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5. 1. 12. 13:34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25-37

 

1. 여는 말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이런 현대인들은 조그마한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도 그것이 내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얼굴을 붉히며 다투고 싸웁니다. 오늘날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미덕은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다소 부담스러운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 말씀에서 영향을 받고 도전을 받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세운 사람들도 있고, 자선사업 기관이나 단체를 세운 사람들도 있고,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 가서 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평생 섬기는 삶을 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나의 소유와 권리를 다 누리고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이런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사람이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도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자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악해져 갔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윤리적 타락이 극에 달한 사회입니다.

윤리가 실종되고 동성애가 만연한 사회입니다. 가치관의 혼돈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청소년이 탈선하는 암담한 사회입니다.

 

이런 이 시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이 말씀은 우리들이 꼭 듣고 알고 있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듣기 힘이 들더라도 이 말씀을 잘 듣고, 꼭 마음에 간직하고 그 살아가는 삶 속에 실천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영생을 얻는 삶

 

이 말씀을 주신 발단은 이렇습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질문을 했던 사람이 더 있습니다.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부자 청년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고 하실 때 부자 청년은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이웃 사랑의 계명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내가 어려서부터 그 계명들을 다 지키며 살아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청년에게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계명으로 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마음으로 실재 삶으로 하는 이웃 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은 계명을 지킴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마음으로 실제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하며 사는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따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율법사들은 율법의 법 조항에 매여 살았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율법사들은 율법을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해 왔던 부자 청년, 기록되어 있는 율법의 조항들을 다 지켜 행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킴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하며 사는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율법사는 달랐습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네게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때 이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보면 이 율법사는 율법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율법사의 대답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이 율법사는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던 율법주의를 극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는 율법주의를 극복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이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율법의 근본정신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사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바로 율법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살 것이라는 이 말씀은 네가 바라고 원하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의 근본정신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율법의 근본정신을 따라 살고 있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경우에도 같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은 말씀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감동들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 깨달은 말씀이 주는 감동 속에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나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것으로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너희가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깨달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아무리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여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이 율법사도 우리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깨달은 말씀이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깨달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주신 말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주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예수님이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비유의 배경입니다.

 

비유는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이어주는 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예루살렘은 해발 약 750m 정도 되는 산 정상 부분에 있는 성곽 도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리고는 요단강 옆에 있었던 오아시스 도시로 해발 고도가 250m 정도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그 고도가 1km 정도 차이가 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거리는 약 30km 정도 되었습니다.

이 길은 좁고, 돌이 많았으며, 급경사와 완경사가 반복되는 아주 꾸불꾸불한 내리막길이었습니다.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강도질하기 아주 좋은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길은 아주 중요한 길이어서 상인들은 물론 성지순례자들이 꼭 가야만 했던 길이었습니다.

 

이 비유의 등장인물입니다.

 

첫째,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지고 있던 것들까지 다 빼앗기고, 심한 폭행을 당해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유대 광야 지역은 일교차가 아주 심한 지역이었기에, 그대로 두면 다음날까지 살아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둘째,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제사장은 성전 제사 업무를 담당했고, 레위인은 성전의 제반 사무와 일들을 맡아서 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일과를 마치고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 강도 만난 사람이 이들에게 도와 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못 본채,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만약 이들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면 정상참작이 가능합니다.

민수기 19:11-13절 말씀을 보면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다가 그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도 그 직무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일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행할 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카타바이노 내려오다.’ ‘내려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두 사람은 그날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들의 집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혹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되어도 집에 돌아가서 정결 의식을 행하며 쉬면 됩니다.

 

그런데도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그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을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치고 피곤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아직 강도가 그 주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빨리 그곳을 피하여 도망간 것입니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이 비유의 말씀은 그것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유대인은 자기 가족이나 동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사람들입니다. 동족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 어려움에 처한 동족을 돕지 않았던 이 행동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으로도 여기지도 않고, 마치 개나 돼지처럼 취급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와주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셋째,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전에 한 나라 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사후에 남 유다북이스라엘로 갈라졌습니다. 이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게 됩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을 점령한 후, 사마리아 성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성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안에 남아 있던 남자들은 다 죽이고 여인들은 겁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앗수르 사람들의 아이들을 낳았고,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의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조상들이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서, 자기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결과, 그 후손들이 피해를 보아서 혼혈족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 중 어느 누가 혼혈 민족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사람들은 피해를 입은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동족이면서 혼혈 민족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마치 개나 돼지처럼 천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마리아 여자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상종도 하지 않는데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상종하지 않는다.’라는 이 말은 함께 을 가지도 않고, 함께 그릇을 쓰지도 않고, 함께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함께 같은 장소에서 예배드리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동족을 못 본척하며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마치 개나 돼지 취급하며 상종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소독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인사불성인 그 사람을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데리고 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밤새 간호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 즉 이틀분 노동자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주면서 내 대신에 좀 돌보아 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비용이 더 들면 내가 장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갚아줄 것이니, 돈이 얼마 들어가든지 신경 쓰지 말고 이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동족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버린 동족을 너희가 사람 취급하지 않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율법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36절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절입니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자니이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도 그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4. 우리가 살아야 할 삶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비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 품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떤 일이 있게 됩니까?

