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3. 6. 15:17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6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사랑입니다.

6절 말씀을 직역해 보면 그 사랑은 옳지 않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그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가페 사랑은, 옳지 않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살펴볼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먼저 그 어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옳지 않은 것이라는 말에는 아디키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디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아니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고, 디키아옳은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가 하나로 합성되어서 옳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디키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옳은 것옳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옳지 않은 것입니까? 여러분은 옳은 것옳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해서 설명하시겠습니까? 혹시 명료하게 설명해 보실 분이 계시나요? 옳은 것옳지 않은 것의 의미는 알겠는데 설명해 보려고 하니 쉽지 않아 보이지요.

 

제가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똑같은 흙을 사용하여서 도 만들고, 밥그릇이나 국그릇도 만듭니다. 그런데 이 도공이 이번에는 물을 마시는 용기로 사용하기 위하여 예쁜 머그컵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머그컵을 사서 물을 마시거나 차를 마시는 용도로 사용하면 올바르게 사용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머그컵을 사서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사용하면 옳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사용하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우리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이렇게 그 용도에 맞게 사용할 수도 있고 또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만든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만든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관점을 바꾸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들에게는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옳은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옳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장성하면 그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남자와 여자는 장성하게 되면 그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시대의 중요한 이슈가 무엇입니까?

남자와 남자가 혹은 여자와 여자가 사귀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동성애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옳은 일옳지 않은 일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아시겠지요?

정리해 보면 어떤 물건을 그것을 만든 사람이 목적한 대로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그것을 만든 사람이 목적한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의 영역에 적용해 보면, 나의 사고방식과 나의 생활이 부모로서 옳은 일인가? 혹은 자녀로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옳은 일인가? 적용해 볼 수 있겠지요. 혹은 목회자로서 나의 삶은 어떤가? 성도로서 나의 삶은 어떤가? 적용해 볼 수 있겠지요. 이렇게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우리의 전 삶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의 영역으로 확대해 보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들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 즉 지성감정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사람들에게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에 대한 기준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구분해 주는 절대적인 기준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기준대로 사는 것이 옳은 일이 되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준대로 살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해주신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의 기준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옳은 일옳지 않은 일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하라라고 하신 것은 옳은 일이며, 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는 사리판단의 능력이 있어서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분할 줄 알고, 도덕적으로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판단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들에게는 이런 도덕적인 능력이나 사리판단의 능력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오직 그 주어진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사리판단의 능력이 있습니까? 이런 도덕적인 기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를 기준에 두고, 내 입장에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며 삽니다. 예를 들면 이번 북경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중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도록 하기 위해서 심판은 말도 안 되는 편파판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 일로 중국은 온 세계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중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땄다고 기뻐하며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습니까? 이 일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들이 하며 사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얼마나 외곡 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국만 이렇습니까?

