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헌신보다 사랑
고린도전서 13:3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써 보낸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분파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윤리 도덕적인 문제도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각종 은사로 인한 혼란까지 있었던 아주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 해결책으로 써서 보낸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당시 바울의 이해는 이러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아들까지 내어 주시면서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마치 얽혀있는 실타래가 풀리듯이 하나 둘 해결되어 갈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을 전해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은 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이라고 권면하며 사랑을 회복하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회복해야 할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이전에, 먼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바울의 고백적인 이야기들입니다.
1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이 말씀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위대한 전도자가, 그 말과 글과 가르침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왔는데, 그 모든 말과 글과 가르침들이 사랑으로 하지 않은 것이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을 것입니다. 내게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능력, 나은 지식, 나은 믿음만 있으면, 그것으로 상대를 업신여기고 무시해 온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이익을 위해 세상 법정에서 다투는 사람들까지도 있었고, 결혼한 가정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갈등들과 우상숭배에 대한 다른 견해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갈등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을 돌아보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3절 말씀에서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는 구제나, 자기의 목숨까지 바치는 순교의 헌신이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 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구제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여러 면에서 아주 독특한 민족입니다. 그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하였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였고, 일주일에 하루는 구제하는 날로 삼아 구제를 하였습니다. 이 날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지원을 받거나’ 혹은 ‘거리에서 모금을 하여서’ 모은 것에, + ‘자기의 것을 보태어서’ 구제하였다고 합니다.
전에 예수님이 산상에서 설교하실 때, 경건한 삶에 이르는 3가지 중요한 덕목들에 대해 말씀하신 일이 있으십니다. 그 3가지는 바로 ‘구제,’ ‘기도,’ ‘금식’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말씀하신 것이 구제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6:2절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유대인들은 ‘구제, 기도, 금식’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신앙의 덕목 중에서 최고의 신앙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구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구제’를 얼마나 중요시 했는가 하면, ‘구제는 그 영혼을 만들어가는 신앙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제하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탈무드에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선을 받아서 먹고 사는 거지들이라도 자선을 행해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 할 수 없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 누구도 자선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제는 사람들이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 조항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 구제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잠언 3:27-28절입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하나님은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아끼지 말고, 또 오늘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 내일 주겠다고 미루지 말라고 하십니다.
잠언 19:17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꾸어주면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갚으십니까? 성경은 물질로 갚으신 때는 30배, 60배, 100배로 갚으신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갚으신 때는 천대까지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신앙과 관련해서는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3:10-12절입니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을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들짐승들을 위해 제 7년에는 땅을 버려두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오늘 날도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 7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밭에 들어가서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해서 그 양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수확을 하고 먹고 남은 것은 또 들짐승들이 먹을 수 있도록 내 버려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렇게 해야 네 집의 여종들도 쉬고 그 자식들도 쉬고 나그네도 쉬고 소나 나귀도 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말씀을 보면, 농부가 1년 동안 농사지은 것을 추수할 때 그 밑 둥까지 남김없이 다 베어서 거두지 말고 가난하여 농토가 없는 사람들 그래서 추수가 끝난 밭에서 이삭줍기를 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여 듬성듬성 곡식을 남겨 두고 추수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 삶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베려하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구제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제와 자선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을 통해 이런 명령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내게 보낸 천사’라고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하는 것은 내가 복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 뿐 아니라 중동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천막에서 쉬다가 세 명의 나그네를 발견하고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서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라고 하며 영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구제에 대한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장막에서 쉬다가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고 보내 주신 사람들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 나가서 큰 절을 하고, ‘제가 여러분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좀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제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구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이런 구제에 대한 전통을 이어 받은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구제함이 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과부의 두 렙돈 사건에서 보듯이 성전에도 구제함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회당에 나아올 때 구제함에 넣을 것을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구제함에 갖다 넣어두면 구제함에 넣어 놓은 것들 중에 필요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 가져다가 쓰도록 했다고 합니다.
