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4. 8. 4. 17:16

죄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6:7-13

 

우리는 죄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죄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누군가의 죄에 대해 말하게 되면, 그 말을 통해 내 죄가 드러나고, 내 불의가 드러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죄에 대해 말하거나 지적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는 말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홍수가 범람하면 그 피해는 어마어마합니다.

홍수는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힘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기꾼 한 사람이 계획적으로 사기를 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피해를 보게 됩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죄에 대한 면역이 생겨서 그런지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각종 사기 범죄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은 죄가 일상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아 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살면서 롯은 그 마음이 상하였다.’고 합니다. 노아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노아와 같이 롯과 같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두 주 전인 지난달 말에 오세훈 서울 시장,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자로 나온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인의 사법리스크로 여러가지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명 대표는 이제 웬만한 부패를 행하여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하얀 옷을 입고 식사를 하는데 김치 물이 옷에 몇 방울 튀게 되면 얼마나 보기 흉합니까? 그런데 이재명 전 대표는 아예 흙 색깔과 같은 옷을 입고 사는 사람 같아서, 웬만한 오물이 튀어 그 옷에 묻어도 별로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재명 전 대표는 죄가 일상이 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웬만한 죄를 지어도 사람들에게 그것이 확 들어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당의 거의 90%의 지지를 받고 있는 유력한 당대표 후보자, 유력한 대권 후보자가 이 정도의 사람이라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한 거짓말이 들통이 나자, 그 별거 아닌 거짓말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다가 결국에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서로서로가 많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서도 뻔뻔스럽게 자기 의를 주장하며 활개를 치고 다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조그마한 거짓말을 하고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힘들어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 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꿈꾸는 삶이 아닙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전해주고 있는 복음이 바로 이 복된 삶에 대한 약속이 아닙니까?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오늘 우리는 이 죄의 문제를 심도 있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하신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 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함으로 세상에 들어온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 들어온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인간 사이의 관계까지도 단절시켜 왔습니다. 인류가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 모든 불행들은 모두 다 이 죄가 가져다준 불행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하게 되는 죽음도 죄로부터 왔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고난모든 질병들도 다 죄가 가져다준 것입니다. 죄가 없었으면 이런 것들이 우리 삶 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불행해진 세상행복한 세상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국가 경제를 발전시켜서 소득이 높아지도록 해야 합니까? 물론 경제가 발전하고 나아지게 되면 경제발전이 가져다주는 편안함과 편리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경제발전으로는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전한 사회가 되면 될수록, 더욱더 지능적이고 악날한 범죄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또 아무리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는 언제나 경제적 불평등양극 화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며 살 수는 없습니다. 또 경제가 발전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는 언제나 소외된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경제성장이 가져다준 부의 분배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욱더 불안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정부들은 너도나도 복지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사회 복지 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지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곧바로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류 최고의 복지국가로 알려진 북유럽 국가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자살률이 세계 그 어느 나라들보다 더 높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인류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는 죄를 제거 해나가야 합니다. 죄가 줄어들면 그만큼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늘 개인과 사회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정의가 물 같이,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사회를 만들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된 죄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선인 줄 알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4:17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이 말씀은 우리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내와 남편에게, 가족과 이웃에게, 어떻게 행하며 사는 것이 선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선한 그 일을 행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선한 일인지 알면서도 내 입장과 내 처지를 먼저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믿음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 나와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다투고, 비판하고, 분쟁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혹은 상대방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소외시킴으로 내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삶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갈 삶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런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예수 믿기 이전에는 하나님과 불화하던 우리들이, 예수를 믿은 이후에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화목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과의 화목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을 일컬어서 화목의 직분을 받은 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목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되게 합니다. 자연보호 단체, 환경보호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가정에서 불화를 일으키고, 교회에서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면 국회를 싸움터로 전쟁터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가 똑똑해서, 자기가 잘나서 그런 일을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지지하고, 이런 사람들을 후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다투고, 싸우도록 합니까?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사람들을 지지하도록 합니까? 죄가 그렇게 다투고 싸우도록 하고, 죄가 그렇게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선을 행하기보다는 갈등하고 분쟁하기를 더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은 구제 불능의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죄를 버릴 수 있습니까?

누가 이런 죄에서 자유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가슴을 치고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만이, 죄의 영향력에서 조금씩이라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죄의 영향력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조금씩이라도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들이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그때 우리는 여전히 죄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 비참한 모습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갈등을 통해서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의 삶에 동참하지도 않습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화목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처럼, 화목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화목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품성이 바로 겸손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또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화목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따라 그것이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힘을 다하여 그 선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늘 화목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죄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둘째,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로마서 14:23절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라고 하면, 의란 무엇입니까?