우리나라 정치 현실을 보십시오.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하여, 자기편의 불의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고, 상대방의 잘못과 약점을 부각시키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가 전에 잘 보아왔듯이 검찰의 수사가 자기에게나 혹은 자기들 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 불리할 것 같을 때에는 그 담당 검사가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각종 방해 공작을 하다가, 검찰의 인사철이 되자 그 수사 담당검사를 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한직으로 내어 쫓아서 수사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람의 보기에는 옳은 일 같아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옳지 않은 일도 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말씀은 사람들의 판단이나 행위가 얼마나 많이 외곡 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아주 옳지 않은 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주관적인 생각,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객관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멘.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권세 자들에게 복종하고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했다고 하면서, 성도들은 대통령이 잘못하는 일을 볼 때에도 위하여 기도해 주면서 복종해야 하지, 그 하는 일에 대해 잘 잘못을 따지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대통령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통령은 백성들에게 위임 받은 권세를 가지고 그 백성들이 누구로 부터도 억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업을 유지해 나가면서 평안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임 받아서 행하는 대통령에게 복종하고 그 세운 규칙을 지키며 또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해 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백성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대통령이 편파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각종 불의와 불법과 악행을 일삼고 있는데도,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들까지도 눈감아 주면서 존중해 주고 복종하면서 위하여 기도해 주라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법률을 보면 대통령의 재임 기간에는 면책특권이 있기 때문에 잘못을 해도 처벌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임기가 끝나게 되면 그때에는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한 잘잘못을 따져서 거기에 상응하는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 보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우리의 헌법정신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면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고,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고통 속에 지내는 것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다.’라고 하면서 지옥은 없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또 지옥은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가지고 바르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나쁜 삶을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기 위해서 가장해서 말씀하신 것일 뿐이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지, 사람이 죽은 후에 받게 되는 심판과 형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주장들이 이외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잘 먹혀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서는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기준과 이 세상의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심판이 있다.’라고 하면 심판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간다.’라고 하셨으면 그런 사람들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옳은 일옳지 않은 일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늘 주의하며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복 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절대적인 기준인 율법을 모세를 통해서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기준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이 있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기준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때 즉 아담과 하와의 때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양심이 바로 그 기준입니다. 양심은 사람들 안에 있지만 사람들이 양심을 통제하며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이 양심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양심이 사람들에게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가르쳐주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경계하고 판단하고 재판하는 기능까지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양심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게 되자 곧 바로 그 양심이 작동을 해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그 자신들의 죄를 보게 하였고, 죄의 수치심을 느끼게 하였고, 또 그 지은 죄를 지적받고 자책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그 깨달은 죄의 수치를 가려 보려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저녁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입니다.

 

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사람들의 양심의 부패를 가져왔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이 사람 안에 심어 놓은 양심까지도 부패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그 부패정도에 따라 그 양심들이 서로 다르게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 한마디 실수를 해 놓고도 양심의 정죄를 받아 마음아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서도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양심의 기능이 얼마나 많이 망가져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한 예가 됩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다가 그만 사람을 치는 교통사고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냈다는 것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얼떨결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양심이 이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00야 네가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냐?’ ‘네가 잘못해서 교통사고를 냈으면 그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을 받아야지 이렇게 숨어서 벌벌 떨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이 사람은 계속되는 그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나중에 스스로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가서 자수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경찰서를 찾아가서 자수를 하고 보니 그 날의 교통사고가 골목길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상대방이 많이 다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상대방과 좋게 합의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 후 이 사람이 한 말이 이랬습니다. 교통사고를 내고 숨어 있을 때는 그렇게 마음이 불안하였고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수를 하고 나니까? 자기가 한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받겠다고 하고 나니까?’ 그렇게 마음이 평안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타락되어서, 하나님이 처음에 주신 제 기능을 다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양심은 여전히 사람들 안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양심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은 우리 의지의 지배를 받지 않고 활동하며,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고 나를 재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두 번째 기능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셋째,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양심의 법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양심은 완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그 양심도 함께 타락하고 부패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이제 그 양심으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주셨던 양심의 법을 이제 율법이라는 형식으로 문서화해서 주셨습니다. 이렇게 양심의 법이 성문화된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는 양심이 곧 율법이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 양심의 법에서 율법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나온 율법을 그 백성 삼으신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한 양심의 법보다 더 온전한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다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 밖에 있었고 또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없었던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그 마음에 심어주신 양심의 법을 따라 살아갑니다. 양심의 법이 이들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해 주는 기준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율법과 양심의 관계에 대해 로마서 2:14-1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망가진 우리의 양심이 언제 다시 회복되게 됩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때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회복된 양심은 우리 마음 안에서 다시 율법적인 기능을 하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죽은 양심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 되는 데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내 양심이 일치되는 곳으로 나아가는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가지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조가 오래 되고 그 인격이 성숙된 성도들에게서는 차원 높은 인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성장성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성장과 성숙을 이루었던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사도 요한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성령이 주시는 이런 성장과 성숙들이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신앙의 삶 속에도 열매로 맺어 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다음에 살펴볼 것은 ‘기뻐하지 않는다.’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기뻐하다라는 단어에는 카이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즐거워하다’ ‘환영하다’ ‘가치를 높여 찬양하다 등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뻐하지 않는 다라는 뜻을 가진 우 카이로, 즐거워하지 않다. 환영하지 않는다. 높이지 않는다.’ 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가치 있는 생각을 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는 사람들의 본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옳은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가치 있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옳지 않은 것을 기뻐하고 즐기게 되었고,’ ‘그것이 마치 가치 있는 일이라도 되는 양 자랑하며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미 그 가치기준이 무너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죄를 지으며 즐거워할 뿐 아니라, 죄를 지으며 사는 다른 사람들을 옳다.’고 합니다. 로마서 1:32절입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으며 사는 죄들이 많지만 그 죄의 마지막 결론은 바로 동성애입니다.

