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온유하며
고린도전서 13:4
사랑을 크게 분류해보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랑의 같은 점이 무엇입니까?
이 두 사랑은 느껴지는 것이 같습니다.
이 사랑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온화함으로 다가오며 기쁨과 환희와 충만함을 우리 마음에 채워줍니다. 이 사랑은 때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상냥하고 배려하고 섬기고 친절을 베푸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외형적인 모습만을 보고서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원한 것인지 사람의 사랑에서 기원한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랑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그 사람의 인격과 경험과 성장과정과 사회적 지위와 그 추구하는 목적과 현재 처해 있는 처지와 입장 등등의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사랑은 이렇게 다양한 조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랑입니다. 이 모든 사랑들을 총칭해서 우리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인데 이 사랑을 고린도전서에서는 ‘그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가페 사랑’은 다시 15가지 속성으로 나타나는 사랑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에게서 기원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실 때만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성령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5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고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성령의 열매로 주어지는 이 사랑은 하나님이 주실 때에만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요구하시되 이 요구는 인간이 가진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그 아가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이 ‘너는 사랑하며 살았구나!’ 라고 인정해 주시는 삶은 인간이 가진 사랑으로 사랑하며 산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며 산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시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십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
먼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① 어떤 사람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읽고,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하고 이전보다 더 큰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서 더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② 국가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국가를 너무 사랑하게 되면 국가를 사랑하게 되는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③ 주어진 일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일을 사랑하게 되면 그 일을 사랑하게 되는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④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그 만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내가 내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그 만큼 더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만큼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아담의 안에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그 내면 안에는 타락한 본성들이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삶 속에 이 타락한 본성이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게 될수록 타락한 이기적인 본성이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타락한 이기적인 본성이 개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사랑을 할수록 그 사랑하는 상대방을 향해 마음이 더 넓어지고 개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은 더 좁아지고 더 옹졸해 지고 더 치졸해 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이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왜요. 그 사랑하는 대상을 나 혼자서 독점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이 사랑이 깨어졌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전에 사랑했다고 하는 그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없는 각종 악한 일들을 행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이 깨어진 사랑의 고통과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이 깨어진 사랑은 그 당사자들 뿐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이 사회에 얼마나 큰 짐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분히 감정적인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과 조건이 바뀌면 돌변하게 되는 변덕스러운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 이 사랑은 반사회적인 ‘집단 이기주의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반사회적이며 집단 이기주의적인 사랑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의 주된 요인이 아닙니까?
차라리 사람들이 사랑을 조금 적게 하고 사랑을 조금 절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사람들이 사랑을 더 크게 하면 할수록 더 큰 갈등과 더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 시대의 아픔으로 작용하고 있는 세월호의 유가족들이 그 희생된 가족과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냉정하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그 사건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자신들도 편해지고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편안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지나갔는데도 그 사랑을 내려놓지 못하고 집착하다가 보니 문제는 점점 더 꼬이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
다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사랑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이라는 말은 이 사랑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사람 그래서 아직도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은 이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는 갈라디아서 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그 본성이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그 본성이 타락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타락한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갈라디아서 5:16절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을 따라 행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성령을 통해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신 이 사랑은 오래 동안 지속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입니다.
또 이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또 이 사랑은 규범적인 사랑입니다. 또 이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심령 상태는 어떻습니까?
로마서 3:1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 자신의 심령 상태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하며 살수 없습니다.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사랑을 하고 선을 행하고 있는 것 같이 제스츄어만 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내가 먼저 죽고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죄악된 내가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냥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며 살 수 있어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그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사랑은 오직 자기 자신이 죽은 사람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선물로 받은 사람들만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며 살기를 요구하시는 그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행하며 살아야 할 그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며 살기를 요구하고 계신 사랑은 15가지 속성을 가진 사랑입니다.
그 중에 오늘 우리는 두 번째 속성인 ‘사랑은 온유하며’ 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온유한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이 구절이 원문에는 ‘크레스튜에타이 헤 아가페’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크레스튜에타이’라는 이 단어는 ‘온유’라고 해석하기보다 ‘친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아보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거의가 다 친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온유’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5절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온유에는 ‘프라에이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 온유와 절제니’ 여기도 ‘프라에이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는 성령이 주시는 여덟 가지 복된 마음 중의 하나이며 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속성이라고 하는 ‘사랑은 온유하며’ 라는 단어는 다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온유는 ‘친절’로 번역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이 친절은 성령이 주시는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인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는 15가지 속성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와 친절은 서로 구분되는 단어입니다.