의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들에게 주시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행복에는 이 세상이 주는 행복도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얻고, 무엇인가를 이루게 되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은 공부를 잘했다고 학교에서 상을 받게 될 때 행복을 느낍니다. 이 행복을 누려본 학생들은 더욱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왜요. 상을 받을 때 주어지는 행복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행복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고,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바벨론 왕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관리들에게 그 신상에 절하며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절하지 아니하면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발을 당해 왕 앞에 불려 갔습니다. 이때 이 세 사람은 어떤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 건져내시리이다.’ 자신들이 섬기며 살고 있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왕의 손에서, 풀무 불에서 구해주실 것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후에 또 어떤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지 아니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믿음으로 죽겠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세상 너머에 있는 계신 하나님과 그 나라를 바라보는 신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해주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꺼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 믿음의 고백을 할 때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행복했겠습니까? 두렵고 불안했겠습니까?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믿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고백을 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 영혼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더라도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주시는 행복과 기쁨은, 이 세상이 주는 행복과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잘은 몰라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 믿음의 고백을 할 때,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 행복,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누리며 사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개척한 교회,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아무 일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주시는 이 기쁨, 이 감격, 이 평강을 충만히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이렇게 믿음으로 행한 것을 ()라고 하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은 죄의 모습을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셨는데, 마귀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여기서 우리는 하와의 의심하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하와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의심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심하고 먹는 그것이 죄가 되었고, 그 죄의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이후 모든 사람들의 삶에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불행해진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재물을 추구하며 사는 이유입니다. 권력을 추구하며 사는 이유입니다. 명예를 추구하며 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참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참 행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들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신앙적인 행동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두 가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능력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왕의 손에서, 뜨거운 풀무 불에서 건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 건져내시리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왕의 손에서, 풀무 불에서 구원해 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그 메시야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믿음 중에 어떤 믿음이 더 큰 믿음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에 기적과 능력과 역사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더 큰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에 기적을 베풀어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생명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며 믿는 믿음이 더 큰 믿음입니까?

 

기적을 바라는 신앙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소망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믿는 믿음은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입니다. 이 두 믿음 중에 참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소망하며 구하는 믿음이 참믿음이겠습니까?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구하는 믿음이 참믿음이겠습니까?

 

참믿음은 그 마음을 이 세상에 두고 있는 세속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두고 사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소망을 이 세상 속에 두고 살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소망을 하나님과 그 주실 나라에 두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부인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부인할 수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아멘.

 

또 죄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셋째,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6:9절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세상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악을 행하며 사는 사람들의 악한 행위를 보고 죄라고 해야지, 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악한 행위가 죄가 아니다.’라고 한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악한 행위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요한13:4절을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불법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를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 죄인이 되었듯이, 인간이 행하는 모든 불법과 범죄가 다 죄입니다.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바로 앞 절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여 하늘 보좌로 올라가신 이후에,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분,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책망하실 터인데, 9절에서는 그 책망하시는 죄가 바로 예수 믿지 않은 죄라고 합니다. 아멘.

 

성령이 오실 때는 시기적으로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이후입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홀로 지시고, 십자가에서 그 죄의 값을 다 치루어 주신 이후입니다.

 

이때부터는 하나님이 사람의 죄악을 책망하시는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행하며 사는 모든 악한 행위가 다 죄이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신 이후에는,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으냐?하는 것에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판단이 달려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따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 하는 행동으로 아담과 하와를 평가하셨듯이,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 된 우리들을 생명나무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평가하시는 기준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율법이나 윤리나 도덕적인 행위로 사람을 평가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유무로 평가하십니다. 이 말씀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닌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때부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전하며 다녔습니다.

 

오늘날도 전도자들은,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부족해서 인육을 나누어 먹는 죄를 범한 극악한 살인자들까지 찾아가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의 행위로 죄를 묻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유무를 보고 죄를 물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 믿음이 우리의 운명을 갈라놓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기도 하고,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웬 은혜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귀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 귀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우리 모두는, 이 귀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며 살아가는 성도, 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죄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넷째, 모든 불의가 다 죄라고 합니다.

 

요한15:17절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모든 불의가 다 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사실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사람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는 효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죄 사함의 효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효력이 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예수님의 죄 사함의 효력이 미치지 못하도록 하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그러면 사망에 이르는 죄에는 어떤 죄들이 있습니까?

성령을 훼방 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훼방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죄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떠나 딴 길로 간 사람들입니다. 이단을 따라가서 예수님 대신 이단의 교주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받지 못할 죄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이외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십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멘

 

로마서 3:10절입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이 사명을 깨닫는 데서 출발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명을 깨닫고 하루하루 이 사명에 충성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죄는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고, 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죄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죄인들 중에서 우리들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특별한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 날마다 우리를 충만한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 가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아직도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며 살아가고자 하는 각오와 결단과 헌신의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2024년 하반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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