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7. 4. 13:43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5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의 특성들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그 아홉 번째 특성인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 어원적인 고찰

 

먼저 어원적인 고찰부터 해 보겠습니다.

악한 것 이라는 말에 사용되고 있는 카코스나쁜,’ ‘악한,’ ‘피해,’ ‘미움,’ ‘상처 등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런 어원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악한 것들’ ‘나쁜 것들이 아주 다양화 되어 있는데, 나쁜 것들을 총칭하는 단어가 바로 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카코스의 어원은 카키아입니다.

카키아는 악 중에서 특히 내적인 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고린도전서 13: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한 것내적인 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한다.’ 라는 말에는 로기죠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생각하다’ ‘간주하다’ ‘헤아리다’ ‘상상하다 계산하다’ ‘평가하다’ ‘결정을 내리다등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기죠마이의 어원은 로고스입니다.

로고스우주의 원리,’ ‘진리,’ ‘말씀,’ ‘,’ ‘진술’,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지요.

 

이렇게 볼 때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한 생각단순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정도의 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가 지나가는 그런 악한 생각들이 있잖아요. 이런 정도의 악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한 생각악한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치밀하게 상상하고,’그것을 꼼꼼히 따져보고, 헤아려보고, 진단해보고, 평가를 해서, 그 결론까지 이미 내려놓은 그런 악한 생각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원적인 고찰을 기초로 해서 본문을 다시 해석해보면,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이 사랑, 악한 것들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헤아려 보고, 계산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는 사랑 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가 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 트는 것은 막아야 한다.이 말은 악한 생각이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 내 마음 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악한 생각이 내 마음 안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은 악한 생각이 내 마음 안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지 않도록 하는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이토록 거부하는,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소가 짚을 먹고 조용한 시간에 그 먹은 짚을 다시 토해 내어 되새김질 하듯이, 그렇게 악한 생각을 들추어내어서 거듭 거듭 되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악한 것을 들추어내어 거듭 거듭 생각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렇게 악한 생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악한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악한 생각과 악한 계획들을 마음속으로 상상하면서 상대방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그렇게 복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악한 생각들을 하다가, 그 생각하던 대로 현실 속에서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면 내가 반드시 그렇게 복수해 주겠다.’ 라는 생각까지 가지는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 마음 안에 악을 잉태하고 그 마음 안에 악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정말 그런 기회가 찾아오면 반드시 그 기회를 잡아 복수하고 보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5절 말씀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랑은 이런 악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지금 사랑의 특성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고 살아가고 있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라고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어떤 삶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악을 잉태하고’, 악을 키우지 않는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 사랑을 소유하고, 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미국에서 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보수주의를 대표했던 목사님 중에 한 분 이셨던 메카트니 목사님이 계십니다. 당시 이 목사님이 시무했던 교회에는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설교 중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시면서, 성도들의 입장과 형편은 다 다르겠지만 모든 성도들은 주일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설교를 했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것에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던 그 청년이 강하게 반발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내 입장 내 처지도 알지 못하면서 너무 쉽게 말씀하신다.’ 라고 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메카트니 목사님은 너무나 유명한 분이셨고, 자기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그냥 참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거부하고 반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이 청년이 그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장로교에서는 당회의 구성원인 장로들에게 교회 운영의 실권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운영의 실권을 거머쥐게 된 이 청년은, 결국 메카트니 목사님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일을 앞장서서 하게 됩니다.

 

이 장로님은 청년 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가지게 된 반발하는 마음, 대적하는 마음의 악한 생각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잘 처리하지 못하고, 그것을 거듭 거듭 되새김질하고 되 뇌이다가, 나중에 그 악한 생각을 악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결국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악한 생각을 행동으로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이 청년이 장로가 된 후에 왜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이 청년에게는 자기 교회 담임 목사님이었던 메카트니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5절 말씀은 사랑이 있으면 이렇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교회의 장로가 되었어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런 사랑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일은 교회 안에서 부지기수(不知其數)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의 허물이 발견되어 그것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게 되면, 보통의 성도들은 그 담임 목사님이 하신 실수를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동정합니다. 왜요. 목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소 목사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곧 바로 목사님의 행동을 비난하고, 공의의 잣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의 선동을 받고 동조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1세기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종교적인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을 그럴듯하게 포장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을 받고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하며 동조한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매한 군중들, 맹목적인 군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어디에나 사랑이 없는 선동가가 있는가 하면, 그런 선동을 받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형제들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국가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렇게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유혹을 간파하고, 유혹을 피하고 유혹을 이겨나가는 지혜 있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미움이 곧 살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중요한 표징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과 생각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지고 사셨던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님이 하셨던 생각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그리스도인 됨을 증거해 주는 확실히 증거와 표징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고 선동하는 사람, 이런 선동가들의 선동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불신앙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참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2. 생각과 마음과 삶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후에 산상설교의 말씀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은 죄의 시초가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제가 알고 있었던 죄는 드러난 행위의 죄였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죄라는 인식이 제게는 없었습니다. 왜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정죄하는 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미워하는 생각이 이미 살인한 죄와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깨닫기 이전에도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저는 제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저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난 후에 제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생각 속에서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아니 거의 무의적으로, 악한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한 생각을 해야 할 이유도 없고, 악한 생각을 해야 할 원인도 없는데, 거의 습관적으로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악한 생각을 많이 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거의 습관적으로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상상을 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이 바로 제 마음이고 제 생각입니다.