 

먼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육체의 소욕옛 자아와의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은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자아입니다. 어쩌면 이 자아와의 싸움이 우리에게는 가장 힘든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제사장레위인의 마음속에서도 이 싸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려는 선한 마음과 너도 강도를 만날지 모르니 빨리 피해 지나가라는 이기적인 마음의 싸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기심은 그 짧은 순간에 이들로 하여금 어떤 결정을 하게 했습니까? 현장을 피해 가고’ ‘못 본채 빨리 도망가도록하였습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이 싸움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선을 행하며 살기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마음 안에는 이기적인 마음이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늘 누가 이기더라는 것입니까? ‘이기적인 마음이 늘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주랴?’라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은혜와 힘을 덧입어서, 내가 싸워나가야 하는 싸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아와의 싸움에서 승리해 나가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절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또 이 세상 사람들과 그들이 이룬 문화와의 싸움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 학문 등등의 모든 분야는 사실 이 세상의 임금인 사단의 수하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 나라와 이 세상 권세 자들을 모두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단 마귀는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도,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 문화와의 싸움에서도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은, 7년 대환난이라는 환난의 파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는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대 환난의 파도가 휘몰아쳐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종교적인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문제가 무엇입니까?

본격적인 박해의 시대가 오기도 전에 벌써 교회는 이단의 물결에 미혹되고 있고, 교회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려는 인본주의, 세속주의, 종교다원주의에 미혹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리 주변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점점 우리 주변에서 하나둘 줄어들더니 이제는 찾아보려고 해도 잘 찾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더욱더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그런 시대가 올 것입니다.

 

앞으로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길은 점점 더 외로운 길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진리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 신앙의 대적들은 우리 가까이, 우리 생활 속에까지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가족이나 우리의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가 믿음으로 싸워나가야 할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가 올지라도 우리는 바른 믿음에 굳게 서서, 끝까지 좁은 길을 걸어가고, 좁을 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있을 이 치열한 영적인 싸움, 믿음을 지켜 나가기 위한 싸움들이, 우리를 긴장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좁아지게 하고, 우리의 사랑을 작아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었던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치열한 싸움을 싸우면서도, 그 가진 진리를 굳게 잡고 살아남은 교회가 되려고 하다가 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던 그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4:11-12절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이런 에베소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엄중하셨습니다.

그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변할지라도 성도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비록 종말 시대는 악이 성행하므로 사랑이 식어진 시대가 될지라도, 그런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은 처음 가졌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요구하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싸움을 해 나가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의 악한 역사 때문에 우리 마음이 좁아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앞에 닥치는 상황들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늘 백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3: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5: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진리, 사랑으로 역사하는 소망, 사랑으로 역사하는 긍휼, 사랑으로 역사하는 자비 등등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6:36절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자비는 사람에게는 없는 신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삶 속에서는 이 자비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자비를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신명기 24장의 말씀을 보면, 사람이 그 이웃에게 무엇인가를 꾸어줄 때 대신 전당물을 잡게 되는데, 그 전당물로 맡긴 것이 그날 밤에 덮고 잘 겉옷이라면, 그것을 해가 지기 전에 그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합니다. 겉옷을 돌려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밤의 추위를 막아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겉옷을 돌려주면 그 사람이 밤에 따뜻한 겉옷을 덮고 자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얼마나 너를 위해 축복 기도해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추수와 관련해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네가 밭에서 추수할 때는 언제나 그 추수한 들판에서 떨어진 이삭을 주우려고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추수하면서 이삭을 조금씩 남겨 두라고 합니다. 추수한 곡식단을 집으로 옮기다가 혹 밭에 흘리고 온 것이 있거든 너는 그것을 다시 가지러 가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냥 놓아두라고 합니다. 너는 6년 동안은 밭에서 추수하여 그 수확물을 거두며 살지만, 안식년인 제 7년째는 그 밭을 그냥 놓아두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그 밭에서 곡식을 지어 먹을 수 있도록 해주라고 합니다.

 

고아나 과부, 나그네 등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대할 때, 너희는 특별히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을 대할 때에는 너도 과거에 믿음이 없었던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해 하는 그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해 주라고 합니다.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배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동물 보호에 관한 여러 가지 금지법이 있습니다. 어미 새와 알을 동시에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미 새와 새끼 새를 동시에 잡지 말라고 합니다.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삶아 먹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물고기를 잡을 때 치어는 잡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미 물고기가 산란할 때는 또 잡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종종 보는 일인데 앞발만 사용하고 뒷발은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강아지의 몸에 두 개의 바퀴를 묶어 주어서 앞 발로만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 견주가 있더라고요.

 

2008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이 선한 사마리아 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기 이전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있어도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해 내어 인공 호흡을 하다가, 너무 세게 해서 갈비뼈가 부러지면 그렇게 한 그 사람이 다 배상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잘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19 구조대원이 교통사고가 난 사람, 그래서 차에 끼어 있는 사람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만약 그 사람에게 조금의 상해라도 입히게 되면 다 물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119 대원들도 적극적으로 구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법은 다른 사람을 돕다가 상해를 입힌 것에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법입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때는 여전히 조심해서 도와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회사에서 회식을 하다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동료 직원들은 그 여직원을 놓아 두고 갈 수 없어서 자기들도 술이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직원이 흑기사를 자처하고 나셨습니다. 두 사람은 교대로 집까지 업고 가는 길에 여러 번 넘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속에 그 여직원은 뇌를 다치게 되어서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여직원은 법원에 그 두 사람을 고소하였고, 법원은 남자 동료 두 사람에게 각각 15000만원씩 물어주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판결문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울 때에도 상황을 잘 봐서 내가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없을 때는 빨리 신고하여서, 전문적인 사람들이 와서 도와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 모든 상황들을 잘 생각해서 어떻게 도울지를 지혜롭게 잘 결정하고 내가 해줄 수 있는 도움을 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자비를 베풀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주신 말씀이면서 또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고 계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은 자비가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비를 실천하며 살려고 하면 악한 사람들이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들은 이익을 목적하며 살아가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성도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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