과거에도 동성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사람들이 동성애를 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은 숨어서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사회도 동성애를 정죄했고, 동성애자들도 그 일이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방송과 드라마를 통해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를 미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동성애자들도 자기 나름대로 입장이 있고 인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의 삶도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동성애 자들을 법으로 보호해 주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시도되고 있는 것이 바로 동성애 합법화 법차별금지법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동성애자들을 지지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고등한 인격을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량과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레위기 18:22절입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위기 20:13절입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현대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현대교회에서는 이제 동성애자를 성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성직자로 까지 임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이제 교회까지도 동성애를 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동성애를 죄로 보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성직자로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현대교회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바른 믿음에서 떠나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현대교회가 바른 믿음에서 떠났다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현대교회에서는 십자가 신학이 아닌 번영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영신학은 내가 잘 되는 것, 내 교회가 잘 되는 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게 합니다.

 

오늘날은 전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번영신학에 기초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전도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면 구원을 받고, 기쁨이 오고, 그 삶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병 고침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한편으로는 우리의 죽은 영이 성령 안에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때 우리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임하신 거룩하신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살려 주시고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 주실 때,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악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실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받아 내 안에 있는 숨어 있든 죄가 들어나게 됨으로, 그 죄 때문에 가지게 되는 고통과 좌절, 절망의 아픔과 탄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아픔은 사도바울로 하여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랴.’ 라고 탄식하게 했습니다.

 

저의 경우를 보면, 제가 예수 믿고 10년 이상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 감사와 감격과 충만함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절망, 탄식과 좌절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죽은 양심을 일깨워주실수록 점점 죄에 더 민감해 지면서 이 영적인 고통과 좌절과 탄식과 절망은 더 커져 갔습니다.

 

어떤 때는 말 한마디 실수한 것을 가지고 깊은 고민을 하게도 했습니다.

때로는 원치 않게 거짓말을 하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 상대방은 내가 거짓말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내가 거짓말 했다는 그 자책하는 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도움요청을 외면한 후에 양심이 그 일을 아파하며 자책하도록 했습니다. 때로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성령이 우리 양심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아픔들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양심이 살아난 사람들 즉 깨어 있는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멘.

 

이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면?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나도 싫어하게 합니다. 거룩한 성령께서는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혐오하시듯이 나도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혐오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죄라도 지으면 힘들어 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그 마음에 역사하는 사람, 하나님이 그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 전도를 하는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 전도하든지 복음만 전해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트로트 음에다가 복음을 접목하여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동영상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정말 그렇게 해서 전도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복음이 우스개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까?

 

한국교회가 선호하는 총동원 전도주일은 어떻습니까?

교회들은 많은 돈을 주고 인기 있는 연애 인과 가수를 초청하고, 고가의 상품을 준비한 후에,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연예인인 우리교회에 옵니다. 그 때 참여하면 이런 저런 상품을 줍니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웁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정말 이렇게 해서 사람들을 많이 모으면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까? 제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모은 사람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교회에 온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에게서는 성령이 주시는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단 한 번의 변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이루어져 가는 계속적인 변화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는 것을 칭의라고 하고, 의롭다 칭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화되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세상에 속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형상을 입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전 삶을 통해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실 때 사무엘 선지자에게, 그는 나와 마음이 합한 사람이다.’ 라고 하시면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하면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정말 당시 다윗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후 다윗은 성령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굶주린 사자와 곰이 그 아버지 양을 헤치려고 할 때 물리치기도 하고, 또 블레셋의 구척장신인 골리앗 장군을 물리친 일도 있고, 사울 왕에게 들렸던 악귀를 찬양을 통해 쫓아 내 준 일도 있습니다.