영화 장발장도 이런 유대인의 관습을 이해할 때 더 잘 이해가 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미리엘 신부는 구제에 대한 유대인의 정신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갓 나와서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장발장,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절실했던 장발장에게 성전의 기물을 가져가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최후의 심판광경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시 의인으로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의인들은 한편으로는 당황하고 또 한 편으로는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그렇게 섬긴 일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있는 너희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종말에 있을 심판의 기준도 바로 그 이웃을 구제하며 사는 삶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제를 할 때 이렇게 겸손한 마음 하나님의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구제를 하면 이렇게 구제하는 그 사람의 영혼이 충만해 짐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초대교회에서도 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구제를 담당하고 있었던 사도들이 히브리 파 유대인들은 잘 알았지만 헬라 파 유대인들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헬라 파 과부들 중에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구제에서 빠진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사도들을 원망하는 소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헬라 파 사람들 중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던 일곱 집사를 세워 전적으로 구제를 담당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특이한 풍습 중에 또 하나는 ‘장례식’을 하거나 또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얼마 동안 장례식에 함께 해 주고 또 장례 행렬을 함께 따라가 주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장례 행렬을 보고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장례식을 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행위로 보고 또 ‘네 이웃을 불쌍히 여기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저항하는 행동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례 행렬을 따라가는 행동은 여호와 하나님께 빚을 지게 하는 행동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장례행렬에 함께 따라가 주는 자선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에서 장례식이 있게 되면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기도 하고 또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장지까지 함께 따라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동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어하는 일이 하나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집을 지으면 1층을 가장 좋은 장소로 보고 이곳을 가게자리로 만듭니다. 그런데 아랍 사람들의 풍습을 보면, 이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언제나 1층은 비워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나 와서 그 1층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동을 여행하다가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1층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것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동사람들은 거지를 만나면 그 거지를 찾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기회를 달라고 하면서 구제를 할 수 있도록 구제하는 것을 받아 줄 것을 요청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동에서는 거지들이라고 주눅 들면서 구제를 받지 않고, 거지들이 오히려 당당하게 구제를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거지가 싫다고 하면 구제를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중동이라고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증거들을 보면 자선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3절 말씀에서는, 이 모든 구제들을 넘어서서 ‘네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주는 구제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네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선을 행할 때에는 마음에 긍휼 즉 사랑을 가지고 행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실재로 구제하는 삶을 산 인물인 ‘성 프란시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유산으로 받은 많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평생 청빈한 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3절의 말씀은 이런 ‘성 프란시스’와 같이 자기의 것을 전부 드려 구제를 한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이 하였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과부의 두 렙돈 사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는 구제함에 동전 두 닙을 넣은 이 과부가 그날 많은 구제헌금을 한 부자들이나 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제에서는 그 양보다 동기와 마음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구제하는 것을 보면
1.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구제도 있습니다. 2. 자기만족을 위한 구제도 있습니다. 3. 사람들이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는 구제도 있습니다. 4.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하는 구제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마치 세금 내듯이 구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에서는 그 동기가 중요합니다.
구제를 할 때에는 사랑의 동기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이 하는 구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없는 구제는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이며 나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중심 주제는 언제나 구원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구제는 자신의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방법대로 했다고 사랑을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 사랑의 행위를 하게 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서 구하시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도 우리 마음을 달라고 하시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도 우리 마음을 달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데+마음이 포함되어 있다면 = 이것은 진심이 됩니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데+마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 이것은 흉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은 사람이 마치 마음이 변한 사람인 것처럼 행하는 것은 연기인 것입니다. 마치 배우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역할을 연기하듯이 이런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배우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를 하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오직 거듭남으로 그 자신이 변한 사람들, 자신이 변한 것이 삶으로 드러나 보이며 사는 사람들만 가는 것입니다.
둘째,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사랑으로 하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헌신 중에 최고의 헌신은 순교입니다.
그 이유는 순교는 자기의 목숨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목숨을 드렸다는 것은 사실 그 모든 것을 다 드린 것이 됩니다. 그래서 순교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드릴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정치인은 그 목적을 위해 목숨 내 놓을 수가 있습니다.
혹은 안중근 의사와 같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두 강도가 바로 그런 사람 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이라는 정치적인 목적 위해 목숨 내 놓았던 사람들입니다.
순교자 ‘요한 후스’를 사람들은 ‘순교자의 별’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종교개혁자들 이전의 개혁자였습니다. 후스는 종교개혁 이전에 로마카톨릭 교회 신부로 있으면서 당시대에 아주 큰 파장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당시 요한 후스가 했던 설교는 그 시대 다른 신부들의 설교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기록을 보면 요한 후스가 얼마나 설교 잘하고 감동적으로 했든지 그가 하는 주일 11시 설교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3-4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렸을 정도라고 합니다. 요한 후스는 개혁적인 설교를 했고 이로 인해 로마카톨릭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화형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3절의 말씀은 이렇게 요한 후스와 같이 자기 목숨을 바쳐 주를 섬긴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동기로 하지 않았다면 그런 영웅적인 헌신들이라도 그 자신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3절에서 ‘사랑이 없으면’ 이라는 말은 ‘이 사랑을 가지지 아니하면’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없는 사랑을 어떻게 우리가 가진다는 말입니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소유한 사람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우리에게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이라는 말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사랑이 없으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할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헌신 중 최고의 헌신인 순교도 여러 차원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로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한 순간의 감정으로도 순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순교까지 불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하신 가상칠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과 꼭 닮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초대교회 순교자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복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예수님의 순교와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를 위해 순교까지 불사하는 행위와 함께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사랑을 함께 소유하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랑이 없으면’ 너희가 비록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할지라도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헤 아가페 사랑, 즉 그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사랑은 우리 신앙의 크기와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그 아가페 사랑에 대해 살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이 아가페 사랑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