태도이면서,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나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긍휼의 마음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코로나 19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북한에서 또는 세계 여러 곳에서 믿음 때문에 박해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불법 체류자로 미국에서 살다가 코로나 19에 걸린 사람들이 미국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 감염 사실을 숨기고 견뎌보려다가 그냥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비록 그 사람의 삶은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는 높아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믿음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믿음 없는 채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살펴보려는 내용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받게 될 복입니다.
7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면 그런 우리들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다음은 사람들에게도 긍휼히 여겨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마음 안에 도무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는데 왜 긍휼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상대방이 전혀 긍휼히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사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콩을 뿌리면 반드시 거기에서는 콩이 납니다. 팥을 뿌리면 반드시 거기에는 팥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긍휼의 씨를 뿌리면 거기에는 반드시 긍휼이라는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의의 씨를 뿌리고, 긍휼의 씨를 뿌리고, 청결의 씨를 뿌리고, 화평의 씨를 뿌리는 등등 좋은 씨를 뿌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뿌린 대로 그 열매를 거두며 살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들여 뿌린 만큼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늘 씨를 뿌리지는 않고 미래에 열매만 거두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서 오늘 씨를 뿌려서 내일 그 열매를 거두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의 결단이 우리들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누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눈에 누가 발견되었습니까? 스데반이 발견되었습니다.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하고 심지어는 저주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 사람들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한 것 같이, 스데반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긍휼의 마음으로, 자신을 돌로 치고 있는 유대인들의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하는 것을 하늘에서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긍휼의 마음으로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순교하는 스데반을 발견하시고, 너무 기쁘셔서 그대로 보좌에 앉아 있지 못하시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죽어 하늘을 향해 오고 있는 스데반을 환영해 주셨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과 스데반과 같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면, 스데반을 기쁨으로 영접해 주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들도 기쁨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한 주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모두 받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