 

이런 다윗을 보면 대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그 인격은 아직 미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상 25장을 보면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숨어 살던 인근지역에 나발이라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나발은 다윗과 그 부하들 때문에 도적이나 강도의 해를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 나발이 양털을 깎는 날 한 소년을 보내어서, 이 기쁜 날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먹을 것을 좀 나눠주기를 요청합니다. 그 때 나발이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사무엘 상 25:10-12절의 말씀을 보면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아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 이 모든 말을 그에게 전하매

 

이 말을 전해 듣고 다윗은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이 나발의 악을 심판을 하겠다고 하며 나발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만약 지혜로운 나발의 부인이 아니었다면 당시 다윗은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해서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 때 사울의 친척 시므리라는 사람이 피난 가는 다윗의 행렬을 따라 오면서, 다윗 왕을 저주하고 다윗과 그 신하들에게 돌을 던지며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 때 다윗을 호위하던 군장 아비새가 시므리의 머리를 베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때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라고 합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어느 때의 다윗을 보고 저는 나와 마음이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셨을까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입니까? 아니면 청년의 때입니까? 아니면 노년기의 다윗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그 인격이 성숙한 노년기의 다윗을 미리 내다보고 그는 나와 마음이 같은 사람이니 가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도 너는 세상 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였지만 기근이 있자 하나님과 그 주신 약속을 믿지 못하고 물과 양식이 있다는 애굽으로 피난가지 않습니까?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이 언제 완성되게 됩니까? 창세기 22장에서 그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다윗의 언제의 모습을 보고 그는 나와 마음이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제의 믿음을 보고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까? 이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될 모습을 미리 내다보시고, 다윗을 인정해 주시고, 아브라함을 인정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신앙은 예수 믿는 그 순간에 시작되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믿음과 인격과 삶이 하나님이 목적하셨던 데까지 이르고 성장해야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번영신학에서는 이런 성장과 성숙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을 체험하고, 부자가 되고, 복을 받고, 건강을 얻는 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번영신학을 21세기 이단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5:1-2절 말씀을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이 말씀의 상황을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그 아버지가 후처를 취하였다가 돌아가시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의 후처를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이런 일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한이 여기지도 않았고, 교회에서 그 사람을 추방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윤리 기준이 이렇게 낮았을까요?

고린도 교회가 이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을 보고도 용납한 것은, 자기들도 그렇게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정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때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문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백성들에게 엄격한 삶의 요구를 하고 계신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죄에 대해 너그러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운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성도들을 인품을 갖춘 성도들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전에 수만 명의 성도를 가진 어떤 교회 목사님이 교회 헌금을 가지고 미국 라스베가스 카지노에 가서 도박을 해서 많은 돈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와서는 내가 교회건축에 대한 성도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금식하며 작정기도를 한 후 교회 헌금을 가지고 도박을 하러 라스베가스 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다 잃어버리면서 하나님이 도박장에서는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회 성도들 중에는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면 금식기도하고 도박하려고 그 먼 곳까지 갔겠느냐 라고 하면서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끼리끼리 모인 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 교회의 윤리기준이 완전히 무너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요구하시는 기준은 어떠합니까? 시편 24:3-6절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율법의 기준이 되었던 양심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기준까지 회복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번영신학에 빠진 사람들처럼 신앙의 외적 역사에 너무 치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되도록 그 인격의 성숙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말씀과 같이 옳지 않은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우리가 해 나가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성장하고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성장하고 성숙한 삶, 거룩하고 경건한 삶에 이를 수 있도록 애쓰고 힘쓰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