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가복음 2:18-22
들어가는 말
오늘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이하게 될 때,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반성할 뿐 아니라, 새로운 기대와 각오로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금년에는 어떤 계획과 각오로 이 한 해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마가복음 2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앞에 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그 사람들 형제 중에 장남이 어느 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남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전처럼 동생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며 잘 지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남 가족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거리도 멀고 또 삶이 바쁘기 때문에, 형제들이 장남 집에서 드리는 제사에 잘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장남이 대전으로 이사를 간 후에는 제사도 폐하고, 제사 음식도 장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장남이라고 형제들과 상의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이해도 되었습니다.
저라도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불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잘못도 있어 보입니다. 그 사람들은 유교적인 전통을 신봉하고 있는 자신들과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된 장남의 달라진 입장을 이해해 보려고는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입장에서 불평하고 비난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원인이 아닙니까?
개인이나 단체가 갈등하는 것을 보면, 모두 자기의 입장만 주장하지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없습니다. 고질적인 한국 정치의 문제도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고집불통인 정치인들을 보고 있자면 불쾌지수만 올라가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현실은 혼란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현실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누가 뽑아주었습니까? 국민들이 대통령으로 뽑고 국회의원으로 뽑은 것입니다.
제발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을 뽑을 때 인품과 도덕성, 능력과 자질까지 갖춘 사람, 존경하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표를 주시길 바랍니다. 제 솔직한 심정은 엉터리 국회의원들이 양산되지 않도록 국회의원 숫자를 확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국회의원이 되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뽑아놓으니, 별 이상한 사람들이 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정치가 불신을 받도록 하고 있지 않습니까?
금식의 문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마가복음 2장에도 이런 문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관습에 매여서, 새롭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제자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비난한 내용은 바로 금식 문제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한 번씩 7월 대 속죄일에 금식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적인 열심이 특심 했던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는데 월요일에 했던 금식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하산 한 날을 기념하는 금식이었습니다. 목요일에 했던 금식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받기 위하여 모세가 두 번째 시내 산에 올라간 날을 기념하는 금식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런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에 따라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전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전통과 관습을 중요시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18절입니다.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질문을 한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은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느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제자들이 종교적인 전통과 관습을 무시하고 금식을 하지 않는데 당신이 이렇게 가르친 것이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들이 금식할 수 없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혼인집의 신랑과 축하객들은 금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19-2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여러분도 다 혼인예식에 많이 참여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혼인예식은 하루에 끝납니다. 예식장을 빌려서 정한 시간에 혼인 식을 하고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달랐습니다.
당일로 혼인예식을 마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보통 일주일 동안 계속 혼인 잔치를 했습니다. 신랑은 그 가족과 친척과 친한 친구들을 불러서 일주일 동안은 세상 근심 걱정을 다 잊어버리고 혼인하게 됨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습니다.
혼인예식이 일주일 동안 지속되다가 보니 도중에 반드시 금식하는 날이 두 번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금식하는 그날은 혼인예식을 잠시 멈추고 금식한 후에 혼인예식을 계속 이어갔습니까? 아닙니다. 혼인예식 중인 신랑이나 손님들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혼인예식 중에는 금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 규정을 두어 인정해 주었습니다.
왜 이런 예외 규정을 두었습니까?
