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보다는 사랑
고린도전서 13:2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써 보낸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분파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윤리 도덕적인 문제도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각종 은사로 인한 혼란까지 있었던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를 보는 바울의 고민이 무엇이었을까요?
이렇게 혼란한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바로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아니었겠습니까? 아마 바울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고민해왔을 것입니다. 이런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그 해결책이라며 주신 말씀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우리가 사랑 장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보낸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이런 응답과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제일 좋은 길,’ 내가 너희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준다고 하며 이 사랑 장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해는 이러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내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들 마치 실타래 같이 얽혀있는 문제들을 하나 둘 풀어나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써 보낸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자기 고백적인 언어로 기록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었던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교를 믿고 있을 때 교회 박해에 선봉장으로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복음 전도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 때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자기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었던 전도자였습니다.
그들이 만났던 바울은 당시 제국의 공용어였던 헬라어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논리적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을 주는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바울을 향해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 즉 천사가 말하는 것 같은 감화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각 교회에 써 보낸 바울서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바울은 사적으로 많은 서신들을 써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울이 써 보낸 그 서신들을 마치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과 같이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었던 바울이 한 말이 바로 고린도전서 13:1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바울의 이 말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위대한 전도자가 그 말과 전도와 가르침과 글들로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쳐 왔는데 그런 말씀들까지 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았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고린도전서 13:2절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예언하는 능력과 은사보다 사랑이 더 위대하며,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는 것보다도 사랑이 더 중요하며,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보다도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예언하는 능력보다 사랑이 위대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예언의 은사를 가장 좋은 은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내일에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장래를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궁금증과 불안은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아무런 문제도 없고 잘나가고 있을 때도 내일은 어떻게 될까? 하며 염려 합니다. 왜요. 어제 잘나가던 기업이 한 순간의 방심으로 3류 기업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염려를 그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내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 염려는 떠나가고 평안이 마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1절 말씀을 보면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역사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일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에 대해 내가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고사하고 오늘의 상황이라도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불안해서 마음을 놓고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원자력발전소 현황을 보면,(2014년 2월 기준. IAEA) 전 세계 30개 국가에, 총 435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운전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15개 국가에서 71기가 건설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2030년까지 74기가 운영이 종료되고, 272기의 신규원전이 건설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2030년에는 약 700기에 가까운 원자력 발전소가 운영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하나로도 오늘날 지구상에 심각한 혼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전이 700기나 가동되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 중에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와 같은 원전사고가 또 나기라고 한다면, 아니면 테러집단이 사회혼란을 목적으로 원전 사고를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아니면 전쟁이 일어나 상대국가가 운전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들을 파괴한다면 인류사회는 치명적인 영향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강대국들이 원자폭탄을 또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까? 북한이 무수단리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서울에 도착하는 시간은 불과 11분 15초라고 합니다. 불과 몇 분 안에 발견하고 요격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한 예이지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불안을 느끼며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지구촌은 일일 생활권, 하나의 생활권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미의 기근을 함께 걱정해야 하고,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을 함께 걱정해야 하고, 리비아 난민들의 처리 문제를 함께 걱정해야 하고, 아이슬란드에서 일어난 화산과 환태평양 불의 고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을 함께 걱정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느 한 곳에 이상이 발생하면 그 영향이 전 세계에 미치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어떤 예언자가 나타나서 미래를 예언을 하는데 그 예언은 틀림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예언가를 믿게 될 것이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그 예언가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언을 어느 정도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천사로부터 받은 말씀이라고 하며 책을 만들어서 배포하는데, 그 배포하는 책을 제가 아는 목회자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성경 계시로 충분합니다. 성경 계시 외에 천사의 예언을 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저를 기피하는 것 같더라고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언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예언과 다릅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예언은 사람의 미래를 알려주고 사업체의 미래를 알려주고 혹은 국가의 장래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을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언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2절 말씀을 보면 첫째는 모든 비밀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비밀이 무엇입니까?
