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는 사랑
고린도전서 13:1
우리는 일생 동안 많은 종류의 사랑을 하기도 하고 또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사랑하면 사는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있고, 친구간의 사랑도 있고, 이성간의 사랑도 있고, 국가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수많은 사랑하는 삶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들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한 마디로 정의 내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정의하기를, ‘사랑은 말하기는 쉬운 단어, 사랑은 듣는 사람에게 기쁨이나 행복을 주는 단어, 그러나 사랑은 행하며 살기에는 가까우면서도 먼 단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은 말하기는 쉽습니다.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또 마음에 행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행하며 살기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만약 사랑하며 사는 삶이 쉬운 일이라면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적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랑 때문에 아파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생사를 가르는 기로에 섰을 때에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여전히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재물일까요? 해박한 학식일까요? 천재적인 재능일까요? 사람이 죽음의 문턱 앞에 다다르게 되면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 순간에도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의 참 가치는 서로 사랑하는 삶에 있으며,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로 존재하며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31절 말씀에서는, ‘인생살이의 가장 좋은 길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세가 되면 이 사랑이 식어진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4:12절입니다.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는 불법이 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좋고 가장 중요한 사랑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불법과 편법까지도 불사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이 점점 식어져가서 사랑이 식어진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을 때 나와 너가 서로를 사랑하는 인격적인 신뢰 관계보다는, 나의 유익을 따라 상대방을 이용하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가 형성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는 큰 상처를 입게 되고, 그 결과 나와 너 사이에서 형성되어 가는 사랑도 식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소외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왕따입니다.
이 왕따는 학교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 받은 마음이 가정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가정 밖을 떠돌며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아이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들도 이런 왕따를 경험하게 될 때 아파하는 것입니다. 고부간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부부사이의 가정불화의 중요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깨어지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격과 인격이 만나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삶인데 이 관계가 어떤 이유로 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이에 소통이 단절되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 전에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채로 이런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그 때 마음의 아픔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사랑 없음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사랑하며 사는 삶에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자기중심적인 에로스적인 사랑일지라도 이 사랑은 물질에 대한 사랑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라도 있어야 이 사랑이 나중에는 혈육에 대한 사랑으로, 또 가족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발전되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장이라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 말씀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4-7절 말씀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8-12절 말씀은,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고 폐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13절 말씀은 이 세상에는 영원히 있을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중에서 그 첫 부분인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 여기에서는 일정한 공식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을 하는 사람에게서 – 사랑을 빼면 =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 사랑을 빼면 =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서 – 사랑을 빼면 =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서 – 사랑을 빼면 =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 사랑을 빼면 =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는 사람’에게서 – 사랑을 빼면 =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 사람’에게서 – 사랑을 빼면 =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을 빼면,’ ‘그 사람이 비록 사람의 방언을 말하고,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이 있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그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구제하고, 그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헌신을 할지라도’, 그 모든 행위들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 말씀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육체적인 몸이라면, 사랑은 우리 몸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숨결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듯이, 사랑이 없으면 또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말씀 중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 1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의 방언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사람의 방언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국어, 일어, 중국어, 영어와 같이 사람들이 사용하며 살고 있는 언어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은 본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용하는 언어가 하나였던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드넓은 시날 평지를 만나게 되자 거기에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아 놓고 함께 그곳에 모여 자기들 마음대로 살려고 계획했습니다.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서로 다르게 하셔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심으로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전처럼 하나로 뭉쳐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도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가족과 씨족 단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람의 방언’은, 이렇게 해서 가지게 된 ‘사람들의 말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의 방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단수인 ‘글로싸’로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람의 방언’은 복수인 ‘글로싸이스’로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즉 다양한 외국어를 뜻합니다. 이 ‘글로싸이스’라는 단어가 사도행전 2:4절, 8절, 11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됨이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하나님이 오순절 날 성령을 통해 기도에 전념하던 120명의 사람들에게 주신 방언은 외국어였습니다. 갑자기 120명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영어로, 어떤 사람은 중국어로, 어떤 사람은 아랍어로 자신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로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증거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놀라운 언어의 능력을 은사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 하라.’ 라고 말씀하신 후에, 아람어와 히브리어 밖에 할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들이 온 천하에 다니며 말씀을 전파할 수 있도록 ‘새 방언을 말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로 주신 것이 바로 오순절 날 외국어를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120명의 제자들은 각자에게 주신 언어를 따라 전도하러 떠났습니다. 애굽어를 받은 사람은 애굽으로, 페르시아 어를 받은 사람은 페르시아로, 인도어를 받은 사람은 인도로 복음을 전하러 떠났습니다.