만약 혼인예식의 주인공인 신랑이 금식하고 있으면 혼인 잔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혼인예식을 축하해 주려고 온 손님들이 금식하고 있으면 그 혼인 잔치의 흥이 나겠습니까? 그래서 혼인예식의 당사자인 신랑과 그 손님들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한 유대인들에게, 당시 일반화되어 있었던 혼인예식을 예로 들면서, 자신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구약성경에서 누누이 약속해 오신 혼인 잔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혼인 잔치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릴 때이고, 지금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구원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친히 이 일을 보고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있는 것’을 너희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국혼인잔치의 주인공인 내가 금식하고 있으면 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금식이 어울리기나 한 것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귀신에게서 놓여나게 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금식이 어울리기나 한 일이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금식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놓여나고, 불치의 병을 고침 받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된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것은, 금식보다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 속에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예배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우리에게 어울리는 것은 금식이 아닙니다. 금식보다는 구원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과 예배가 더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언제 제자들이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혼인 잔치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테러범들이 나타나서 신랑을 납치해 가거나 죽이게 되면, 신랑을 잃은 슬픔에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혼인 잔치에 축하객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은 다 혼인을 기뻐하며 축하하는데, 자기는 금식 중이라고 하면서 수염도 깎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고 회개 기도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행동은 혼인 잔치를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니고, 혼인 잔치를 훼방 놓으러 온 행동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잔치가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성령 충만함을 받고, 그 영혼이 거듭나고, 각종 질병에서 해방되는 등등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금식은 이런 잔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잔치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구원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믿음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예배를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장차 천국에서 누리며 살게 될 은혜를 감사함으로 미리 내다보며 이 주일예배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축제가 되고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살 그날을 내다보면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에 매여 주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의무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 속에서, 기쁨으로 자원하여 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많은 날 중에 주일날을 구별하여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주일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부활의 소망을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주일을 지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또 금식할 수 없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생베 조각으로 낡은 옷을 수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21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이 말씀도 당시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즘에는 나이롱으로 된 옷이 많아지면서 세탁을 해도 옷이 별로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인조섬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세탁하게 되면 옷이 현저하게 줄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옷이 떨어졌어도 새 천 조각으로 수선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세탁할 때 갖다 붙인 새 옷 조각이 줄어들면서 옷을 당기어서 옷이 망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하늘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제자들이 왜 금식할 수 없는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혼합주의 적인 경향들
유대인들은 전통을 중요시했던 보수적인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후에도 유대교 전통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전통에다가 새롭게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을 혼합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싸워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들에게 너희가 하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표시인 할례도 받고, 또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들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종교적인 관습과 전통이라는 낡은 옷에다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복음의 생배 조각을 혼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생베 조각으로 낡은 옷을 기워입을 수 없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 유대교도 기독교도 다 이상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와 헬라철학을 혼합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와 세속주의를 혼합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바로 구복 주의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혼합 종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생베 조각으로 낡은 옷을 기워입지 말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혼합주의 신앙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은 결국 둘 다 못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모세를 통해 시작된 율법의 시대는 이제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 두 시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혼합주의 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려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참 진리, 바른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배 조각을 낡은 옷에 갖다 붙이지 말라는 것은, 복음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지 복음과 다른 무엇을 혼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복음을 믿는 믿음 위에 우리 신앙을 세워나감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바른 믿음에 가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또 금식할 수 없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2절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도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포도주를 유리병에 넣어서 보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셨던 당시에는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넣어 보관했습니다.
가죽 부대는 세월이 지나가면 낡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낡아진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포도주가 숙성하면서 내는 gos 때문에 약한 부분이 터지게 됩니다. 그러면 포도주가 다 쏟아져 버립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언제나 견고한 새 가죽 부대에 넣었던 것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모세의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새 가죽 부대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고,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옛 언약으로 돌에 새겨 주신 것이고, 복음은 새 언약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써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정죄하는 기능을 하지만 복음은 구원하는 기능을 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합니다.
옛 부대는 무엇입니까?
율법 아래서 살아 가는 사람, 율법에 속해 살아가는 사람,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는 옛사람입니다. 아직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주의 종들은 반드시 양복을 입어야 한다느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머리를 염색하면 안 된다느니,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느니 등등 율법적인 계율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새 부대는 무엇입니까?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령을 받고 변화된 새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율법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삽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 중에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형식과 전통에 매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새 가죽 부대와 같이 복음 안에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가죽 부대에 넣어두는 것은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맛이 깊은 포도주가 됩니다. 이 포도주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이고, 구원의 진리입니다. 이것들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포도주를 넣어두는 가죽 부대는 어떻습니까?
가죽 부대는 세월이 가면 낡아지고 헤어집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를 담을 때는 새 가죽 부대를 써야 합니다.
그러면 가죽 부대는 무엇입니까?
이 가죽 부대는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복음을 담아 그 시대 사람들에 전해주는 그릇입니다. 이 그릇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과거와 다른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주판으로 계산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컴퓨터로 계산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주판으로 계산해서는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변화된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의 포도주는 시대가 아무리 흘러가도 변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인 가죽 부대는 시대마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변할 수 없는 진리는 변화시키고,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이 변하는 것은 목숨 걸고 막게 됩니다.
과거 우리나라 교회들이 왜 분열해 왔습니까?
신앙의 본질 때문입니까? 아니면 신앙의 형식 때문입니까? 교회나 교파가 갈라지게 된 원인은 거의 다 형식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남녀 7세 부동석이라고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을 때도 기억자 교회를 지어 남녀 석을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기억자 교회는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한 가족이 예수를 믿어도 남자는 남자석으로 여자는 여자석으로 가야 하니, 어린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 예배 후에 식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억자 교회는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새로 건축하게 될 때 나온 주장이 바로 그냥 일자로 된 교회를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반대가 심했습니다. 어떻게 남녀가 유별한데 한 장소에 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재안이 나왔습니다.
