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
갈라디아서 3:13
우리는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들의 죄의 문제를 처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해 주신 일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해 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성육신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세 위로 계신데, 이 하나님께서는 또한 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존재 방식이 다른 하나님 차원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의 역사로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개미가 되어 개미로 일생을 사는 것보다 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개미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람과 개미는 똑 같은 생물체이지만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육체의 제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계신 하나님,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살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첫 번째 하신 일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신성을 버리시고 죄악 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소록도는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전에 이 소록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목회자들이 왔다가 갔지만 소록도 사람들이 복음을 잘 믿지 않고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시대 어떤 목회자가 소록도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원하여 소록도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록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탐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발견하게 된 것은 첫째로 소록도에 온 그 모든 목사님들은 자신들과 달리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소록도에 온 목사님들이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나 그 모든 사람들이 얼마 있지 않아서 떠나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소록도에 있었던 것을 목회의 중요한 경력으로 생각하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곧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나는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면서 나는 여기서 평생 목회할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아침 마다 기도할 때 ‘하나님 나도 문둥병 환자가 되게 해 주세요? 그래서 한 영혼이라도 더 믿게 할 수만 있다면 저에게 그렇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정말 얼마 있지 않아서 이 목사님이 문둥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을 받고 이 목사님은 너무 기뻐서 사람들에게 ‘나도 이제 문둥병 환자가 되었다고, 나는 영원히 소록도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내 말을 이제 믿을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 사람들이 비로써 믿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소록도의 환자들은 거의 다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문둥병 환자가 된 것은 위대한 희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이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그 만드신 피조물인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참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거의 기절할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 사람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첫 번째 놀라우신 사건은 바로 성육신 사건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두 번째 하신 일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갈라디아서 3:13절의 말씀에 있는 ‘우리’라는 말에 우리 각자의 이름을 넣어서 다시 읽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김종하)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자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김종하)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은바 되사 우리 대신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내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신바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이 말씀은 당시 장사할 때 쓰던 상업용어였습니다. 그 뜻은 ‘값을 지불했다.’ ‘완불했다.’ 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말을 “속량하셨다.”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돈을 지불하고 우리를 샀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 주셨습니다. 우리가 치루어야 할 죄의 값을 예수님이 다 치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모든 값을 다 지불하시기 위해 내 대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한 것임을 믿으시지요. 이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고 이 믿음으로 우리는 천국을 가고 이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21절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를 모르실 뿐 아니라 전혀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셨으나 죄인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께서 마치 죄인이신 것처럼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친히 그 한 몸에 담당하시고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 구원의방법이 너무 쉽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에게 죄에서 인류를 구원할 다른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저는 모든 인류가 공평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방법뿐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저는 아직 이보다 더 좋고 합리적인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구원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하였습니다.
구약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유월절 어린 양을 잡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어린 양의 피를 그 문 앞에 바른 집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의 모든 장자가 죽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도 구원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어린 양의 죽은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믿음이 다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었던 백성들은 늘 원망하고 늘 불평을 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삽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감사하며 삽니까? 아니면 삶의 환경이 어려워지기만 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삶을 삽니까?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형편은 아무리 어려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광야의 삶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어서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불 뱀에 불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 끝에 높이 달아놓고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가 전해 준 말을 믿고 장대에 매 달아 놓은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고, 뭐 장대위의 매 달아 놓은 불 뱀을 바라본다고 살겠느냐 라고 하면서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 있다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고 더 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쉽게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이해가 아닙니다. 깨달음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천국 백성이 된다.’ 라고 약속하신 말씀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에 비하면 이 얼마나 쉬운 방법입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너무 쉽기 때문에 잘 안 믿으려고 합니다.
만약 구약시대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뱀독을 해독할 수 있는 풀이 있다. 그 풀은 이렇게 생긴 풀인데 그 풀을 뜯어서 절구에 넣어서 찢고 그 진액을 상처에 바르면 낫고 살게 될 것이라 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기위해서 그 풀을 찾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겸손히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모든 선행적인 이해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아와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면서 손들고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아가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무능하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의를 행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와 전혀 상관이 없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문제들을 다 해결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모두 다 한 몸에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그 값을 치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셋째,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4:25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그 모든 일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일어난 부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 없으신 자로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증명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생명은 나의 생명이 되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장차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증거를 보이시기 위해 3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해주는 증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하게 될 때 어떻게 변할까요?
오늘 우리가 가진 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문이 닫혀 있어도 그냥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또 무엇입니까?
넷째, 이 땅을 떠나 하늘 보좌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본래 계시던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승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거기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중보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위해 대신 하나님께 기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확신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들을 늘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삶에 큰 확신이 있게 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켜보시는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 삶이 다릅니다.
마치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처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까?
시편 139편을 보면 다윗은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도 아시며, 나의 생각도 아시고, 나의 모든 삶의 길과 나의 혀의 말 등등 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신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삶에 남다른 확신이 있습니다. 삶에 남다른 경건이 있습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다섯째, 교회를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만 앉으셔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시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인도하시고 양육하시고 보호해 주실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즈셔서 우리들의 삶에 구체적인 도움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시골에 기도 많이 하는 여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무엇을 하든지 먼저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집에서 밥할 때도 기도하고 시장 갈 때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외버스를 타고 가기 위해 기도하는데 갑자기 방언 기도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버스에서 사람들에게 다 내리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운전기사에게 가서 이 버스에서 다 내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만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버스는 얼마 가지 못하여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큰 부상을 당했다고 하는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 뿐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지혜를 주시고 기도를 도우시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주시는 등 우리 삶에 함께 하시면서 역사해주십니다. 그래서 비록 예수님은 승천하셨으나 우리들은 이제 믿음으로 성령과 함께 동행 하며 성령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다른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나의 신앙의 삶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성령님의 구체적인 역사가 삶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여러분의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앞으로 하실 일은
여섯째,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정하신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의 마침표를 찍으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사람이 늙어서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로부터 연로하신 노인들까지 모두 동시에 이 세상의 생애를 끝내야 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삶을 살면서도 이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부끄러움 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의 성취를 추구하고 보람을 추구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업적보다 믿음을 길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되면 참 부끄러운 사람이 누구이며 참 영광을 얻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될 예수님 재림의 날에 받을 영광을 아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날에 성도들이 받게 될 영광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을 향해 이 영광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왜 목회자를 존경합니까?
왜 목회자를 섬깁니까?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보시는 그 입장에서 목회자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를 볼 때 가기 생각에서 입장에서 봅니다. 심지어 다윗은 이스라엘 왕 사울을 하나님에 의해서 그 왕위에서 폐하여 진 사울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으로 기억하고 존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존귀하게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좋은 사람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부지중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성육신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부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성령을 보내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 믿는 성도들에게 재림하셔서 베풀어주실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믿음을 가지고 이 한 주간 우리 앞에 놓인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모든 은혜들을 충만히 누리며 사시는 한 주간의 삶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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