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4. 19. 13:26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

 

사랑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친절하고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한 태도 가지고 먼저 손을 내 밀고 관심을 가져 주는 것 등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이며 15가지 속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악 된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고 에베소서 2: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듯이 이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가진 사람의 사랑을 키우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이제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아 왔지만 그것보다 좀 더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서 바라고 원하는 사랑은 너희에게는 없다.’고 하십니다.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해 은혜로 선물로 너희에게 부어준다.’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5:5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 사랑은 우리가 훈련하고 익힐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의 성품에서 나온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에게 나온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안에 있는 이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랑과 그 출처가 다르고 그 깊이가 다릅니다. 이 사랑 안에는 15가지 사랑의 기질들이 들어 있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15가지 사랑의 기질 중 하나인 시기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시기하지 아니하며 라고 기록된 이 구절이 헬라어에서는 헤 아가페 젤로이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역해 보면 그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입니다.

 

오늘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시기심의 의미가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시기심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첫 번째 의미는 무엇에 열심을 가지고 있다.’ ‘열정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의미는 질투, 시기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기의 뿌리는 어디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 ‘무엇을 가지려는 열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열정과 열심의 뿌리에서 맺혀지는 열매가 바로 시기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시기심라는 단어의 의미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시기심는 소유욕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경쟁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그 목적하는 일을 성취해 내기 위하여 가지게 되는 열정이 바로 시기심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정욕열정을 말합니다. 탐심은 세상의 것에 내 마음이 과도하게 고정되어 있는 탐욕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시기심은 소유욕에서 출발하지만, 그 소유욕의 뿌리는 열정과 탐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내 마음이 이 세상의 어떤 것에 고정되어서 그것이 너무 갖고 싶고 그 자리에 너무 오르고 싶어서 내 마음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시기심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기심열정탐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시기심의 특성입니다.

 

1. 시기심은 만족할 줄 모르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야심이나 열정을 가진다고 그 얻고자 하는 것 즉 재물 지위 명예 등을 다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은 두 부류로 분리됩니다.

하나는 재물을 얻고자 하는 열정은 있었지만 얻지 못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재물을 얻고자 하는 열정대로 그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된 경우입니다.

 

이 때 재물을 얻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얻고자 하는 재물을 얻는 사람들은 만족할까요? 이런 사람들도 만족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소유에 대한 열정의 불은 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전에는 못 살던 사람이 기회가 되어서 어느 정도 살만해지면 그 새로운 삶에 만족할까요? 남의 집에 세 살던 사람이 기회가 되어서 적지만 자기 집을 가지게 되면 거기에 만족할까요?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음료수를 마시면 시원할 것 같아서 마시지만 음료수는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합니다. 음료수는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도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에 대한 열정과 소유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소유에 대한 열정과 탐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목적하던 대로 어느 정도 사회적인 상위 클래스에 오르게 되면 그 상위 클래스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 중에 자기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진 다른 사람을 발견하면 그 때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향한 시기심이 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물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만 있었지 그 목적하는 재물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시기심은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강한 소유욕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을 얻는 일에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이나 사람 지식이나 지위 등등을 목적으로 삼고 몰두하게 되면 반드시 따라오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이때부터 타인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에 몰두하는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 만큼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고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은 약화됩니다.

 

그래서 이 시기심은 타인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데서 출발합니다.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 마음을 다른 말로 하면, ‘야심,’ ‘자기중심주의,’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배려하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시기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3. 사람들은 시기심을 포장을 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에 가지고 있는 탐욕을 비전 야심 사명 등으로 포장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탐욕이 가져온 시기심과 질투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공정하게 평가하고 공정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자기포장을 합니다. 그렇게 자기는 포장하고 상대방은 깎아 내리고 상대방의 성공을 평가 절하하고 때로는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을 험담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절하하고 깎아 내리는 일을 하는 것은 가장 나쁜 일입니다. 혹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백이면 백 다 탐욕적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 포장을 들추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를 살펴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혹은 내가 탐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 혹은 그 사람이나 내가 성령 안에서 탐욕이 어느 정도 처리 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안에 혹은 내 안에 발동되고 있는 시기심의 양을 보면 됩니다. 내 마음에 있는 시기심의 양은 곧 내 마음 안에 가지고 있는 탐욕의 정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것입니다.