교회는 편리하게 일자로 짖되 가운데 휘장을 쳐서 남녀 석을 구분하자는 안이 나왔습니다. 이 안이 제직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하자 기억자로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분리해 나감으로 교회는 분리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해가면서 남녀가 한 교실에서 교육도 받고, 직장생활도 한 곳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인데도 교회는 가운데 휘장을 치고 남녀 석을 구별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보기에도 교회는 시대에 뒤떨어져 보였습니다.
그래서 시대에 맞게 불편한 휘장을 걷어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격렬한 논쟁을 거친 후에 휘장을 걷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성도들은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는 것, 세속화 되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교회는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맨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겨울에 얼마나 그 바닥이 차갑고 불편했겠습니까? 그래서 방석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 후 교회에서는 ‘방석을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또 다투고 싸우다가 교회는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또 나중에는 의자 생활이 일상화되면서 성도들이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장의자를 놓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거의 다 장의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교회에 들어놓는 것을 가지고도 또 싸우다가 교회는 분리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면 이런 문제들은 아주 우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앞으로도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변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은 오직 진리뿐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을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새로운 시대 상황에 맞게 새로운 그릇 즉 새로운 부대에 담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인 포도주는 변하지 않지만, 그 포도주를 담는 그릇은 시대 변화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반대로 진리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변화시키는 이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단들의 유혹에 넘어가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왜 이런 미혹에 넘어가고 왜 이런 사람들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던 교주 안상홍이 늙어 죽었습니다.
그 죽은 교주의 영이 재림하여서 그 마누라 한길자에게 임하였다고 하면서 한길자가 어머니 하나님이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이 사람들은 어머니 하나님을 전하고 다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이단의 실상입니다. 이런 엉터리 주장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어 가는 것입니까?
전도관은 어떻고, 통일교는 어떻고, 신천지는 어떻습니까?
저는 왜 사람들이 이런 이단들의 유혹에 넘어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 교회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다투고 싸우다가 갈라지고 갈라져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진리의 말씀을 변개시키고 있는 이런 이단들에 대해서는 왜 관대합니까? 교회에서는 전도관의 가르침이, 통일교의 가르침이, 신천지의 가르침이 엉터리라고 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오류들이 발생했습니까?
그 이유는 기독교의 본질과 형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본질은 절대로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본질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는 더 더욱 믿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인 천국을 믿지 않고 지상 천국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천년왕국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그곳을 이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증인들의 전도 지를 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행복한 지상 천국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바꿔버린 이단들입니다.
그러면 형식은 무엇입니까?
형식은 교회를 기억자로 지어서 남녀를 구분하여 예배드리는 것, 가운데 휘장을 치고 남녀 석을 구분하는 것, 교회에서 방석이나 의자를 사용하여 예배드리는 것 등등이 다 형식입니다.
이런 형식들은 어떤 것을 취하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형식이 바뀌어도 신앙의 본질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으시고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불변한다고 주장하여야 하는 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붙잡아야지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을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상황에 맞게 새 부대 새 그릇에 담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통해, 포도주라는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 진리를 담아내는 그릇인 부대는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날은 과거와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 변화된 시대 상황에 맞게 우리들도 복음을 전해주는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목회하는 방법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쉽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신앙의 진리를 붙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전도도하고 목회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25년도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교회에 주어진 숙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진리의 말씀, 복음의 진리를 어떤 부대에 담아서 사람들에게 전해줄지를 기도하며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어떻게 이 종말시대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지 기도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2025년도에는 이런 일을 감당 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하늘의 은혜를 주시고, 하늘의 지혜를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금은 은혜받을 때이며,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세 가지 말씀을 통해서, 율법의 구약 시대는 가고, 복음의 새 시대가 왔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옛 시대의 부산물인 ‘율법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새 시대의 복음을 담아낼 수 없음’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복음 안에 우리 신앙을 굳게 세워나갈 뿐 아니라,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이 호감 가질 수 있는 방법으로, 목회도 하고, 전도도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시대 속에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도움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 소원과 기도를 들으시고, 이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사역해 나가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종말시대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군들이 되고, 복음의 풍성한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가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0) | 2025.01.12 |
---|---|
지혜롭게 대비하는 성도 (4) | 2024.12.22 |
예수님의 생애 (9) | 2024.09.01 |
죄란 무엇입니까? (1) | 2024.08.04 |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신 말씀 (0) | 2024.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