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5. 5. 05:39

 

 

그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

 

지난 주 복습 - 자랑하지 아니하는 사랑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자랑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나팔을 불지 아니한다.’ 혹은 드러내지 아니한다.’ 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혀 자기를 자랑하지도 드러내지도 않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양태를 보면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냥 가만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그 장소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현란한 언어나 제스츄어로 자기를 알리고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그 행동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에 우선을 두고 무엇에 집중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차이에서 기원합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또 그 내면의 성숙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외면적인 관계에 그렇게 예민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나타나는 외형적인 현상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기회만 있으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열등감은 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등감이 자랑으로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열등감이 교만으로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열등감이 자랑으로 나타나는 경우에 대해서는 자랑하지 않는 사랑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열등감이 교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러면 교만한 마음은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교만은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외적인 조건과 나의 외적인 조건을 비교해 보아서 내가 가진 조건이 상대방이 가진 조건보다 났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 머리를 치켜드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만은 우리가 가지게 되는 내면적인 성품이지만 우리 내면의 성숙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비교하여 가지게 되는 마음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 교만은 우리 내면에 감추어져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어떤 것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표현하거나 자기 의견을 표현할 때 혹은 자기를 알리고 자기를 노출시키려는 육신적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겸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숨어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가? 세상에 속한 사람인가? 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그 중심 그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은밀하게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인정해 주시고 이런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구약시대 겸손했던 대표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갈렙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믿음이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의 믿음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 확실하게 들어났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10명의 정탐 군들은 가나안 땅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 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민수기 14:7-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리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렙에게는 그가 정탐하러 갔던 땅을 그 자손에게 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민수기 14:24절입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이후 갈렙은 성경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일을 다 하고서는 곧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 믿음으로 백성들에게 인정과 지지를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갈렙은 한 번도 여호수아의 지도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도 자기 의견이나 견해를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호수아가 기도하지 않고 기브온 사람들과 잘못된 언약을 맺었을 때에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죄를 지어 아이 성 정복에서 실패하였을 때에도 역시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갈렙이 다시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것은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입니다.

당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제비 뽑아 지파별로 분배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갈렙은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자신은 그 기업을 제비 뽑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대한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헤브론 산지 즉 이 산지를 내게 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갈렙이 나에게 특별혜택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산지에는 철병거로 중무장을 하고 있는 네피림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 사람들과 싸우기를 기피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갈렙은 그곳을 요구합니까? 전에 갈렙이 백성들 앞에서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라 고백했던 그 믿음으로 지금 자신이 그곳을 정복하겠다고 하며 그 산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갈렙은 이렇게 가나안 정복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그 산지를 자신에게 기업으로 주기를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지를 정복한 후에 갈렙은 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렙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섰다가 그 일을 마친 후에는 다시 철저히 자신을 숨겼습니다. 만약 갈렙이 한번이라도 자기를 들어내려고 했다면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파와 갈렙 파로 분리되어서 큰 어려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겸손하게 자신을 감추고 숨겼습니다.

 