 

이제까지 논의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시기심의 뿌리는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옛 사람의 탐욕에 있고, 그 탐욕은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열정에서 기원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속에 소유에 대한 열정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내가 소유하고자 하는 열정을 방해하거나 혹은 내가 갖고 있지 못한 많은 재물을 갖고 있을 때 우리 안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시기요 질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 마음에 시기심과 질투심이 많은 사람들이 더 탐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이런 시기심의 구체적인 예들입니다.

 

부부 사이가 원만하던 아내가 어느 날 동창회에 가서 고향 친구를 만나고 오더니 그 가정에서는 심각한 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어느 면으로 보나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남편을 잘 만나서 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마음속에 있던 탐욕이 발동을 해서 속이 뒤집히고 내 꼴이 이게 무엇인가?’ 하는 자책하는 마음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납니까? 아닙니다. 그 여인은 이 모든 것이 다 무능한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괜히 남편에게 화가 나고 그래서 짜증을 부리고 냉전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남편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남편을 잘 만나서 뻐기는 그 고향 친구로 인하여 그 마음 안에 꼭꼭 숨어 있던 옛 사람의 소욕인 시기심을 발동하게 하였고 이렇게 발동된 시기심은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이 분노는 미운 마음을 불러일으켜서 이 미움 마음이 부부사이를 냉전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류 최초로 시기심 때문에 낭패를 당한 가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버지 아담에게서 배운 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이 때 가인이 하나님께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회개하고 바른 제사를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가인이 한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그 동생 아벨을 시기 질투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시기 질투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상대방과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 질투심이 그 마음속에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이 미움과 분노는 결국 살인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울왕도 있습니다.

사울은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염소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을 때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왕 됨을 싫어하는 건달들을 품고 가는 것을 보면 포용성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 앞에 자신보다 믿음도 좋고 더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는 다윗이 나타나자 그는 돌변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 다윗을 보자 시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다윗을 죽이고 말겠다고 하며 군대를 동원하여 쫓아다니지 않습니까?

 

요셉의 형들은 왜 같은 형제였던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았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요셉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있는 요셉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꿈을 주셨다고 하는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바벨론에 전쟁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바벨론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승진하여 나중에는 그 나라 사람들을 다 재치고 바사 왕국의 세 명의 총리 중 가장 으뜸 총리가 되자 사람들은 이런 다니엘을 시기하여 흉계를 꾸미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매일 기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의 사람이나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던져 넣자고 왕의 어인이 찍힌 변개할 수 없는 왕령을 선포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자신들 보다 인기가 더 있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시기심은 육체의 본질입니다.

 

옛 사람의 탐욕과 열정에서 시작되는 시기심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육체의 본질입니다.

그 마음 안에 시기심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시기심은 불면증을 가져오고, 영혼의 고요함과 풍성함을 빼앗아 가며, 영적인 기갈을 가져오게 합니다. 또 시기심은 평화를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가정에 불화와 사람사이에 불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잠언 14:30절입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시기심의 반대는 평온과 고요함입니다. 그러나 시기심은 뼈를 썩게 하고 골수를 마르게 합니다.

 

우리 마음의 평화는 너무 중요합니다.

내 마음이 고요하고 잠잠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비록 그 살아가는 환경은 요동치더라도 그 마음의 내면에 고요함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이 세상을 다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고요함이 없으면 그가 비록 일국의 왕일지라도 감옥에 갇혀 사는 것과 일반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고요는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시기심을 제거하면 마음이 고요해 집니다. 반대로 시기심은 마음을 격동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혼과 뼈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4-16절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 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기심은 그 출처가 땅입니다. 시기심은 정욕 적이고 마귀 적이고 귀신 적입니다. 시기심은 다툼과 혼란과 악한 일을 일으킵니다. 이런 시기심은 하나님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삶입니다. 그 마음에 시기심이 있으면 다투고 충돌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시기심을 제거해야 심령의 천국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시기심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자기 폭로입니다. 시기심은 그 내면이 얼마나 탐욕적인 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데 있습니다.

시기심은 그 분량의 차이만 있지 우리 마음속에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 시기심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육체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정욕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악한 영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자기 폭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시기심을 통해 내 속 사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탐욕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심의 출처에 대해 갈라디아서 5:24절 말씀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네 번째 살펴볼 것은, 시기심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기심과 질투심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시기심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마음 안에 있는 탐욕의 불을 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옛 자아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안에 있는 탐욕의 불이 꺼지면 같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시기심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죽으면 죽는 만큼 시기심의 불은 꺼져 갑니다.