비밀은 감추어져 있어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즉 미래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지식은 무엇입니까? 지식은 이미 드러나서 사람들에게 알려 진 것을 말합니다. 즉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현제에 있는 일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언의 은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전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과거의 삶에 대해서 현재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성경의 말씀을 예언의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성경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지식과 비밀이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언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과거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정확하게 다시 들어내 주는 것이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을 보고 지금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한 기록을 보고 그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해 주는 것도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적인 예언은 성경을 보는 안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의 과거 역사의 기록을 보면서 그 횡간에 담겨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풀어내는 능력도 예언이고, 성경을 보면서 그 말씀의 횡간에서 오늘 나에게 적용되는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해 내는 능력도 예언이고,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미래에 대한 말씀들을 보면서 그 말씀들의 횡간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풀어내는 능력도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했던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전서 13:2절에서 예언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만약’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의미는, ‘만약 내게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이 사실이라는 말입니까? 가정이라는 말입니까? 바울은 실재로는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능력이 자기에게 없지만 만약 그런 예언하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게 된다는 가정에서 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게 이렇게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말씀에는 ‘우덴 에이미’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의 직역은 ‘아무 것도 모른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쓴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이 말을 유대인이 입장에서 의역해 보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7:22-23절에서는 동일하게 ‘우덴 에이미’사용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라고 할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덴 에이미’입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한 이 말은, ‘너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동일한 해석을 고린도전서 13:2절 말씀에 대입하면, ‘만약 내게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좀 더 풀어서 정리해보면, ‘내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과거 사건이나 미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해 내고, 사람들에게 그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해 주는 안목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만약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아가페의 사랑이 없다면 나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 말은 다소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여기서 무엇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모든 비밀을 아는 예언의 은사를 가졌더라도,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보다 사랑이 위대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초대교회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주시는 권능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권세와 능력이 대단했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에는 전하고자 하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글로 정리하여 기록한대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전도자들을 보면 어느 누구 하나 글로 기록하여 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든지 그 안에 충만하신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지혜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만 보아도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바울의 경우에는 자기가 직접 가지도 않고 천막을 만들 때 무릎 위에 받치고 사용하는 앞치마나 손수건만 기도하고 보내어도 기적이 나타나고 병 고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바울이 2절에서 내가 전에 예수님이 ‘너희가 이 산을 명하여 믿음으로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내가 믿음으로 ‘불암 산아 저 별내 면 밖으로 옮겨져라.’라고 믿음으로 선언하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태양과 달을 하늘에서 멈추게 한 여호수아도 있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한 엘리야도 있고 태양이 뒤로 15도 물러가게 한 히스기야 왕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아가페의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믿음으로 행한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고 위대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라고 평가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가 어떤 기적을 행하든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서 능력이 나타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능력을 보지 말고 무엇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 일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도 없이 그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일이 장차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적그리스도가 이런 능력자로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적그리스도에게는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평화의 사도로 가장을 하고 올 것이나 실재 그 마음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모르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교황도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닙니까?
교황이 우리나라까지 올 때에는 그 비싼 전용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약자들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인 것처럼, 소형차 소울을 타고 다니는 쇼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교황을 보고 종교인이라면 교황 같이 약자들에 편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존경하고 있습니다.
교황이 쇼를 하고도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독교 지도자인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그런 쇼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은 자기 위신과 권위에 손상을 입을까 싶어서 최소 에쿠스가 아니면 타지 않는 것이 우리 현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 문제가 중요합니까?
진리를 증거 하려면 일단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진리를 증거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쇼를 하지 못하는 개신교는 줄어들고, 쇼라도 하는 로마 카톡릭은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교황은 예수회 출신인데 예수회는 무서운 단체입니다. 예수회가 장악하고 있는 교황청은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곳입니다. 대부분의 천주교 신도들은 교황청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교황청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황청은 개신교와는 직제일치 운동을 하고, 다른 종교들과는 종교다원주의를 통해 일치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 종교를 하나의 종교로 만들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런 기초를 벌써 60년 전에 세워놓고 지금까지 차근차근 진행해 온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모습이 지금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얼마 있지 않아서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종교가 하나로 뭉치게 될 것입니다. 이 종교를 등에 업고 등장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역사상에 등장하면 인류역사는 7년 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 7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연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기적이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 대해 히브리서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다른 하나는 동일한 믿음을 가졌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믿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기적은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실 때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적을 주시는 것을 보면 기적을 주실 때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고난을 주실 때에도 고난의 삶을 주시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요청을 들으시고 태양을 멈추어 주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려야 할 이유가 있으시면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병든 몸을 고쳐 주셔야 할 이유가 있으면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처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된 사람을 함께 높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하나님은 잊어가고 그 일을 행한 사람을 높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일지라도, 아니 ‘산을 옮길 만한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이 무엇인데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사랑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어떤 믿음의 능력이나 역사보다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이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 사랑이 있으면 다 있는 것이고 이 사랑이 없으면 다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믿음이 좋았던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바울과 같이 외국어를 능통하게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말은 잘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신구약 성경을 능통한 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놀라운 능력이나 그 이룬 업적이 보잘 것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가 가진 사랑은 그 어떤 능력보다 위대하며, 우리가 가진 사랑은 그 어떤 기적보다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놀라운 기적을 행한 사람들 보다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위대한 사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없이 기적을 행한 사람들은 모르신다고 하셔도 사랑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안다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업적과 역사를 이룬 사람들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른다고 하시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으로 행한 작은 섬김들은 아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그 아들같이 인정해 주시고, 그 아들에게 주실 은혜를 주시고, 장차 받을 하늘 기업들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한 주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