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설교 서론
마태복음 5:1-12
마태복음은 그 구조를 보면 예수님의 다섯 편의 설교를 중심에 두고 그 사이 사이에 사건들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배치하고 있는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다섯 편의 설교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설교가 바로 5-8장에 나오고 있는 산상설교입니다.
두 번째 설교가 바로 10장에 나오는 제자 파송 설교입니다.
세 번째 설교가 바로 13장에 나오는 천국 비유에 관한 설교입니다.
네 번째 설교가 바로 18장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설교입니다.
다섯 번째 설교가 바로 24-25장에 나오는 종말에 대한 설교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다섯 편의 설교 중에서 그 첫 번째 설교인 산상설교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때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대면하게 되면 다릅니다. 이 설교를 대면하게 될 때에는 격려가 아니라 좌절과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산상설교를 대할 때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여덟가지 복된 마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런 복된 마음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복된 마음은 당시 산상설교를 하고 계신 예수님이 가지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 마음 안에는 이런 복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죄와 악으로 디 범벅이 된 죄악 된 마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둘째는 5:21절, 27절, 33절, 43절 등에서 나오고 있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거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다. 간음 한 자다.’ 라고 하시는 말씀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에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들의 나타난 행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등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율법은 사람의 나타나고 드러난 행위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 이 율법도 사람들이 지켜 행하며 살 수 없어서 그 주신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로마서 3:20절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것들을 보면 그것은 나타난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위 보다 더 깊은 사람의 숨겨진 마음과 그 마음의 동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직한 자기 관찰자들은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이 산상설교의 말씀에서 자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또 예수님께서 성도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고 계신 삶의 수준을 보면 48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전 하라.’라고 요구하고 계시는 이 말씀은 ‘완전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라고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살기를 요구하시는 삶은 하나님 차원의 삶, 하나님 차원의 완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이 예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 문제를 놓고 수많은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그 논의 중 몇 가지만 간추려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12절의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런데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다 이 말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황금률의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이상적인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삶을 그 이상적인 목표로 정하고 더 나은 삶 더 이 말씀에 가까운 삶을 살려고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아담 안에서 부패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부패하고 죄악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악 되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그 살아가야 할 이상적인 삶의 기준을 제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사람들은 비록 이 산상설교에서 말씀하고 있는 요구에는 온전히 이룰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같이 막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상적인 삶의 모델을 설교를 통해 제시해 주심으로 성도들이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힘쓰도록 하기 위해서 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또 다른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율법적인 기능을 하는 예비 복음으로 보았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없듯이, 산상설교의 말씀들도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이 지켜 행하며 살 수 없는 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구약의 성도들에게 주신 율법이 그 죄를 깨닫게 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이 산상설교의 말씀 또한 신약의 성도들에게 율법적인 기능을 하여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아오게 하는 율법적인 기능을 하는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고 하심으로, 옛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구약의 율법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을 비교하면서 말씀해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구약의 율법과 자신의 말씀을 비교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이유는 이 산상설교의 말씀과 구약의 율법이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또 다른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위기의 시대 사람들에게 주신 임시직인 윤리라고 보았습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삶 즉 마치 벼랑 끝에 서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위기의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신 임시적인 윤리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또는 이 세상의 역사가 곧 끝나가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난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가장 빠르고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신 임시적인 윤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산상설교의 말씀을 통해 도전을 받고 또 자신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의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넷째, 로마 교회는 이 산상설교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산상설교의 윤리적인 기준과 요구들이 너무 높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한 가지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1절에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서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은 일반 대중인 무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제자로 선택하신 12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신부와 사제들과 같이 특별히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지켜 살아가야 할 말씀이라고 하면서 일반 카톨릭 신자들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말씀이 되게 했습니다.
다섯째, 세대주의자들은 산상설교는 천년왕국 시민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세대주의자들도 산상설교가 요구하고 있는 윤리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내 놓은 견해를 보면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은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끝이 난 후에 이 땅에 다시 세워지게 될 이상적인 왕국인 천년왕국 시대 백성들이 지키며 살아야 할 윤리이며 교훈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말은 세대주의 자들도 오늘날 성도들은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을 지키며 살아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경건한 성도들은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윤리적인 기능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산상설교의 말씀은 천국 시민의 윤리로서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행하며 살아야 할 실천적인 윤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이전의 모든 견해와 달리 산상설교의 모든 말씀들은 그리스도인이 지켜 행해며 살아야 할 윤리적인 삶에 대한 말씀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 견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 하나는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으니 지금 내 심령은 비록 거만하고 교만하고 굳어 있는 사람이지만 이런 자신의 심령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회개하므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심령을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서 ‘당신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싶으면 굳은 마음을 회개하고 마음속에 있는 쓴 뿌리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 되게 하십시오.’ 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2) 또 다른 한 견해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성도들에게 ‘심령이 가난 한 자’로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미 가난한 심령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천국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께 복 받을 마음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받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견해가 성경과 부합하는 것입니까?