정리하면 온유는 성령이 주시는 마음 중의 하나이며,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열매 중의 하나이고, 친절은 성령이 열매로 맺게 하는 사랑의 열다섯 가지 특성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친절이라는 이 단어는 라틴어 사전을 보면 그 뜻이 다양합니다.
상냥함, 고분고분함, 친절, 호의, 남을 돌보아주는 마음, 총애, 우대, 보호, 지지함, 예의바름, 질서정연함, 정중함, 쾌활함 등등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전만 보면 이 ‘친절’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친절’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중심으로 그 의미들을 종합해보면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감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것을, 질서를 따라 돕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친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친절’을 상냥함, 친근함, 호의적은 태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 친절이 상냥함이나 호의적인 태도로 표현될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는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 순서가 이렇습니다. 내가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상대방을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친절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마음에 심한 상처를 받고 아파할 때에 혹은 허기져 배고픈 모습으로 힘들어 할 때에 혹은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 마음이 많이 약하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될 때에 혹은 영적인 갈등과 신앙적인 고민으로 힘들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친절입니다.
그리고 이 친절은 철저히 질서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질서를 무시하면 오히려 충돌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정이 갑자기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서 아이에게 학비와 필요한 학용품을 사줄 수 없게 되었다고 해 봅시다. 이 일 때문에 그 부모도 안타까워하고 그 아이도 힘들어하고 있는 가정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친절은’ 내게 도와줄 수 있는 돈이 있다고 해서 그 부모를 무시하고 무례하게 그 아이에게 직접 돈을 건너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친절은’ 정중하고 예의바른 마음으로 질서를 따라 부모의 입장과 그 자녀의 입장을 생각하며 도와주므로 도움을 받는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기쁨을 주고 쾌활함을 주는 예의바른 마음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친절입니다. 이 ‘친절은’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옳고 가장 훌륭한 성품입니다.
‘친절은’ 이렇게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빠져 있는 상대방을 도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친절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친절은 타인의 필요를 향해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부드러운 마음이며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도우려고 하는 자발적인 마음으로 다가가서 돕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행하며 사는 이 친절한 사랑이 상대방의 마음에 감동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 속에서 이 친절함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와 같은 목회자는 성도들에게서 이 친절을 경험하고 성도들은 목회자에게서 이 친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친절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자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절
이 친절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한 속성입니다.
이 친절한 사랑을 가진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불행에 빠진 인간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의 친절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우리 같으면 그 한 행동 때문에 그 자신은 물로 그 자녀로 태어나게 되는 모든 인류가 무거운 죄악의 짐을 지고 고통당하게 된 것을 알려주면서 먼저 그 잘못된 행동부터 책망하였을 터인데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아담과 하와를 돕고자 하는 친절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셨던 하나님께서는 조금의 주저하심도 없이 죄에 빠진 아담과 하와에게 희망을 주고 살아갈 의욕을 다시 일으켜 줄 수 있는 복음의 약속 즉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 주셔서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실 것’ 이라는 복음의 약속을 창세기 3:15절에서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은 이 말씀을 원시복음 최초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원시복음의 말씀 안에는 범죄 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친절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친절하심이 인류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얼마나 풍성하게 나타나 있습니까? 시편 136편 말씀을 보면 제사장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친절한 사랑에 감사하는 일들을 선창하며 온 백성들은 그 제사장의 선창을 듣고 ‘그의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 라고 계속해서 화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내용을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로 쉽게 정리해 보면, ‘오늘도 눈을 뜨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라고 제가 선창하면 여러분들이 ‘그의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화답하는 것입니다. 또 ‘오늘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라고 제가 선창하면 여러분들이 또 ‘그 또 그의 선하심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전부는 다 하나님의 친절하심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친절하심의 결과입니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에게만 친절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범죄 한 가인에게 얼마나 친절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범죄 한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친절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친절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친절
이 친절은 또 우리 주 예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찬송가 405장’의 가사를 보면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이 찬송은 / 주님의 친절하신 팔 / 그 크신 팔, / 그 영원하신 친절한 팔에 우리 모두 안기자고 찬송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 가득한 이 친절한 마음이 불행에 빠진 인간을 돕고자 하는 이 친절한 마음이 너무 커서 불행을 당한 인류를 그대로 내 버려 둘 수 없으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신성을 부인하시고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성육신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이 친절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2:5절 말씀을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신성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어 오실 수밖에 없으셨던 그 친절함으로 충만하신 마음을 알려 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친절한 마음은 공생애 사역에도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절은 그 행하신 수많은 기적 사건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절은 굶주리고 배고픈 군중들을 위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절은 베데스다 연못에 가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절은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귀신 들려 고통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친절은 심지어 스승을 판 제자 가롯 유다에게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절은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하는 연민이 가득한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님의 친절
