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 서론
고린도전서 13:1-3
구약성경은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율법의 말씀을 축약해서 613가지 꼭 지켜야 할 계명으로 압축했습니다. 이렇게 축약해 놓고 보니 ‘하라’는 말씀이 248개, ‘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라’는 율법을 적극적인 율법, 즉 상위의 율법이라고 하였고, ‘하지 말라’는 율법은 소극적인 율법, 즉 하위의 율법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 613가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에 대해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또 10계명 중에서도 어느 계명이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인지에 대해 논쟁해 왔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런 논쟁에서 보인 견해에 따라 다양한 파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중요한 두 학파는 ‘힐렌 학파’와 ‘샴마이 학파’였습니다. ‘힐렌 학파’는 율법을 조금 자유롭게 해석했던 학파라면, ‘샴마이 학파’는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했던 학파였습니다.
(참고로 사도바울은 이 ‘힐렌 학파’에 소속되어 있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배웠습니다.)
마태복음 22:3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런 율법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질문은 율법을 알고 싶어 했던 일반백성이 물었던 물음이 아닙니다. 율법과 구약성경을 전공한 율법학자가 한 질문입니다. 사실 당시 율법학자들은 구약성경을 거의암송하다시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이 ‘예수님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율법학자의 이 질문을 듣고 예수님이 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니라.’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 사랑이 모든 율법 속에 담겨 있는 근본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율법은 그 법조항보다 그 법조항에 담겨 있는 근본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율법의 조항들을 다 지켜 행하였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예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께 ‘그런 계명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라고 하면서, ‘또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런 청년을 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라고 하시면서 ‘네게 있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쫒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께 나는 어려서부터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조항들을 다 지켜 왔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청년에게 예수님이 요구하고 계신 것은 율법의 정신 즉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비록 율법의 조항들을 다 지켜왔어도 하나님은 율법을 하나도 안 지킨 것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시험하려고 질문한 율법사에게, 또 영생을 얻고자 찾아왔던 부자청년에게, 율법은 계명이나 그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근본정신을 이해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이런 가르침 때문에 율법에 대한 바른 견해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 너희 하나님을 섬겨라.’ 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섬기거나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삽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있습니까?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상대방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합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전도주일을 정해 놓고 전도를 하니 그 전도 행사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합니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따라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3:1-3절에서는 ‘영혼을 사랑하는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세 번씩이나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일 지라도, 둘째,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더하여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지라도, 셋째, 그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또 진리를 지키기 위해 그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사람들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2장의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내가 아노라.’
에베소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평가를 보면 에베소 교회는 참 대단한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에베소교회와 같은 교회가 서울에 있다면 어떤 평가를 받겠습니까? 거의 완전한 교회, 지상에 있는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교회라고 불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우수한 에베소교회가, 불신 세상으로부터, 이단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의 순수한 신앙을 지켜오는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고 합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믿음이 좋은 교회였지만, 나중에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에베소교회를 향해 무엇이라 경고하십니까?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나 생각하고 회개하여 그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는데 ‘촛대를 옮긴다.’는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행하며 살아야 할 덕목중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절대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이시듯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면서, 비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기도 하고, 신사도운동의 실체를 드러내며 비판하기도 하고, 바른 성경적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인해 논쟁하기도 하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해야 될 역할과 교회를 비난하는 세상과의 논쟁을 하면서도, 우리가 잃지 않고 끝까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이 하는 일들은 그 일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옳다 라고 인정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바른 생활 습관을 갖게 해 주고자 하는 것도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진리가 아무 것도 아니듯이 사랑이 그 기본에 깔려 있지 않은 믿음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문맥을 통한 살핌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 13장의 말씀을 쓰기 전에 다루고 있었던 주제는 바로 성령의 은사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씀하고 난 후에,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너희는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가장 큰 은사에 이르는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이런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바울이 보여주는 것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는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 바로 성경의 시작이고 결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펼쳐 놓으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이 되고,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을 요약해 놓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은 마치 시편 23편과 같이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보내진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당시 고린도교회는 아주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고린도는 아주 타락한 도시였고, 범죄가 일상이 되었던 도시였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고린도에서는 늘 크고 작은 대립과 갈등이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죄악 된 세상 문화에 물들어서,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게바 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라고 하며 사분오열 되었던 교회였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고린도는 중요한 항구도시로서 상업이 번성하였던 도시일 뿐 아니라 ‘아포르테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에서는 매일 4,000명의 여 사제들이 거룩한 매춘부가 되어 광란의 파티를 즐겼던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런 도시에 세워졌던 고린도 교회에서는, 육신의 일을 자랑하는 것이 난무하였고, 무분별한 은사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으며, 알 수 없는 방언의 문제로 어지러웠으며, 파당과 분쟁과 허영심과 질투심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고린도는 성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곳으로서, 이런 도시에 세워졌던 고린도교회는 마치 난파선과 같았던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에서 살인과 폭력이 얼마나 난무하였든지, 바울사도가 이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두려움에 떨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사도행전 18:9절 말씀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은 이런 도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고린도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나중에 바울은 이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써서 보내면서, 그들의 잘못된 행위들에 대해, 무분별한 은사주의에 대해, 윤리적인 잘못들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런 타락한 도시에 편지를 써 보내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를 써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런 문맥의 구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큰 은사라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하는 은사라야 너희에게 의미가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과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이든지 사랑에 기초를 둘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은사는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능력도 역사도 업적도 지식도 결국 다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왜요. 우리 하나님이 사랑 자체이시고, 하나님의 나라 또한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은사를 비유하면 인공위성과 그 추진체인 로켓과 같을 것입니다.
인공위성은 추진체인 로켓이 없으면 궤도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공위성이 궤도에 오르면 그 추진체는 버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로호 발사’때 잘 보았듯이 인공위성에서 추진체가 제대로 분리되지 않으면 사고가 납니다.
이것은 은사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은사가 없으면 교회가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이 어느 궤도에 오르게 되면 우리 신앙의 추진 체와 같은 은사는 버려지고 오직 사랑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은사를 끝까지 고집하게 되면 사고가 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은사를 버릴 때에는 과감하게 버려야 우리 신앙이 성숙의 단계를 넘어 완숙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오늘 이 세상 속에서 사역하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이라는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게 해 주고, 우리 교회 개척사역에도 날개의 구실을 해 주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창공에 오른 이후에는,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궤도에 오르려면 은사와 지식과 업적 등등은 떨어뜨려야 합니다. 이런 것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완전한 궤도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살펴보기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15가지의 기질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기질들을 묶어서 사랑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전해 주었던 사랑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랑에 대해 서론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던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고린도교회는 아주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교회에 바울이 해답으로 준 말씀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처방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문제 많은 교회에 바울이 해답으로 준 것이 사랑이었듯이 문제가 많은 나라, 교회, 사람들일수록 우리가 주어야 할 해답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려 줄뿐 아니라,’ ‘사랑은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21절 말씀에서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는 ‘너희는 사랑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게 될 텐데 그런 과정 속에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으셔서, 우리들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사랑으로 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은혜와 능력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사랑으로 율법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 우리에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