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래 참고
고린도전서 13:4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 아가페’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이 사랑은 ‘그 하나님의 사랑’ 이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이며,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이 사랑’을 ‘15가지 특성을 가진 사랑’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사랑은 우리가 하며 사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사람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랑을 받아 가진 사람들은 15가지 특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받아 가진 사람이라면 A집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나 B 집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똑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 사랑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똑 같은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이 사랑을 받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은 달라도 그 받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랑은 똑 같아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이 사랑’의 15가지 특성 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라면 이 사랑의 15가지 특성들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이 사랑의 15가지 특성들 중 일부를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에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의 15가지 특성 중에 열가지는 있는데 다섯가지는 없다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사랑이라는 말입니까?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라면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폭은 다를 지라도 사람마다 그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랑의 성숙도와 완숙도는 서로 다를지라도 이 사랑에 포함되어 있는 15가지 사랑의 특성들은 다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열 다섯가지 특성을 가진 사랑을 사람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론적으로 이정도 말씀드리고 오늘 우리는 사랑의 첫 번째 특성인 ‘오래 참는 사랑’ 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오래 참고’ 라는 이 말씀은 사실 ‘그 사랑은 오래 참는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참는다.’ 라는 말은 ‘마크로 두메이’인데 이 단어는 ‘마크로스’ (길다. 멀다)와 +‘두메오’(고통, 상처) 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이 오래 참는 사랑은 ‘심한 고통과 상처를 오래 인내하며 참아내는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언제 그 마음에 큰 고통과 상처를 받게 됩니까?
이웃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잘 갚지 않는다거나 그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 일 등등으로는 마음에 이렇게 큰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합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을 때 혹은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게 될 때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내가 했다고 하면서 누명을 씌우고 공격할 때 우리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 같은 말을 하며 우리의 본심을 외곡 할 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더구나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여서 나에게 이런 공격을 해 올 때 우리는 큰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오래 참아내는 사랑’은 이렇게 나의 진심을 호도하고 나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나에게는 그렇게 악의적으로 나를 대하는 그 사람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랑으로 참아내고 견디어 내게 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일을 겪어 보고 또 참아 보셨습니까?
이 ‘오래 참는 사랑’의 예로 들 수 있는 말씀이 사무엘하 16:5절 이하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 왕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2대 임금인 다윗 왕이 그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야밤도주를 하게 됩니다.
이 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울 왕의 후손 중 한 사람인 ‘시므리’라는 사람이, 반역을 도모하는 아들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과 신하들의 행렬을 뒤 쫒아오면서 돌을 던지고 조롱하며 각종 악담을 하였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지요.
이것은 자기 입장에서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하고 곡해하여서 비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런 사람들을 영웅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가 얼마나 악한 시대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다윗 왕을 호위하여 함께 도망가고 있던 그 신하 장군들이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 때 다윗 왕은 비록 ‘시므리’가 왕인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그런 대우를 받고 있는 자신에게는 ‘시므리’ 라는 사람을 징벌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해 보여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라고 하며 다윗은 ‘오래 참는 실천적인 사랑’을 그 삶 속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다윗에게 ‘오래 참는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다윗이 그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있는 형들에게 간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다윗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하는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보게 됩니다. 이 때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위한 의분이 일어나서 그 골리앗과 싸워서 그를 죽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군인들을 향해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노래를 하였습니다. 이 노래가 사울 왕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이 노래가 화근이 되어서 다윗은 이후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자신을 죽이려는 그 장인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며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윗과 그 따르는 사람들이 숨어 있었던 엔게디 광야에 있는 굴에 사울 왕이 용변을 보려고 혼자 들어오게 됩니다. 이 때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좋은 기회를 주셨다고 하며 사울 왕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그 옷자락만 가만히 베어 옮으로 사울을 향한 ‘오래 참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랑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이 ‘오래 참는 사랑’의 마음은 다윗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자신을 은혜로 불러주시고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자신에게 기름 부어 주실 때 성령을 통해 그 마음에 부어주신 사랑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후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덧입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까닭 없이 그를 모독하고 있는 ‘시므리’ 라는 사람에게,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에게 보여 주며 살았습니다.
‘오래 참는 사랑,’ ‘인내하는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욥도 그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 야고보서 5:10-11절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그러면 욥은 어떤 상황 속에서 오래 참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까?
욥은 하루아침에 그 모든 재산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10명의 자녀를 다 잃게 되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또 하루아침에 건강을 다 잃고 중병을 앓는 환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과 처지 속에 빠져 있는 욥에게 그 아내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게 심한 병이 든 욥의 모습은 더 이상 보기도 싫다고 하며,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내의 말이 평생을 한 집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욥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겠습니까?
이 뿐 아닙니다.
욥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욥의 동역들이 위로하러 찾아왔습니다. 직접 찾아와서 보니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생각하였던 것 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위로할 말을 잃고 함께 재를 뒤집어쓰고 함께 않아 있었습니다.