이 친절은 또 성령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가지고 계신 친절한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본래 친절한 마음이 없던 우리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주신 이 친절한 마음 어려움에 빠진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이 부드러운 마음을 우리들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 이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을 도와주고 세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교회를 돕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통해 교회에 유익을 주며 내가 무엇을 함으로 교회에 도움이 되게 할까? 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 척박한 개척교회에서 헌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돕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이 주신 이 친절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주신 친절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그 즉시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도 교회를 돕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개척교회가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돕고자 하는 결단을 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이 친절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친절한 마음이 충만하게 되면 친절한 사랑의 마음이 충만하신 예수님이 그냥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실 수 없으셨던 것 같이 사람들도 그냥 자기 입장과 자기 처지만을 고수하며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고 싶어도 하나님이 주신 이 친절한 사랑이 다른 사람들 도와주는 자리로 자꾸 나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복음전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친절한 사랑이 그를 강권하시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해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그 사랑이 그를 자꾸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쳤고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렸을 정도로 심하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지 않고 살아나서 그 다음날 어디에 가 있었습니까? 그 상처 입은 몸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제 주변에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사람들을 제 주변에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참빛교회가 여기까지 오는 과정 속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내 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어떻게 하든지 교회를 허물고 또 사람들을 허무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일은 사람들을 세워주고 또 교회를 세우는 일을 목적으로 일을 행하십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세워주고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져 있는 마음이 바로 친절한 마음입니다.
이 친절한 마음을 가졌던 이사야는 이사야서 50:4절에서 무엇이라 고백하고 있습니까?
‘주 여호와여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지 알게 하시고...’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선지자 직분을 받은 자답게 자기가 맡은 그 직분을 통해 백성들을 도와주고자 친절한 마음으로 이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솔로몬은 무엇이라 기도하였습니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위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은 왕이었기 때문에 왕으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돕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그 힘든 일천 번제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농부에게는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농부들이 1년 농사지은 곡식과 과일을 수확하게 될 때에 그 지역에 사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곡식과 과일을 다 거두지 말고 듬성듬성 남겨 두어서 이삭줍기 하는 사람을 베려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말씀을 보면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라고 하심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친절한 마음이 있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으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영벌과 영생을 구별하고 하늘나라와 지옥으로 갈라지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 동일한 친절이 예수님으로 격분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한 번 격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였던 서기관들과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을 향해 격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격분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혈기를 부리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격분하신 것은 성전에서 그 자리를 잃어버렸던 이방인들을 돕기 위한 격분이셨습니다. 성전에는 본래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라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의 뜰을 유대인들이 장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격분하셨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격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격분하신 것은 성전에서 짐승을 파는 것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주신 장소를 유대인들이 독점하고 없애 버렸기 때문에 격분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친절은 때때로 격분케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격분하는 친절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격분하는 행위만 보고 잘못 판단하고 비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친절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에베소서 4:31-32절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면 우리가 친절한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의 한 자질인 친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은 사람은 내가 대우를 받고 내가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여 그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본능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본능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은 자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서 6: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긴다.’는 이 말은 ‘결단하다 결론을 내리다 결정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결론을 내리고 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삶에 대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죽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을 하며 삽니다.
그러나 내가 죽은 사람은 ‘그 사랑’을 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요구하고 있는 사랑은 바로 ‘그 사랑’이며, 그 사랑이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친절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랑은 친절하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친절한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서 우리 마음 안에는 비록 소수이지만 주일학교 학생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소수이지만 이 성도들을 어떻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감정적으로 믿음 안에서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가족을 또는 믿지 않는 우리의 친척과 이웃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때로 사랑으로 손을 내밀고 때로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 사랑은 친절하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하고 거룩한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남은 생애의 삶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친절한 마음을 우리 마음 안에 충만히 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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