물론 지금도 무의식 적으로, 어떨 때는 의식적으로 죄악 된 생각을 여전히 하며 삽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생각은 예수를 믿기 이전과는 너무나도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의 일깨워주심 안에서 선한 생각들도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까닭 없이 모함해 올 때 변호하고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제 마음 안에는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곧 바로 깨달아지는 것은 예수님도 그런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곧 바로 내가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살고 있다는 이 확신이 제게 얼마나 큰 기쁨과 평강을 주는지 모릅니다.

 

이사야서 53:7절 말씀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12절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아멘.

 

예수를 믿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예수님이 하셨던 생각을 나도 하고,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나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악 된 인간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성령이 성도들의 인격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 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멘.

 

어떤 사람들은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은사 등등의 성령의 나타나는 표적에 큰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마음 안에 미쳐 주시는 선한 영향력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그 믿음의 기초를 두게 됩니다.

 

로마서 5장을 보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인격을 인격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의역이 가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인내가 우리 인격을 변화시키고, 이 인격의 변화가 확실한 하늘 소망을 갖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중생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가 바로, 그 마음과 그 생각의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마음의 변화를 통해 우리 삶의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이뤄 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1)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

 

그러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싶은 사람들은, 먼저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악한 생각들과 악한 마음들을 회개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악한 마음, 악한 생각, 악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 또한 이런 사람들의 마음 안에 역사해 주실 수도 없으십니다.

 

이사야 59:1-2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이 담으로 가로 막혀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도 그런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우리들도 때로는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직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화를 내면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간이니까 상황에 따라서 화를 낼 수는 있지만, 그렇게 화를 낸 것을 그 날이 지나가기 전에 회개하고 버림으로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 화를 낸 것을 회개하지도 않고, 화를 나게 하였던 죄악 된 생각을 마음에 품고, 마치 소가 그 먹음 여물(餘物)을 거듭 거듭 되새김질하듯이 그렇게 죄악 된 생각들을 되새시면서 그 악한 생각 속에 사로 잡혀 살아가게 되면, 이런 사람들은 결국 그 자신이 붙잡고 놓지 않은 그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가 이끄는 대로 죄에 코가 꾀어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생각이 마음을 낳고, 마음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운명을 낳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매사를 긍정하며 사는 사람들은 결국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과 미워하는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종 지금 내가 하며 사는 생각들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 생각을 변화시켜 주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 생각을 변화시켜 주십니까?

성령의 열매인 그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아가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심으로 우리 생각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2) 우리 마음과 생각을 정리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 면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정리해 주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과거에 받았던 상처들을 다 덮어주시고 정리해 주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속담 입술 30, 가슴 30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30초 동안 가볍게 한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30년 가슴앓이를 하게 하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그 받은 상처를 잊지 못하고,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때로 그 가슴 아픈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어서 생각하며 아파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수의 칼을 갈기도 합니다. 그 받은 상처가 보통 때는 숨겨져 있는 것 같다가도 기회만 되면 고개를 내 밀고 분노로 폭발합니다.

 

불교에서 존경 받고 있는 성철 스님은 도를 깨치기 위해 10년을 넘게 바닥에 누워서 잠을 자지 않으면서 고행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의 부정직과 악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 왕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사자와 같았던 책사 아히도벨이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친척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아비도벨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가 죽은 후에 다윗이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주군으로 섬기던 다윗을 버리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편에 서게 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게 하고 결국 반역을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상처 입은 마음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마음을 치료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심으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나쁜 기억들을 지워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우고 비운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사랑 안에서 선한 생각 아름다운 생각을 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상처 입은 마음 분노하는 마음으로, 복수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에서일 것입니다.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이후, 내가 반드시 100 1,000배로 복수해 주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연의 요새지인 페트라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복수할 때 사용할 사병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복수를 위해 경제적으로 큰 지출까지 감당하며 복수할 날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어느 날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는 사병으로 양육하고 있었던 사람들 중 400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에게 복수하기 위해 페트라 산체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에서가 야곱에게 본때 좋게 복수하지 못했습니까?