욥은 이런 친구들에게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그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욥이 하는 이 말을 듣고 친구들은 갑자기 그 태도를 돌변하여 ‘욥이 짓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정죄하면서, 욥에게 그 지은 죄를 생각해 보고 회개할 것’을 촉구 하였습니다.
자신의 고난을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로부터 정죄함을 받을 때 욥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욥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습니까? 이런 욥의 아픔들이 그 친구들과의 논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오래 참아 내는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래 참는 이 사랑은 우리에게 두 가지 경험을 하게 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슬픔을 당하였던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난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하늘의 은혜로 가득 채워주시는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1:8절에서 ‘내가 예수의 심장을 가졌다.’라고 할 때 어떤 상태에서 이 말씀을 하였겠습니까? 아마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워오는 이런 신비한 임재 혹은 일체감 속에서 이 고백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경험은 비록 우리 마음이 큰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아 낼 수 있는 신적인 성품을 우리 마음 안에 만들어 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사람들은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고 계신 하나님을 따라 자신도 그 삶 속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에 대해 오래 참게 하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래 참게 되는 이 사랑’은 우리에게 있는 기질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새롭게 창조해 주신 기질이며,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이 오래 참는 사랑은 우리 신앙의 깊이와 성숙도에 따라 그 질과 깊이가 달라 지게 됩니다.
이런 ‘오래 참는 사랑’이 바로 성경이 말씀해 주고 있는 사랑입니다.
이 오래 참는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직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기질적으로 오래 참지 못한다.’ 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오래 참는 사랑’은 우리의 성품과 기질까지도 변화시키실 수 있으신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부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게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이 ‘오래 참는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오래 참는 사랑의 마음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서 5:5절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 모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에서 놓여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처럼 육신을 따라 살 수도 있고 성령을 따라 살수도 있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자유인이 된 우리들에게 너희는 이제 예수님 안에서 오래 참는 사랑을 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사랑을 따라 살 것인지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오래 참는 사랑의 열매’는 우리가 맺고자 한다고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맺게 하시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15가지 사랑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우리가 이 오래 참는 사랑의 삶에 관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갈라디아서 5:24절 말씀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다른 하나는, 갈라디아서 5:16절 말씀과 같이 성령을 따라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자신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시게 되는데 이 때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성령의 열매인 ‘오래 참는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열매로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런 사랑의 열매를 맺으실 수 있도록 늘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삶을 살 뿐 아니라 또 늘 성령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15가지 사랑의 특성들은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서 맺으면서 살아가라고 주신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사랑의 특성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사랑의 특성들을 주셨음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열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15가지 사랑의 열매들이 나에게서 나타나고 있음을 통해 내가 주 안에 있고 주가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오래 참는 사랑의 열매가 나의 삶 속에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먼저 성령을 통해 이 오래 참는 사랑을 받게 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오래 참는 사랑을 은혜로 선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오래 참는 사랑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이 사랑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요한복음 3:5-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오래 참는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사랑을 받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선물로 주신 그 사랑을 가지고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이유는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자녀로 거듭 태어난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3-35절 말씀’을 보면 ‘일만 달란트 진 빚을 탕감 받은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 이 사람은 지금으로 말하면 나라의 금고를 맡아 관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오늘날로 말하면 수십조에 해당하는 국가의 돈을 횡령 해 먹었습니다. 임금이 그것을 알고 그에게 변상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여기 ‘내게 참으소서’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오래 참는 사랑에서 사용되었던 ‘마크로 두메이’입니다. 임금은 그 신하가 요구하는 대로 참아 주었습니다.
2. 그런데 이 신하는 임금 앞에서 나와서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한 동료를 만나서 똑 같이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그 동료가 이 신하에게 ‘나에게 참아 주소서.’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여기에도 ‘마크로 두메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그 동료의 요청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3. 임금은 그 신하에게 수조원에 이르는 빚도 참아 주었는데, 그런 은혜를 입었던 그 신하는 100데나리온 빚진 자기 동료에게 참지 않고 감옥에 넣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이 일을 임금에게 가서 전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노하여 그 신하를 다시 잡아 오게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빛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탕감 받았다는 이 말씀은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경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는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너희라면 이제 가서 네 동료들에게 너희도 ‘오래 참는 사랑’을 하며 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참지 않으면 너희에게도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은 성령의 열매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된 우리에게 너희도 이 오래 참는 사랑을 하며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16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입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래 참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성경은 거듭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4절입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를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면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골로새서 3: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에베소서 4:2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디모데후서 4: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히브리서 6:12절입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5:10절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이런 오래 참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이다.’ 라고 하며 15가지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랑이 바로 너희가 행하며 살아야 할 사랑이라는 것은 다시 상기 시켜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오래 참는 사랑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알고 있는 스스로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이 오래 참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오래 참지 못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남여가 사귈 때 상대방에게 참을성이 부족하다면 아무리 그 상대방이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알고 속아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사랑을 사랑으로 알고 속아 넘어가 단 한번 뿐인 인생을 망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보여주신 이 사랑들을 바로 알고 깨달아서 사랑에 대한 바른 기준을 가질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에 대해 살피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런 사랑의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 은혜와 능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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