3절의 말씀을 보면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복 되도다.’ 라고 선언하고 있는 이 복에는 헬라어 ‘마카리오이’(μακάριοι)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카리오이’라는 단어는 형용사로서 동작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존재와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서에서 ‘복 되도다.’ 라고 선언하고 있는 이 복은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 존재나 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가 팔복의 말씀을 쉽게 조금 설명해보면 이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는 이 말씀은,
-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니 내 심령은 비록 거만하고 교만하고 굳어 있는 사람이지만 이런 자신의 심령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회개하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심령을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서 ‘당신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싶으면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마음속의 쓴 뿌리를 제거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라고 교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8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상태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즉 이미 ‘가난한 심령’을 ‘애통하는 심령’을 ‘온유한 심령’을 선물로 받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된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내가 노력한다고 내 마음을 가난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한다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애통하는 마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그런 마음을 은혜로 선물로 주실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볼까요?
1. 내가 예수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믿음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고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이것은 성경이 복되다고 하는 가난한 심령을 가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이 마음에 주실 때 우리는 가난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누리며 사는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는 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말을 산상설교에 적용시켜 보면 이 산상설교의 말씀은 ‘너희가 이런 수준이 되도록 노력해라. 그래야 구원받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듯이,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도 은혜의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팔복의 말씀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산상설교의 이 복은 결코 내가 수고하고 또 내가 노력해서 쟁취해 나가야 하는 복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상태에 들어가 있는 복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복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누리고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힘쓰고 애써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복을 이미 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이런 말씀을 보면 예수 믿는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주신 그 풍성한 은혜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또 그 은혜의 선물을 삶 속에서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하늘과 땅에 속한 은혜와 복들을 다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주신 복을 알지 못하여서 누리며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미 하늘에 속한 복과 땅에 속한 모든 은혜와 복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으신 복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하시는 복을 다 받아 누리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자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께서 그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은혜와 복을 믿음으로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 목전에 두고 있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비록 그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지만 너희가 믿음으로 밟는 그곳만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어도 이들이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땅을 밟지 아니하는 곳은 차지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밟는 곳은 다 정복할 수 있었지만 믿음으로 밟지 못했던 곳은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살다가 이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은혜와 복에 대한 약속들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그 모든 약속들을 우리는 언제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밟고 정복할 때입니다.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들이 있어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그래서 그것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그 모든 약속들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권리를 믿고 선언하고 취하면 됩니다.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 심령에 역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적인 삶에 역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이 있었던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백성들에게 전쟁에서 승리주실 것을 믿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 단을 앞세우고 전쟁에 임했습니다. 이렇게 전쟁을 한 왕은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이 믿은 그 믿음대로 여호사밧과 그 군대에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역사하심으로 이들은 칼 한 번 뽑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똑 같이 전쟁에 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인이었던 적장 골리앗 앞에서 무서워서 숨었으며 하나님이 아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이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울 왕은 믿지 못한 그대로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져서 길보아 산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갔다고 그 불치의 병에서 고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내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려고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는 고통을 받으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한 두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수를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를 함께 살펴보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이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약속하시고 있는 그 모든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선언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들의 삶 속에 역사하여서 우리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는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육신적인 삶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삶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깊은 영적 은혜들을 누리면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당시 최고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면서 살려고 할 때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영적인 은혜와 복을 다 주셨다는 것을 믿고 의지할 때에는 달랐습니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 가운데 그는 영성이 깊은 신앙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사도바울의 그 깊은 영성과 그의 깊은 말씀에 대한 이해와 그의 깊은 은사와 역사들과 그의 깊은 지혜와 예견력과 통찰력 등등은 다 바울이 예수를 믿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것을 믿고 나아갔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나라까지도 그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 대한 것들을 믿음으로 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신앙으로 그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 모든 분야를 신앙으로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으로 세상과 세상의 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것을 믿고 우리가 어떤 분야에 종사하고 살든지 관계 없이 내게 주어진 그 분야를 믿음으로 정복해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믿음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들은 앞으로 산상설교를 공부해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믿음 안에서 내게 이미 이 복된 마음들을 다 주셨음을 믿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이 복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그 모든 은혜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21세기 한국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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