자신의 옛 자아와 열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시기심의 불은 꺼지게 되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하지 않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며 천국 백성들이 가지고 사는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7-18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위로부터 온 지혜는 즉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즉 순수하고 순결하고, 둘째 화평하고 즉 평화롭고 고요하고, 셋째, 관용하고 즉 정중하고, 넷째, 양순하고 즉 합리적이고, 다섯째, 긍휼이 가득하고, 여섯째,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일곱째, 편견과 즉 불확실함이나 애매함 모호함이 없고, 여덟째, 거짓이 없나니 즉 위선이 없이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그 삶 속에서 의의 열매를 거두는 삶 살게 되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곧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시기심이 사라진 사람들은, 그 옆집에 사는 사람의 자녀가 잘 되는 것을 보아도 직장 동료 중에 누가 잘 되어도 사촌이 잘 되어서 땅을 사는 것을 보아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됩니다.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그 마음으로 축복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포기하는 만큼 이 시기하지 않는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100% 시기심이 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이 악한 시기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합니다. 시기하는 마음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과 같아서 잊을 만하면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기 이전과 예수 믿은 이후의 다른 점은, 예수 믿기 이전에는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시기하는 마음의 종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다투고 갈등하고 분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이후에는 이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누가 내게 이 마음을 주고 있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내 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시기하는 마음의 근원을 알고 바르게 대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악한 자에게 속하여 계속 시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경우가 바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이 시기심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시기하지 않는 사랑을 주십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타락한 옛 자아를 죽이는 고통스러운 싸움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 치열한 싸움을 통해 옛 사람의 열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자아를 죽이는 그 고통과 아픔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이 시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하지 않는 사랑은 내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들어내 주는 천국백성의 신분증과 같은 것입니다.

 

시기심이 없는 사랑을 선물로 받았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아마 세례요한일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너는 도대체 누구인데 백성들에게 세례를 주느냐?’라고 물을 때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요한복음 1:23절입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소리음성이라는 뜻입니다.

소리의 특징은 사람들의 귀에 들린 다음에는 사라집니다. 오직 그 소리가 담고 있는 의미만 전달해 주는 것이 소리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리에는 자기가 없습니다. 소리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소리로서 전달해 주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전달해 주는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 세례요한만큼 자기 정체성을 멋지게 표현해 주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이었기에 그는 놀라운 고백들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자기를 주목하자 세례요한은 나를 주목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을 증거 하러 온 소리에 불과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이 계신데 나는 그분 의 신발 끝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또 세례요한이 세례 주는 곳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이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는 세례를 받으러 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이것을 싫어하여서 그 스승인 세례요한에게 선생님 선생님께 세례를 받은 분이 세례를 주매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가나이다.’라고 시기심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 세례요한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니라.’ 요한복음 2:26절 이하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이렇게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전하는 소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난후 역사의 뒤편으로 유유히 사라져갔습니다.

 

이런 말씀을 볼 때 세례요한은 그 속사람이 십자가에 완전히 죽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속에 탐욕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스승인 세례요한의 명성을 이용해서 뭔가를 얻으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았습니다. 이들도 예수님의 명성을 이용하여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 안에 있는 타락한 옛 본성을 죽인 사람들에게 하늘의 기쁨을 주십니다.

29절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은 속사람이 죽은 사람 아담 안에서 타락한 옛 본성을 죽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섬김을 받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높여주고 존중해 주는 기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가졌던 기쁨은 이런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가졌던 기쁨은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 기쁨을 가지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시기하지 않는 사랑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 자신 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인 옛 자아를 죽이려고 투쟁하며 싸우는 사람 이런 싸움을 할 때 당하는 고통까지 감내하며 피를 흘리기까지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사랑은 그것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은 마치 하나님이 주신 훈장과 같은 것입니다. 이 훈장처럼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갈라디아서 5:6절 말씀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고 로마서 5:5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신 사랑이라고 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내가 애쓰고 노력하며 하는 사랑은 그냥 사람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사랑을 주시면 우리는 그 아가페 사랑을 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내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며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듯이 시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된 우리들에게 살기를 요구하는 사랑은 이 시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가 하며 살아가는 사랑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아담에게 속한 우리의 옛 자아를 죽여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시기하지 않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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