당시 120명의 제자들이 갑자기 외국어로 말할 수 있는 은사가 나타났을 때 그 놀라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당시 120명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며 살았던 아람어로 말을 하는데, 그 입에서는 자신들이 전혀 배우지도 않았던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인’ 등등의 외국어가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왔던 사람들에게도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의 사람들이 사용하며 사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에게 외국어를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이유는, 외국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선교적 방편으로 주신 은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던 사도바울에게는 이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내가 누구보다 더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방언은 외국어로서 주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던 바울에게는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울은 이미 그 받은 교육을 통해 당시 공용어였던 로마어 헬라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유대인이 사용했던 히브리어 아람어만 배운 것이 아닙니다. 당시 세계의 공용 언어였던 헬라어, 로마어 까지 능통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외국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동일한 이유로 나중에 세워진 이방교회에서는 더 이상 외국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을 통해 새워진 이방인의 교회는 이제 그 교회 구성원이 되었던 자기 동족에게 자기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바울은 지금 고린도전서 13:1절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이 말씀을 보면 그 주어가 바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바울의 자기 고백적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바울은 외국어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당시 바울과 같이 다른 나라 언어를 능통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른 나라 언어를 능통하게 말하고 또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경쟁력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언어적인 경쟁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준비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자 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늘 준비하는 사람이 되고 늘 준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준비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써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1절의 말씀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준비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의 준비가 먼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바울과 같이 외국어에 능통하고, 혹은 성령을 통해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도,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고서는 그 업적을 인정해 줄지 모르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무 것도 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말보다, 우리가 받은 은사보다, 우리가 행하며 사는 선행보다, 아니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이해한 복음의 진리를 유창한 말로 설교하고 가르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이 그 일을 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나는 이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 사랑의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있는가?를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고 자녀를 꾸중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자녀를 훈육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모습을 보고 자녀들이 ‘아 우리 부모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저러시는구나!’ 라고 이해하면 좋을 텐데,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하는 마음은 보지 못하고 꾸중하는 행위를 싫어해서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자녀들에게 장래성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겸손히 순종하는 자녀에게 장래성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전에 한 율법사에게 모든 율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킨 것이 되고, 성경을 다 지킨 것이 되고,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천사의 말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여기서 ‘천사의 말들’이라고 하니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천사들도 의사소통을 하는 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진짜 천사의 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해 내려오는 문서를 보면 당시 최고의 달변가에게 붙여 주었던 찬사가 바로 저 사람은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이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말 잘하는 사람들이 더 성공하고 더 출세합니다.
정치인, 국회의원, 변호사, 검사, 교수 등등은 모두가 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말 잘하는 것을 최고의 지성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그리스, 이집트에서는 수사학이 최고의 학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들이었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은 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깨닫고 있어도 말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으로 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달변가들에게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의 말의 감화력이 그 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사람은 청중의 지성과 감정과 마음까지 움직일 수 있는 감화력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웅변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천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의 말을 ‘천사의 말’이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전서 13:1절에서 하고 있는 말은, 마치 이런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달변가라도, 그 전하는 말씀이 깊이가 있고, 또 말씀의 능력이 겸비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래서 사람들이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는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고백적인 말을 통해 전해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양한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주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바울의 말을 듣고, ‘저 바울의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야! 찬사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야!’ 라는 평판을 들었으며, 더구나 바울이 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바울이 기록해서 전해준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배없는 말이야!’ 라는 평판을 들었을 정도로 그 글에는 힘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지금까지 말한 그 모든 말들들 즉 설교들, 전도들, 가르침들이 사랑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면, 그것은 마치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하여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쓴 13권의 편지들이 바울 서신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쓴 이 바울서신들까지도 사랑이 없이 썼다면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바울이 쓴 그 글을 읽고 감동과 은혜를 받아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해도, 사랑이 없이 말을 기록하여 전해준 나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빠진 말과 글들은 모두가 다 시끄럽게 울리는 잡음이 될 뿐이라고 합니다. 내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만약 내가 사랑이 없이 이제까지 일해 왔다면, 이제까지 내가 한 그 모든 수고와 노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바울서신 13권을 내가 사랑도 없이 기록하였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그 모든 서신들이기에 그것을 읽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을 줄지 모르지만, 사랑 없이 기록한 나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비록 바울처럼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하지는 못할지라도, 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해 주신 그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를지라도, 또 우리에게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능력도 없고 타고난 재능이 부족할 지라도 우리가 사랑으로 목회하고 섬겨왔다면, 비록 그 성과는 별로 없어서 사람들은 알아주고 인정해 주지 않을지라도 우리 마음의 동기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시고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는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가 나의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존중히 여겨 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룬 업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친 헌신들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 보다는 오히려 ‘사랑으로 그 일을 했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실 때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 새 계명이 바로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예수님이 자신을 시험하러 나온 율법사에게 주신 말씀도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2:37-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니라.’
사랑의 사도라고 불렸던 사도 요한은 사랑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몇 구절을 살펴보면, 요한1서 3:10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요한은 의를 행하며 사는 모습이나, 사랑하며 사는 삶을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요한 1서 1:7-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듯이,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3:1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사랑이라’ 는 이 두 글자만은 꼭 기억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주고 계신 이 한 주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된다면, 이 설교를 하고 들은 의미가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한 주간의 삶을 살아갈 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꼭 기억하고 살아가는, 축복된 한 주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