또 겸손했던 하나님의 사람에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신약시대에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바나바는 사실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보다 앞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구브로에 있는 자신의 땅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든 사람이며, 이 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그 삶을 통해 얼마나 약한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삶을 살았든지, 그 이름은 본래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이 바나바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회심한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소에서 외롭게 사역하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 교회로 불러서 자신과 동역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이후에는, 자신보다 더 논리정연하게 성경진리를 가르쳤던 바울에게 선교의 주도권을 내어 주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바나바에게서 참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 즉 겸손하고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교만한 마음으로 머리를 추켜세우고 대적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을 들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자타가 공인하였던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세가 어릴 때 벌써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너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수장되었을 때 백성들 앞서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미리암이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여인들을 다 놓아두고 구브로에서 태어난 흑인과 결혼한 것을 비난하였습니다. 이 비난은 단순히 내가 그 결혼을 싫어한다. 나는 그 결혼을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라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머리를 치켜세우고 모세를 얕잡아 보고 무시하며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보다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둔 미리암의 교만한 마음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함께 당을 짓고 또 이스라엘의 250명의 지도자들과 규합하여 스스로를 높이고 일어나서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아론과 그 자손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며 자신들에게도 아론의 자손들에게와 같이 제사장 직분을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만한 고라 당 사람들에게 진노하셔서 땅을 가르시고 고라와 그에 속한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를 모두 삼켜 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사람들은 물리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교만한 사람 거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대단한 사람인 것 같이 생각하고 자기 교회가 대단한 교회인 것 같이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를 자랑하기를 우리교회는 0만 명이 모이는 큰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교회의 시설들이 얼마나 잘 갖추어져 있는지를 자랑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런 저런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고 자랑하고 선전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이 사람들이 자랑하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마치 배설물처럼 생각하고 버렸다고 하는 이 세상의 자랑과 이 세상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는 것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다 가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버린 것이 가지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드러내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랑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렇게 자랑하고 있는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 땅의 영광을 말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과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며 하늘에 속한 교회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며 교회라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이렇게 땅의 것을 자랑하고 자신들의 교회가 더 낫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교회들을 찾아갑니까? 그리고 또 나는 그런 교회 다니는 성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사람들이 추구하며 사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영광이며 이 세상의 자랑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속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영광을 따라 교회를 선택하고, 세속적인 영광을 가진 그 교회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드러나게 일하는 교회가 아니고 숨어서 일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세상 속에서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참 진리를 소유한 교회라면 세상 속에서는 무명의 교회로 남아 있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이런 교회들이 참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적인 자랑거리가 많은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없는 교회 이 세상의 영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 세상 속에서는 숨겨져 있는 그런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되고 무명의 교회가 되면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세상과 그 영광에서 떠나 있는 이런 성도들과 교회들을 알아보시고 그 버린 세상 영광보다 더 큰 하늘의 은혜와 영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3년 반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은 그 하실 일을 마치신 후에는 즉시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후에 그 자리에 머물러 서 계시면서 그 행하신 기적을 가지고 영광을 받으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신 후에는 곧 그 자리를 떠나셔서 곧 골방이나 광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뿐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인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시편 115:1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라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무슨 큰 일을 행한 후에 그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그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이것이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의 참 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사역한 그 현장에 남아서 그 일을 행한 자기를 보고 사람들이 박수 치게 하고 칭찬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이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교만한 사람들을 보며 환호하고 열광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람이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18:12)

 

교만에 대해

 

교만이라는 단어에는 퓨시오타이 가 쓰이고 있습니다.

퓨시오타이는 고무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면 팽팽해지는 것처럼, 무엇인가 허황된 가운데서 자기가 우쭐해지고 높아져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 일곱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고린도전후 서에 여섯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교만한 교회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이 받은 은사와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이들은 방언, 통역, 예언, 환상, 계시 등등의 은사들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렇게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방치해 두었고 그 결과 성경에서 가장 무질서하고 가장 부패한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이 처방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언제 겸손해 질 수 있습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설 때입니다.

십자가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 즉 그 아가페 사랑 즉 교만하지 않는 사랑을 가질 때입니다.

 

그렇다면 교만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는 말입니까?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붙잡고 예언하는 능력을 붙잡는 등등 십자가 아닌 다른 것을 붙잡게 되면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붙잡는 순간 자기에게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을 발견하고 곧 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여 교만하게 됩니다. 십자가 사랑이 아닌 사람의 사랑을 가질 때에도 똑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사랑은 외곡 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에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버리는 또 다른 방법은

둘째,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도 바울과 같이 세상사랑 세상 자랑 세상 영광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겸손할 수 없습니다. 버리지 못한 세상 영광 세상 자랑이 그 사람을 교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교만을 버릴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은

셋째, 외적인 업적과 성취를 추구하지 않고 내면적인 성장과 성숙에 목표를 두는 것입니다.

 

외적인 업적과 성취에 몰두하게 되면 이는 곧 자랑으로 나아가고 일일 잘 풀리면 곧 자기 교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 목표로 두고 자신의 내적 성장과 성숙을 신앙의 목표로 삼게 되면 이런 사람들은 자랑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가난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죄를 인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태복음 5장의 8복의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런 복된 마음을 가진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버리고 교만한 마음을 버린 성도 겸손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주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아주 의미 있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것은 한국교회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못한 중국교회는 사도바울을 따라 세상 자랑과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반대로 바울이 배설물처럼 버렸던 것을 취하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말에 한 줄 덧붙이면 그렇게 취한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교만해 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그 아가페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그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가지신 사랑이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안에서 우리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사랑 안에서 교만을 버린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