에서는 자신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간 야곱이, 나는 아버지가 축복해 주신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축복을 받았다,’라고 하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돌아올 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에서 앞에 나타난 야곱의 실재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오직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그 야곱이 자신에게 수많은 앞서 예물을 보내주며 나타났습니다. 또 야곱은 외삼촌 가축들을 방목하다가 빨리 도망쳐 나오느라고 땀에 찌든 허름한 옷을 그대로 입고 나타났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야곱은 지난밤에 밤새 기도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 초취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더구나 천사와 씨름 하다가 위골된 환도 뼈 때문에 재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불편한 몸으로 그냥 걸어오는 것도 힘들 텐데, 자신이 에서에게 한 지난 일들을 미안해하며 수도 없이 에서를 향해 절하며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야곱을 보면서 에서는 그 동생 야곱이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그 야곱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야곱을 보고 있는 에서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부어주셨고, 하나님이 부어주신 그 사랑이 원한의 서리 발로 얼어붙어 있던 에서의 마음을 녹여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에서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원수 사이였던 에서와 야곱이 화해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처들을 치유해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아멘.

 

또 이렇게 하나님이 변화시켜 준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 중에 요셉도 있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내가 형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의 악행을 반드시 보복해 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약행을 보복해 주겠다는 마음을 포기하고, 오히려 기근으로 어려움 속에 있었던 아버지와 그 형들의 보호자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요셉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았던 요셉은 그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창세기 41:38절 말씀을 보면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으며,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의 전옥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며 형통케 하시는 역사를 보았습니다. 요셉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형통한 삶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사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요셉은 고난의 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겠습니까?

형들의 악행을 되새기면서 보복할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요셉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주권적인 섭리로 행하시는 일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요셉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믿음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50:18-21절입니다.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으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날로 위로하였더라.’ 아멘.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가 과거에 받았던 상처들을 다 덮어주시고 정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살게 해 주십니다.

선한 사람들은 선한 생각을 하고 그 선한 생각은 또 선한 말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악한 생각을 하고, 또 악한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한가한 시간, 혼자 있는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한가한 시간, 혼자 있는 시간에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혼자 있는 시간이 나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요셉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미움과 분노와 원망을 품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요셉의 마음에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의 삶에 함께 해 주시면서 형통한 삶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런 판단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농락당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백성들에게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판단력을 주십니다.

 

그 다음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판단은 하되 정죄하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정죄하는 일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정죄는 마귀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한 후에 그 판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죄입니다.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판단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을 함으로 넘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 대표적인 일이 바로 이단에 대한 판단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판단을 공유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거나,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의 판단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록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당신은 지옥 갑니다.’ 라는 심판의 말은 하지 않게 합니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셨듯이, 하나님이 이단에 빠져 있는 그 사람들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게 해 주십니다. 선한 생각을 하며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아멘.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미래에 대해서도 악한 계획을 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한 것을 상상하거나 계획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그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내다보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그 날을 바라보고 내다봅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을 바라보면서도 가족들이 장차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는 그 날을 상상합니다. 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장차 올 천년왕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있는 하나님의 심판사건을 읽으면서도 심판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는 구원과 은혜의 날을 바라보며 삽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벤허의 가족은 예루살렘에서 이름 있는 귀족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부임하는 것을 구경하던 그 누이동생이 실수로 기와 장을 빌라도를 향해 떨어뜨리게 됩니다. 이 일로 빌라도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벤허의 절친한 로마인 친구인 멧살라가 맡았습니다.

그런데 멧살라는 어찌 된 영문인지 벤허의 가족에게 죄를 덮어 씌워서, 벤허는 노예로 팔려가게 되고, 그 어머니와 동생은 고생하다가 문둥병자가 되고, 벤허의 약혼녀까지 고난당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벤허는 이후 자기와 가족들을 파멸로 몰고 간 멧살라에게 복수의 칼을 갈며 삽니다.

그러다가 벤허가 탄 배가 해적들의 공격을 받아 모든 사람들이 다 죽게 되는 과정 속에 벤허는 그 배에 타고 있던 로마 귀족을 구해주게 됩니다. 그 후 벤허는 그 로마 귀족의 양아들이 되었고 결국 전차 경기에 출전하여 원수를 갚게 됩니다.

 

벤허는 그렇게 소원하던 원수를 갚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고 허무했습니다. 이 때 벤허가 들은 소식은, 전에 노예로 팔려가던 자신에게 물을 준 일이 있었던 예수라는 청년이,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골고다로 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따라갔다가,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누가복음 23:32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이 용서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분노의 칼이 떨어져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분노의 마음이 치유되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이 영화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주고자 했던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분노의 칼, 원망의 칼,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들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어둠을 다 몰아내고, 깨끗하게 청소해 주십니다. 그리고 청소된 마음을 성령으로 채워 주셔서, 더 이상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 주십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사랑은 너무 높고, 너무 크고, 너무 깊고, 너무 넓어서’, 우리의 사소한 감정들을 다 치유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우리의 마음 안에 가득 채워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 안에서 더 이상 악한 것을 헤아리고 상상하지 않고, 악한 일을 꾸밀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이런 역사에 대해 고린도 후서 5: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한 주간의 삶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권하시는 이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는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열매가 있는 한 주간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